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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아차산에서 소쩍새가 울고 있었다. 10월 중순인데도 밤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창문을 꼭 닫았다. 네 사람은 책상 앞에 앉았다. 백형기는 카세트테이프를 듣던 이어폰을 거두어 책상 위에 놓았다. 설교학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잘 전하려면 유명 설교자의 녹음테이프를 자주 들어야 했다. 억양의 높고 낮음이나 쉬어야 할 곳과 강조할 곳, 호흡조절 등은 남의 설교를 들어야 익힐 수 있었다.
“오늘은 밤새워 공부해보자고−.”
이광희 전도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한 잔씩 타내며 말했다. 그 주간에 제출해야 할 리포트를 마무리하기도 하고 다음 달 중순부터 시작될 학년말 시험에도 미리 대비해야 했다.
“이 전도사, 적당히 해. 학점 신청을 1~2학년 때처럼 그렇게 많이 해놓으니까 부담이 크지······.”
백형기가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면 학교 공부는 목회 현장에 별로 영향을 못 끼친다고 하던데?”
옆에 앉은 룸메이트가 형기의 말에 동조했다.
“히브리어, 헬라어 하느라 애를 먹지만 목회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거야.”
맞은편 룸메이트도 같은 뜻을 비쳤다.
“진짜 영향은 보이지 않게 나타나는 법이지. 학교 공부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과 같지 않을까? 비료처럼 금방 효과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목회를 길게 보면 아무래도 학교 시절에 많이 배우는 것이 좋겠지.”
이광희는 자기 소신을 폈다.
“땅을 깊이 갈고 거름을 주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내겠지. 좋은 땅을 만들려면 먼저 좋은 농부가 되어야지. 그런데 지난번 중간시험 때 보니까 커닝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너무 실망했어.”
“커닝해서 성적을 올리려는 사람이 목회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목적이 아무리 선해도 과정이 나쁘면 결과를 인정받을 수 없겠지.”
“선배들 얘기를 들어보면 목회지는 좋은 자리와 같다는 거야. 교회 성장학에서도 배웠잖아. 좋은 자리를 골라 점포를 내면 장사가 잘되는 것처럼. 개척하려면 신개발지나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목이 좋은 곳을 잡아야 빨리 자립할 수 있다는 말이지.”
“장소를 앞세우는 교회 성장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사도시대 초대교회는 유무상통 했는데, 부자는 부자 끼리, 지식인은 지식인끼리 모이도록 하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그들대로 그룹을 지어야 한다는 ‘유유상종 이론’은 이해가 잘되지 않았어.”
“나도 그래!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하나님의 아들이 가난한 자, 배우지 못한 자, 병든 자, 죄인들의 친구로······.”
“실제로 초대교회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면 오늘의 교회 성장은 어렵다는 거야. 그렇다고 ‘점포개설’의 논리를 도입하는 것도 하나의 편법인 것 같아.”
“요즘은 목회를 회사경영의 논리에 접목하는 교회들이 나타나고 있잖아. 교회가 대형화하면서 그런 이론도 무시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다 보니 말씀이나 기도보다는 인간적인 프로그램이 앞서고 성도의 사랑은 점점 식어지는 것이 아니겠어?”
“목회에는 말씀과 기도가 앞서야 교회다운 교회로 든든히 설 수 있겠지. 설사 크게 성장하지 않아도 교회는 성경에서 보이는 모습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문제는 모든 교회가 대형교회를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이야.”
“그렇지! 사람들은 교회가 크면 일단 목회에 성공했다고 말하잖아.”
“목회의 성공이 교인 수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다면 세상일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고 모든 교회가 작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어. 교회의 크고 작음보다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어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역할이 있고,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로서의 훌륭한 기능이 있지 않겠어?”
“교회의 모습은 목회자만의 책임은 아닌 것 같아. 요즘 교회들이 목회자를 청빙할 때 보면 미국에 유학하거나 박사학위 소지자를 선호하는 것이 현실이야. 우리 교회도 담임목사님이 은퇴하면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을 청빙했어.”
