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티아누스(주후 81-96년) : 살아서 신이 되려고 한 철부지 황제
티투스가 아들을 남기지 않은 탓에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가 30세의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도미티아누스는 전임자인 아버지와 형과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인물이었는데, 그의 등장으로 로마는 다시금 가이우스와 네로 황제 때 경험했던 악몽을 되풀이해야 했다.
사치스럽고 귀족적인 생활을 좋아했던 도미티아누스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문제는 그가 죽은 후에 신격화되는 것을 기다릴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는 황제가 선정을 베풀 경우 죽은 후에 신으로 선포해 숭배하는 전례가 있었다. 아버지와 형 모두 사후에 신격화되었고, 이런 영예는 이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클라우디우스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기 원했던 도미티아누스를 보면서 로마 시민들은 죽은 네로 황제의 그림자를 보았고, 결국 그는 암살로 생을 마감하며 '기록말살형'에 처해진다. '기록말살형'은 제정 로마에서 원로원이 황제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극이었는데, 이것은 기록을 남기기 좋아했던 로마인들이 역사 기록에서 해당 황제의 모든 통치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교회사에서도 도미티아누스는 네로 황제에 이어서 기독교를 핍박한 잔인한 황제로 기억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 교회와 국가의 충돌 제2라운드
네로는 로마제국에서 최초로 발생한 기독교 박해자로 기록된 황제였다. 그 두 번째 박해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 바로 도미티아누스였다. 서민적이고 소박했던 아버지(베스파시아누스)와 형(티투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황궁에서 자라 사치스러웠고, 형이 일찍 요절한 탓에 30세의 젊은 나이에 얼떨결에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는 분명 여러 면에서 ‘준비되지 않은’ 황제였다.
그가 폭군의 길로 확실히 접어들게 된 것은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고자 한 그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대단한 신성모독으로 여기겠지만, 고대 로마제국에서 황제의 신격화는 그렇게 혐오스런 일이 아니었고 옥타비아누스 황제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었다.
선정을 베푼 황제들은 죽은 후에 예외 없이 신격화되었고, 충성스런 로마 시민들은 신전을 찾아가 죽은 황제를 위해 향불을 피우곤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 때 살아서 신으로 추앙받고자 했던 도미티아누스의 문제를 지적하자면, '인내심 부족' 내지는 '허영심'이었지, 이것이 동시대 로마인들에게 '우상숭배'와 같은 그런 느낌을 준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신을 신격화한 도미티아누스의 정책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철저한 유일신 신앙을 특징으로 하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특성상 그들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발에 도미티아누스도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먼저 유대교 진영을 정조준한 반유대교 법령들을 발표했다. 이 법령들로 인해 로마 시민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바치던 반 세겔의 성전세도 성전이 파괴된 것을 이유로 들며(주후 70년) 로마 시에 있는 쥬피터 신전의 유지비 명목으로 사용했다.
이런 조치들로 인해 발생할 유대인들의 반란을 미연에 막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서는 삼엄한 공포 정치가 행해졌다. 유세비우스(4세기 교회사)는 이 당시 나사렛에 사는 예수님의 친족들이 당해야 했던 심문에 대한 흥미로운 스토리를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친족들은 다윗 왕실에 속한 혈통이었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반란의 선봉에 설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고발되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들이 세속 권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박한 농부들임을 알고 그냥 무죄 방면했다고 한다.
한편 유대교 진영과 함께 기독교에 대한 핍박도 병행되었다. 네로 치하에서의 기독교 박해가 로마 시에만 국한되었던 것과 달리 도미티아누스 치하에서의 박해는 멀리 소아시아 지방에까지 미쳤다. 박해의 여파로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었고, 이런 배경에서 씌어진 서신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바울은 로마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세속 정부에 복종하도록 권면하면서 권력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말한 바 있다(롬13:1,2). 하지만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은 자신의 서신서에서 로마제국을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큰 음녀'(계17:1,6)로 묘사하면서 세속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도미티아누스의 박해기에 처형된 인물 가운데 최고위층 인사는 다름 아닌 황실 내에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그들은 바로 클레멘스와 도미틸라 부부였다. 클레멘스는 황제의 사촌이었고 도미틸라는 황제의 조카딸이었다.
클레멘스는 처형되던 해인 주후 95년에 로마제국에서 최고위직인 집정관을 지내기도 했다. 이들 부부가 처형된 이유는 기독교에 귀의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는 여기서 네로 통치기인 주후 60년대에 주로 하류층의 종교에 머물러 있던 기독교가 도미티아누스 통치기인 주후 90년대에는 이미 최고위층에까지 전파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클레멘스와 도미틸라 부부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던 도미티아누스는 이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입적시켰다. 이들의 이름도 각각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로 바꾸어주고 최고의 학자를 붙여 두 소년에게 통치자 수업을 시켰다.
그런데 이들의 친부모가 당시 로마법에서는 불법 종교였던 기독교에 귀의하는 바람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교를 믿는 건 자유지만 차기 황제의 친부모가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버리고 이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나는 유쾌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려고 한다. 만약 클레멘스와 도미틸라가 계속 살아남아 자신의 아들들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키웠다면, 그리고 예정대로 그들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 이후의 역사는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는 기독교인 황제(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하기까지 200년이 넘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기독교는 국가 로마와 정면 대결을 하며 혹독한 시련기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핍박은 그가 갑작스레 암살당하면서 그치게 된다. 도미티아누스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사람은 도미틸라의 집사장이었던 해방 노예 스테파누스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