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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89번 말씀
제목 : 하나님와의 동행, 왜 이렇게 힘드나
창 40:21-23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23.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아멘.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는 사건들 속에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들의 뜻을 묵사발내면서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시는 거대한 하나님의 성공스토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History, 라 하죠?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하나님의 성공은 이미 결정이 되어 있는 것이고 왜 인간의 도모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성공이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는가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과정이 바로 역사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내어놓는 행복을 향한 도모와 역사의 해결책들을 기각하시면서 오직 당신의 뜻만이 선임을 확인시켜 가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이미 확정된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그 확정된 미래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과 지혜를 동원해서 미래를 개척하겠다고 열심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그것을 깨고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하나여야 됐어요. 그것을 완전한 순종의 상태라 부릅니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고 그 존재에게 완전한 의존을 하게 될 때 그 둘은 하나가 되는 거거든요. 그 완전한 순종의 상태에서는 쌍방이 계획하고 목적한 것과 도달하려는 목적지가 같아야 돼요.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뜻의 그 목적지인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선한 상태’ 에요. ‘토브;.
그런데 하나님 절대 하위인 인간들이 자기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해서 자기들의 행복에 도달하려했고 자신들의 최종 목적지를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나섰어요. 그게 선악과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그 모든 피조물들을 다 쓸어버리실 수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창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반란을 허락하셨어요. 인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꿈과 비전과 야망을 내어놓으면서 스스로가 고안하고 만들어낸 행복의 고지에 도달하려 애를 썼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하고 스스로의 행복을 찾겠다고 나선 인간들이 고안하고 추구하는 그 어떤 것들도 결코 인간들을 만족스럽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셔서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에 도달하겠다고 하는 인간의 시도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출산해내는 열매라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럽고 무서운 것인지를 경험하게 하세요.
그것을 역사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전쟁과 억지와 모습과 허점투성이로 점철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한 인간들 중에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은 신인류가 구별이 되어서 이 땅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교회에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나라를 상속해주시기로 언약을 하셨어요. 언제? 창세전에.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서 격발되는 인간의 탐욕에 근거한 뜻과 야망과 비전들을 하나하나 꺾어버리면서 당신의 뜻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그들을 이끌어 들이시는 거예요.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렇게 자신의 뜻이 꺾이는 과정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는 항상 고난이라는 것이 숙명처럼 따라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도의 고난은 다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는 고난인 거예요. 그래서 성경은 고난이 올 때 기뻐하라! 고까지 다소 무리한 듯해 보이는 권고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고난을 어떻게 기뻐해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여자분들 성형 수술할 때 아프죠? 근데 목적이 있으니까 참죠? 기쁘께 참잖아요? 예가 좀 그렇지만. 목적이 있으면 고난은 견뎌낼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우리의 꿈과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꿈과 비전과 야망이 꺾여지고 파괴되어지는 것을 기독교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창세기 39장의 개괄적인 내용을 살펴보면서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고난의 목적지에 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고난의 목적은 한 마디로 연단, 단련이라고 했죠? 그리고 그 연단은 완성의 자리로 향하는 필연적 과정이라고 그랬어요. 반드시 겪어야 되는 과정. 그 연단의 목적지가 바로 우리 뜻이 아주 제대로 완전하게 다 꺾여지는 그 지점인 거예요. 죄인들의 허황한 뜻이 꺾이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가 되는 과정 속에서 무엇이 참 가치이며 참 행복의 길인지를 분별하는 데에 쓰이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이 고난을 성도의 삶에 유익한 것으로 정의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삶을 보세요. 