새앙골2010-12-13
내가 태어난 곳은 함경남도 안변군 석왕사면 이었다.
생후 백일도 채 안된 나를 업고(해방 후 삼팔선이 막혔으므로) 우리 어머니,아버지,
백찜 한덩이 싸고 우산 하나에 중국에서 들어온 마작 한질 달랑 들고
밤을 타서 남한으로 넘어 오셨다.
해방이 되고 소식없는 아들,며느리 땜에 우리 할머니 얼마나 우셨던지 눈 꼬리가 짓무셨단다.
그 때 부터 할머니의 며느리 미움증에 어린 나는 일찍부터 눈치 꾸러기가 되었었는데,
어린시절 면내 제일의 수재로 소문 났었던 우리 아버지,
고등고시(지금의 사시 )공부를 핑계로 아내나 딸의 고달픔은 모른 채 하시는게 점잖은 처신이라 믿으셔서 그러셨는지,
부잣집 막내 딸이 셨던 어린 아내의 편이 되어주지 않으셨다.
여름날 아버지의 육법전서를 목침처럼 베고 누워서 잠들고,
책들을 포개 쌓아 놓고 할머니 몰래 선반에서
콩고물 항아리를 꺼내 식은 주먹밥 만들어 먹을 때의 맛이란 어디 산해진미와 비길데가 있으랴...
잘난 아들이 시험에 떨어진 것은 며느리 잘못 들어온 탓이오,
내 밑으로 여동생이 난 것도 며느리 잘못 들어온 탓이니,
결국에는 시험을 포기하고 교편으로 돌아 선 아버지,
학교에서 돌아 오는 길목에 마중 갔다가 따뜻한 제방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면
어느새 난 아버지 목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아랫목에서 잠을 깨곤 했었다.
6.25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퇴각 한다는 소리에 학교 사정을 보러 가셨던 아버지께서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도 할머니의 재수 없는 며느리 타령은 어김없이 나오고,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여섯 살의 나를 걸리고 동생을 업고 임신한 몸으로 옷보따리이고 외가가 있는 진주를 향했다.
교통편이라고는 도보 밖에 없던 때라,
지름길의 재를 넘어 여러날을 길에 있을 수 없었던지라,
어둔 새벽에 큰 머슴의 바지게에 얹힌 나에게 할머니는 지겟발 꼭 잡아라 떨어지면 큰일난다.하셨었다.
금새 잠에 떨어진 난 우쭐 우쭐 흔들리는 느낌에 퍼뜩 눈을 뜨면
지겟발을 얼른 붙잡고 하늘을 볼라치면 잠에 취한 눈속 가득히 하늘이 다가왔었고,
그 하늘 가득한 별들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지금도 난 가끔 그날 새벽 하늘이 꿈속에 보인다.
날이 훤히 밝을 무렵 합천군 묘산면에 닿아 머슴아저씨는 돌아 갔고,
그 때 부터 뜨거운 신작로에 앞 뒤로 한짐인 엄마와 여섯 살의 타박네가 타박 타박,
백리가 넘는 길에 나서게 되었는데 지친 나는 주저 앉아 떼를 써 보기도 하고
뜨거운 신작로에 뒹굴기도 했지만
엄마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어쩔 수 없는 나는 얼굴에 지렁이 자국을 수도 없이 그린채 울어도 보고,
넘어지고 구르고 목놓아 엄마를 부르며 걷고 또 걸어,
어둠이 짙어진 뒤에야 의령읍에 당도 했었다.
몇 집 째인가에 맘씨 좋은 아주머니를 만나 겨우 헛 간 같은 토방에 몸을 누이게 되었는데
엄마는 쓰러지 듯 누운채 꼼짝을 안으시고 나는 밤새 빈대에게 뜯기느라 한 잠도 못자고 얼마나 엄마를 불렀던지...
길 가로 난 조그만 봉창이 훤히 밝아 와 엄마 날 샜다고 날 샜다고,
엄마 일어 나라고 울고 울고또 울고...
이른 새벽 아침밥도 못먹은 우리 세모녀~~
의령군 화정면에서 남강을 건너는 나룻배에 몸을 실어 진양군 지수면에 닿았고,
외갓댁에서 안잠지기로 있던 아주머니를 만나 등에 업히는 순간 나는 거의 실신 해 버렸었다.
아버지가 돌아 오셔서 우리 가족이 다시 모여 부산으로 향하기 까지의 그림은 처절하기 까지한 데도
그때가 그리워 지는 건, 겉으로 보이지 않으시며 속으로 도타운 사랑주시던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아버지 정말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삼년만에 쓴 글입니다.
지금 육년이 되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