“좀 더 수준 높은 설교를 듣고 성경 말씀을 잘 배우려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의 자랑거리로 내 세운다는 것이 문제지.”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교인들이 뭘 제대로 알겠어? 이력서에 ‘박사’라는 말만 들어가면 청빙에 우대하다 보니 ‘가짜 박사’가 마구 양산되고 있잖아.”
“그리고 목회자들도 줄을 잘 타야 목회의 길도 잘 열린다니, 그런 걸 생각하면 힘이 빠져. 졸업한 선배들 가운데도 목회자의 자녀들이 상당수 있잖아. 교계의 이름 있는 지도자의 자녀들은 큰 교회가 지원하는 기관이나 수양관에 이름만 걸어놓고 때가 되면 목사안수를 받게 하잖아. 안수 조건에 편법을 동원하는 것이지.”
“교계의 지도자도 문제지만 그런 편법을 거쳐 목사안수를 받고 빨리 성공(?)하려는 그들의 자녀들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시험에 커닝하는 사람들이나 목사안수에 편법을 동원하는 사람들이나 다를 게 뭐 있겠어. 목회자나 그 자녀들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그런 것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할 텐데. 한국교회가 이대로 가다가 어떻게 될지······.”
사실 졸업을 앞둔 신학생들에게 목회지 선택은 초미의 관심사이다. 지난해 백형기와 기숙사 같은 방에 있었던 선배는 졸업은 다가오는데 목회지가 결정되지 않아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도록 초조한 모습을 드러냈다. 시골교회나 지방의 미자립교회에는 갈 곳이 여럿 있었지만 그는 대도시 지역에서 자립한 교회의 청빙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형기는 그때 그 선배를 보며 ‘저분의 믿음이 어디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기들도 졸업하면 동서 사방으로 흩어진다. 졸업하자마자 안수를 받고 군목으로 바로 입대하는 사람이 있고, 해외 선교사로 파송을 받거나 해외 유학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국내에서 사역하게 된다.
하반기가 되면 각 교단 신문은 새해의 목회자 청빙 광고로 장식된다. 자기가 희망하는 지역과 기타 조건이 맞으면 그 교회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실천처에도 희망하는 목회지를 신청해놓는다. 신학교는 교회들이 청빙 의뢰를 해오면 적절한 대상자를 추천한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대부분 부 교역자를 희망하기 때문에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30대 후반이나 40대에 접어든 졸업생들은 적절한 목회지를 만나기 어렵다. 목회자가 없거나 다른 사람이 기피하는 시골이나 탄광지역 같은 곳은 외면하고 목회의 여건이 잘 갖춰진 곳에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목회지 선정의 어려움을 더했다.
엊그제 해마다 실시하는 신학생 의식구조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신학생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것은 역시 희망하는 목회지이다. 서울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다음이 대도시, 중소도시, 기관목회, 농어촌 순으로 나타났다. 창신대 신대원 졸업예정자는 120명이었다. 그 가운데 서울이 67명(55.8%), 대도시 31명(25.8%), 중소도시 17명(14.1%), 농어촌 1명(0.8%) 기타 4명(3.3%)이었다. 지난해는 농어촌이 4명이었으나 올해는 농어촌교회 희망자는 단 1명뿐이었다. 목회 여건이 열악한 시골은 언제까지나 미자립교회로 남는다. 그러나 신도시 지역에서 개척한 목회자는 2~3년이면 자립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농어촌 희망자 1명이 누구일까?”