그가 꿈을 꾼 후에 그도 그 꿈에 대한 은근한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과 아버지에게 그냥 떠벌리면서 이야기를 했겠죠? 바로 그 때 그의 기대를 사정없이 무너뜨려버리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히 오롯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요셉의 인생이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요셉의 고난을 통해서 요셉이 갖고 있는 꿈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비워내시는 거예요. 13년 간의 그 고난을 통해서. 그리고는 그 비워진 그릇 속에 당신의 꿈을 채우시는 거예요. 요셉의 총리 등극이 그의 꿈의 실현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요셉의 총리 등극은 요셉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던 거예요. 그게 정말 좋은 것이었다면 요셉이 자기의 해골을 여기에서 갖고 나가다오, 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애굽에 보내서 430년간 종살이를 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셨어요. 그죠? 그게 이루어져야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거기에 쓰여진 것이 요셉의 총리 자리였던 거예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애굽 행에 요셉을 쓰시기 위해서 애굽의 왕조까지 바꾸셨어요. 애굽의 왕조는 함족이에요. 원래. 셈, 함, 야벳의 함족. 그런데 요셉의 시대에 셈족인 힉소스 왕조가 애굽을 공격해서 애굽 왕실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같은 셈족이었던 요셉이 거부감 없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 마련해놓으신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을 모르는 왕조가 다시 정권을 잡고 히브리사람들은 그때부터 노예의 삶을 살게 된 거죠. 왜? 하나님이 그들을 노예생활 시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왕조가 또 바뀐 거예요. 모든 것이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 위에서 성도가 처해지게 되는 빈부귀천, 크고 작음, 높고 낮음, 예쁘고 추함 등은 요셉의 총리 직분이 단순한 하나님 사역의 도구였던 것처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잠시 쓰이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지 그것으로 그들의 최종가치가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닌 거예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였다고 하늘나라에 가서도 그마만한 대우를 받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이 땅에서 아무리 부자로, 아무리 높은 벼슬에 올라서 잘 산다고 해도 하늘나라에 가서 그마 만큼 보상받지 못해요. 그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도구로 쓰여지는 잠시, 한시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역할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서는 안 되는 거예요. 오히려 성도의 삶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전부 비워내고 하나님의 순전한 그릇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게 성도의 본분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라는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그 가난을 비워내야 하는 자리에 서게 돼요. 어떤 사람은 부함이라는 상황에 교만하지 않고 그 부함을 비워내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높은 지위를 비워내는 자리에, 어떤 사람은 보잘 것 업어 보이는 직업 속에서 그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것을 비워내는 자리에 서게 되는 거예요. 비워낸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겠죠? 거기에 묶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나에요. 그 모든 상황과 처지와 사건과 정황들을 비워내는 거예요.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난 부자야, 난 예뻐, 난 못 생겼어. 이러한 것들로 자기 정체성을 정의하지 않는 거예요. 성도는 그리로 성숙되어져가는 거예요. 그게 자기 비움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사셔야 하는 여러분의 정체성은 단 하나, 난 하나님 나라 백성이야. 이것밖에 없어요. 난 하나님 나라의 왕자야, 난 하나님 나라의 공주야. 그게 여러분의 정체입니다.
다른 것은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여러분이 갖고 있는 역할일 뿐인 거예요. 천국에는 빈부귀천이나 높고 낮음, 예쁘고 추함의 구별이 없어요. 강하고 약하고 병들고 건강하고의 구별도 없습니다. 물론 천국에도 여러 종류의 직업이 있을 것이고 각기 다른 모양의 부활의 육체를 입고 살게 될 거예요. 왜? 구별을 해야 되니까. 전부 욘사마 같이 안 된다니까요. 전부 무슨 뭐 쏘피 마르소처럼 그렇게 안 돼요. 각기 다른 모양을 갖고 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 세상에서처럼 인간들이 합의하고 결정한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분이 없고 천하고 귀한 것의 구분이 사라질 겁니다, 여러분. 중세 시대 때는 적어도 여자가 200 파운드 이상은 돼야 미인이었어요. 아세요? 중세시대 미인도 보세요. 고려시대 때 미인도 보셨어요? 그때에는 여자가 눈 크면 안 돼요. 실눈이어야 돼요. 보세요. 미인의 변천사가 이렇게 뒤죽박죽이에요. 그렇다면 이건 누가 결정해놓은 거냔 말에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들이 결정해놓은 거예요.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그걸 비워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세상의 유행이라는 것에서도 벗어나야 돼요. 래깅스가 유행한다고 그래서 전부 딱 붙는 바지 입고 안 다녀도 돼요. 성도는 자기가 처한 직업, 상황, 처지 등에 묶이지 않고 그러한 천국의 평등을 훈련하고 가는 거예요.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의 그 어떤 가치나 힘도 우리 자신의 가치 평가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고 증명해내는 거예요. 여러분이요. 그러한 자기 비움의 과정 속에 고난이 개입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자신의 그릇을 완전히 비워내게 되면 그 안에 비로소 하나님의 풍성함이 원 없이 채워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가지고 예쁘고 멋진 사람은 훨씬 힘들어요. 이 땅에서 성도로 살기가. 비워낼 게
