圭
語源
규(圭)는 고대에 제왕, 제후가 예절과 예식을 거행할 때 손에 집어 들었던 일종의 옥기이다.
이것은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평평한 형상으로 '토(土)'글자의 모습과 닮았다. 규(圭) 글자가 두 개의 토(土)를 지니고 있고 하나는 윗부분 다른 하나는 아랫부분이다. 규(圭')는 토(土)자가 중첩된 것이다. 소전에서 규(圭)자는 가끔 옥자를 부수로 가지는데, 옥의 속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圭臬]: 해시계를 가리킨다. 규범 또는 법도를 비유한다.
文化
<규(圭) - 황제를 알현할 때 홀>
고대에 제후가 조회, 회동할 때 손에 가지는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진 서옥(瑞玉), 즉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준 홀이다. ‘서(瑞)’자는 설문해자에서 옥으로써 증거물, 증명을 삼았다. 그런데 ‘설문’에는 봉작의 등급에 따라 그 종류와 길이가 달랐던 사실이 적혀 있다. 즉 천자가 공, 후, 백, 자, 남 등 5등의 제후에게 봉작의 증거로 준 홀에는 환규, 신규, 궁규, 곡벽, 포벽이 있었다. 이를 오서라고 한다.
규(圭)란 고대에 제후가 조회∙회동할 때 손에 가지는 위가 둥글고 아래가 모진 서옥(瑞玉), 즉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주는 홀이다. <설문해자>에는 봉작의 등급에 따라 그 종류와 길이가 달랐다고 한다. 즉 천자가 공∙후∙백∙자∙남 등 5등의 제후에게 봉작의 증거로 준 홀에는 환규(9치)∙신규∙궁규(7치)∙곡벽∙포벽(5치)이 있었다. 이를 오서(五瑞)라 한다. 이 홀들은 다 옥으로 만들어서, 고문에서는 珪(홀 규)자를 썼다. 하지만 圭로 바꾸었는데, 그 이유는 천자가 제후를 봉하면 그들은 전답과 산천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환규는 곧은 푯말처럼 생긴 것으로 궁실의 모양을 새겨 넣은 홀. 신규와 궁규는 사람의 형상을 새겨 넣은 홀. 곡벽은 옥에다 곡식이나 부들 모양을 새겨 넣은 홀이다. 이렇게 크기와 문양이 다른 것은 존비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1]
규(圭)자는 ‘土’자를 상하로 겹친 회의자로서 천자가 제후를 봉하면 그들은 토지, 즉 전답과 산천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封(봉할 봉)자도 회의자로서 ‘圭+寸’의 회의자이고 ‘寸(촌)’자에는 ‘법도, 규칙’의 뜻이 있다. 따라서 법도에 따라 제후에게 땅을 떼어 준 것이 곧 ‘封’이다.[2]
<규형비(圭形碑)>
중국 국가문물국(한국의 문화재청에 해당)이 발간하는 ‘중국 문물보’ 13년 1월 4일자에 고구려 비석 발견 기사가 실렸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문물보’에서 이번 고구려비(제2의 광개토대왕비로 추정되는 비석)의 양식을 ‘규형비(圭形碑)’라고 규정했다. ‘규형비’는 후한시대부터 시작됐으며 ‘규(圭)’에 대한 <설문해자>의 내용을 인용해서, 고구려가 한나라의 제후국이었다는 논리를, 이 비석을 통해 펼치고 있다.
이런 경향은 ‘문물보’의 결론에서 재확인된다. “새로 발견된 고구려비는 한자 예서체다. 이는 고구려가 한자 예서체를 정부 공식 서체로 사용해 정책과 외교관계 등을 발포했음을 알려준다.”고 했다. 또 “비석의 형식은 동한이래 상용했던 규형(圭形)으로, 고구려가 중원 문화와 연계됐음을 반영한다.”고 확대 해석했다. 고구려에 대한 한나라의 문화적 지배를 은연중 부각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