학생들은 학교신문을 펼쳐보며 그 1명에 관심을 보였다. 백형기는 그 1명이 자기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어느 지역을 희망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서울과 대도시 지역 희망이 80%가 넘는 것은 졸업생들 스스로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회지 선택은 졸업생들에게 하나의 희망 사항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서울에서 목회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울 어디에 남게 되고, 입학할 때의 정신을 그대로 살려 목회자가 없는 교회를 희망하는 사람은 시골교회 목회자로 일하게 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신학생은 목회지는 주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고 순종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그 자리에 집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이 임박하면 기존의 생각은 많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원한다고 자기가 희망하는 곳으로 다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지 희망도 1지망, 2지망, 3지망까지 범위를 넓힌다. 그래서 상당수 졸업생에게는 어느 곳이든지 맨 먼저 청빙이 들어오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 하나의 전통처럼 전수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이 주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받아들였다. 어떤 이들은 이곳저곳을 비교하며 가리다가 둘 다 놓치기도 했다.
“백 전도사는 어느 지역을 희망했어?”
학교신문을 들여다보면서 이광희가 물었다.
“나는 농어촌 지역을 희망했어.”
“나도 농어촌 1명이 백 전도사인 줄 알았어. 작년에는 4명이나 되었는데······.”
유일하게 농촌을 희망한 백형기의 방에서는 2명이 서울, 1명이 중소도시를 지원하고 있었다. 교단 총회에서는 갈수록 외면당하고 있는 농어촌교회 목회자 청빙을 위한 특별대책을 마련, 지난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것은 농어촌을 지망하는 졸업생은 군목이나 해외 선교사처럼 졸업과 동시에 목사로 안수하여 임지로 파송하는 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어촌 지역은 신학생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우리나라의 ‘땅끝’은 어디일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끝은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목회지가 아닐까? 나는 그 땅끝으로 가기 위해 농어촌을 희망했어.”
백형기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나 아무도 희망하지 않는 지역으로 갈 뜻을 밝혔다.
백형기의 졸업논문 ‘행동하는 경건’은 최종심사에서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논문은 이론과 실제가 잘 부합하고 실천력이 떨어진 한국교회에 내일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논문을 쓸 때 읽었던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의 기억을 떠올렸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기이한 사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들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 즉 공정한 처신이나 예의나 도덕이나 자연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의 행동이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교수들 사이에서도 신대원 졸업생이 이런 미래지향적인 훌륭한 논문을 제출한 예는 아주 드문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었다. 룸메이트들은 논문상 축하 파티를 열어 형기를 격려했다.
백형기는 설자에게 전화로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설자는 전화를 받고 축하하면서 12월 초에 외삼촌 병원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고 말했다. 백형기도 조금 있으면 교육전도사 직을 사임해야 했다. 학교도 교회도 연말이 다가오면 교역자의 이동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개척교회를 희망하는 학생들은 이미 3학년 들면서 후원교회를 찾고 개척 멤버를 구성하며 준비를 진행한다. 서울지역이나 대도시교회에서는 부 교역자를 청빙하는 교회가 많지만 농어촌 지역에서는 교계 신문에 광고를 내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청빙하는 목회자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직접 간접으로 친분이 있는 목회자나 성도를 통해 청빙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백형기처럼 목회자가 없는 땅끝으로 가려면 교회 소개를 받기도 어렵고 스스로 찾아보기도 쉽지 않았다.
학교는 11월 말 종강하자마자 바로 방학에 들어갔고, 지방에 있는 학생들은 대부분 짐을 챙겨 집으로 내려갔다. 기숙사에는 서울의 교회에서 봉사하는 소수의 학생들만 남아있었다. 며칠 전 백형기는 설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동안 형기의 안부를 묻는 것과 함께 성탄절을 서울에서 보내고 싶다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서울에 도착하는 날짜는 크리스마스이브를 희망했다. 설자의 편지를 받고 형기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것은 설자를 다시 만나고부터 형기가 품고 있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형기는 아직도 프러포즈를 못 했다. 기회도 없었지만 과연 설자가 목회자 아내의 길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에 주저했다. 그의 생각은 ‘No’로 기울었다. 형기는 그녀를 어려운 길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신학교를 지망하는 결단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