너무 많기 때문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풍성하게 부음 받아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인 거예요. 그러한 하나님 나라 삶의 전형적인 모델이 이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적이 있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본체이셨으나 자신을 비워서 죽기 까지 순종을 하시므로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밝히 보여주고 가셨어요. 빌립보서 2장. 요셉의 삶은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의 작은 모형이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요셉의 삶은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지어져가는 모습을 한 면으로 담고 있는 반면에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내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내는 자, 즉 천국백성의 삶의 표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또 한 면에 담고 있는 거예요. 이중적인 상징이 들어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어떤 무죄한 자가 자기를 해하려는 자들의 죄를 오히려 뒤집어쓰고 수난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가 사해지는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 예수님이 오시기 2천 년 전에 미리 이렇게 작은 그림으로 요셉의 삶 속에서 계시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셉의 삶은 자신의 꿈을 이루어낸 삶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비전이 깡그리 비워지고 2천 년 후에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일,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생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꿈을 보면서 야, 꿈을 갖고 전진하고 돌진하면 언젠가 그 꿈은 이루어져!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바보들인 거예요. 그건 너무나 가난한 해석인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오히려 자신의 뜻과 비전이 깡그리 비워지고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 그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이었던 거예요. 우리의 삶이 그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요셉의 삶은 우리 성도들의 현실 이해에 아주 큰 도움을 주는 내용인 거예요.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제가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9장 서두에 보면 아주 재밌는 구절이 나오는데요, 2절 보세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여기서 함께하시므로, 에트 라는 전치사는 동행이라는 단어에요. 이 동행이라는 단어,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래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 나오는 요셉의 삶은 전부 고생에 관한 거예요. 고난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 ‘동행’ 하는 삶이 이렇게 고난, 고통의 연속일까요? 그 단어가 똑같이 쓰인 곳이 창세기 5장에 에녹과 하나님의 동행이에요. 한번 가볼까요?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기서 동행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에트에요. 똑같은 단어입니다. 에녹만 하나님과 동행을 했나요? 노아는 어때요? 노아 한 번 볼까요?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똑같은 단업니다. 에트. 이렇게 아담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바울 등등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하나님과 동행을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무조건 에녹처럼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그냥 올라간다는 것이 아니라 그거는 하나님에 의해서 새 몸을 입고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자들은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된다, 사망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게 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에녹의 삶이고.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자들은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전부 자신들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었어요. 그냥 나는 편하게 살고 싶은데 하나님이 산꼭대기에다 배 만들어! 그러면 배를 만들어야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게 하나님과의 동행인 거예요.
우리는 섣불리 추측하기를 하나님이 함께 동행 하시는 삶 속에는 배신도 모함도 감옥행도 미움 받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닙니다. 요셉의 삶을 보세요. 어디 하나 요셉 뜻대로 된 게 있나요? 그러니까 나중에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저는 억울하게 잡혀온 사람입니다, 하고 자기의 억울함을 토로해요. 얼마나 억울했으면 저는 억울해요, 전 꼭 나가야 돼요, 라고 이야기한단 말입니다. 요셉이 무조건 꾹 참고만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난 억울해요. 라고 그 억울함을 토로한 적도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요셉의 억울함을 곧바로 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시간표 안에서 그가 겪어야 할 것은 다 겪게 놔두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시간표에 자신을 맞추는 자가 되어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눅 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뜻이 분명히 있어요. 그러나 내 뜻을 주장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고 있어요.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 백성들의 삶인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꿈과 원과 희망과 기대를 오히려 빼앗기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복인 것입니다. 반면에 그러한 것들을 기필코 이루어내고야 말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곳이 지옥인 거예요. 왜 여러분의 기도가 그렇게 자주 안 들어지는지 아시겠죠? 그게 오히려 정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찾아서 읽었던 시편 105편 17절 이하를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시 105:17-19
17.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여호와께서 한 사람을 앞서 보내시어 종으로 팔리게 하시고 그 발이 착고에 상하게 하셨으며 그의 영혼이 쇠꼬챙이에 뚫린 것과 같은 고난을 당하게 하셨어요. 그런데 그 앞서간 사람의 수난과 고통으로 그를 팔아버린 자들이 사망에서 건져져요. 굶주림에서 건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요셉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건 ‘앞서 보내셨다’ 라는 거예요. 그 앞서 보내셨다, 라는 어구가 담고 있는 내용을 잘 이해하셔야 돼요. 누군가가 앞서 보내졌다는 것은 그 뒤로 그 길을 따라가야 할 자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앞서 보내짐이라는 어구가 담고 있는 전제에요. 그런데 그러한 요셉의 삶, 예수의 삶이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이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뒤를 따라가야 하는 모든 성도들의 삶 또한 요셉의 삶과 예수님의 삶을 닮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앞서간 요셉, 앞서간 예수를 좇아가는 성도의 삶인 거예요. 그래서 내 죄가 아닌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죄의 무서움과 집요함과 추악함을 깨닫게 되는 일이 우리 삶 속에 생기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부족을 멸해도 시원치 않을 나의 원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기도 해요. 나의 고난으로, 나의 고난으로. 원수를 갚아도 시원치 않은데 내가 그 대신 고난을 받게 되고 그리고 내 고난으로 그가 구원까지 받게 돼요.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가 그렇게 살았고 요셉이 그렇게 살았단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 뒤를 따라가게 된다고 이렇게 얄밉게 얘기를 하고 있단 말에요.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의 그러한 수난의 삶을 통해서 세상의 죄가 폭로되기도 하죠. 이렇게 성도의 삶은 세상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삶이에요.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아요. 도대체 우리의 뜻과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자기부인, 자기 비움이라는 이미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자동적으로 움직여가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꿈 이야기로 잠깐 시선을 돌려보죠?
요셉이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혔는데 거기에서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나요. 요나단의 탈굼이라는 책에 보면 ‘탈굼’ 이라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해놓은 거예요. 탈굼에 보면 그들이 왕을 독살하려했다는 혐의로 갇히게 된 거라는 설명이 붙어 있어요. 어찌됐든 그들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몽해줘요. 그런데 그 해몽이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사흘 만에 복직을 하게 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목이 달려 죽어요. 신통하게 꿈에서 계시된 내용이 그대로 현실에서 이루어져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음 시간에 공부하게 될 바로의 꿈 또한 현실에서 그대로 성취가 됩니다. 7년 풍년, 7년 흉년.
이런 내용들을 오해해서 오늘날도 자신이 꾸는 꿈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터무니없는 오해에요. 말 그대로 오해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꿈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말씀과 뜻을 계시하셨어요. 왜냐하면 그 때는 아직 성경이 완성이 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반계시 말고, 특별계시가 그렇게밖에 내려올 수 없었어요. 하나님은 심지어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 끌고 올라가시기까지 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 특별계시의 방법이 그 땐 없었잖아요. 그 때에는 선지자들에게 직접 계시가 내려오던지 아니면 꿈이나 환상으로 나타나곤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실 말씀과 뜻이 성경에 완벽하게 모두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까지도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꿈과 환상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계시할 필요가 없어진 시대가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꿈을 꾸어서 계시를 받는다는 사람들은 교회에게 필요한 모든 계시가 성경에 다 기록이 돼 있다고 하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인 거죠. 기독교회는 이미 오래 전에 그러한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을 했어요.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모든 종류의 기독교 교파가 합의해놓은 이단의 종류가 딱 세 가지에요. 그 중에 첫 번째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이고 두 번째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 세 번째가 모든 계시는 성경에서 끝났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이에요. 그들은 누가 뭐래도 이단이에요. 그건 감리교에서도 이단이고 침례교에서도 이단이고 장로교에서도 이단이에요. 따라서 여러분이 자신의 꿈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상상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꿈은 그냥 과거의 사건들과 내가 속으로 원하는 것들이 함께 섞여진 비빔밥 정도로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프로이드도 꿈은 과거의 집합체다, 라고 정의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이렇게 어떤 이들의 꿈들이 현실에서 성취가 되는 장면들을 기록해놓은 것은 이 역사의 주도권은 하나님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술 맡은 관원장이나 떡 맡은 관원장, 그리고 바로가 꿈을 꿔서 그 일들이 성취가 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하는 일이,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들이 그들의 꿈속에서 잠시 나타난 거예요. 내가 이렇게 만들 거야, 그렇게 잠시 나타난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목적하고 계신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있다, 라는 것을 우리는 그런 꿈의 현실화를 통해서 할 수 있는 거예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현재에 꿈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미래에 성취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정해진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걸 교회에게 보여주는 것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꿈들과 그 꿈들의 성취는 하나님의 뜻, 다른 말로 하나님의 꿈이 인간의 꿈속에 계시의 형식으로 잠시 보여진 것뿐이지 인간들이 꿈을 갖고 비전을 갖게 되면 그 꿈을 이루어주시는 것이 아니란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꿈을 꾸고 꿈 해몽하는 사람, 이런 사람 쫓아다니지 마시란 말에요. 심지어 우리 교회 교인들 중에도 자기가 이런 꿈을 꿨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고 저한테 전화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감히!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꿈의 내용을 일반화 시켜서, 그걸 공식화 시켜서 용꿈은 좋은 거, 개꿈은 나쁜 거. 이건 동양철학자들이 통계학으로 적어놓은 것일 뿐이에요. 여러분 용꿈 꾸고 그날 재수가 좋던가요?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어요. 개꿈 꾸고 그날 꼭 재수가 나빠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어요. 저희 집에 개가 세 마리나 있어서 개꿈을 자주 꿔요, 저는요. 꿈에 자주 나타나요. 강아지들이. 왜냐하면 저는 사람들하고 잘 안 놀고 강아지들이랑 놀거든요. 강아지는 배신을 안 하잖아요. 꿈에 강아지들과 막 즐겁게 보내는 그런 장면들이 자주 나와요. 그렇다고 해서 아이고 오늘 재수 더럽게 없겠다. 이러지 않아요, 저는요.
여러분, 꿈을 꾸고 이게 무슨 뜻인가 궁금해 한다는 건, 정말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계시하실까? 가 아니라 나에게 혹시 재수 없는 일이 생기는 거 아닌가? 내 미래에 혹시 내가 알지도 못하는 굉장히 좋은 선물이 주어지는데 내가 혹시 분별이 없어서 그걸 놓치지나 않을까? 이런 막연한 기대 때문에 그 꿈을 궁금해 하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미래는 성경에 정확하게 기록이 돼 있어요.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 영생. 천국과 영생으로 여러분의 미래는 명확하게 기록돼 있어요.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에 여러분의 삶 속에 고난이 온다는 것은 성경에서 미리 이야기해주고 있는 거고 여러분은 나는 그 자리에 반드시 가야하므로 그 고난을 감수하겠다고 감수하고 있는 분 아닙니까? 근데 그 꿈이 왜 궁금해요? 뭐가 궁금합니까? 그게. 그런 거에 관심두지 마세요, 여러분.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잊어버리세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이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꿈의 성취의 현장인 것이지 인간의 꿈이 성취되어져가는 장이 아닌 거예요.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꿈과 목표 앞에서 겸허하게 자기의 욕심과 꿈을 버리는 자리로 내려가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와 기대와 욕심으로 자신의 자아를 세워가면서 살아요. 반드시 그래야 돼요. 왜? 하나님이 빠져나간 자리가 너무 크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워야 돼요. 본문을 보시면 요셉의 대척점에 보디발과 보디발의 아내가 서 있죠? 창세기 39장 2절 이하를 보시면 보디발이 요셉의 형통함을 보고 집안의 모든 일을 요셉에게 맡겼다, 라는 장면이 나와요. 그것은 보디발이 요셉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보디발에게 필요한 것이 요셉에게 있었기 때문에 보디발이 요셉에게 집안의 전권을 맡긴 거예요. 그건 다른 말로 요셉이 보디발 집안의 전권을 맡은 게 아니라 사실은 보디발이 요셉 전부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걸 라캉의 이론이라고 하는데 요즘 수면마취제인 프로포플 중독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어요.
수면 내시경이나 성형 수술할 때 흔히 쓰는 마취제인데요. 그것이 환각작용을 일으키기도 하고 중독성이 있어서 거기에 중독이 된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을 돌면서 수면 내시경 검사를 받는다고 그래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도. 주사를 맡기 위해서. 근데 일부 나쁜 병원에서 연예인들에게 피로회복제로 그것을 공짜로 놔줬다고 그래요. 계속해서. 계속해서 공짜로 주다가 나중에 중독이 되면 그 연예인들을 병원 홍보용으로 씁니다. 그 주사를 맞기 위해 자주 와야 되니까 그것을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이런 스타들도 우리 병원에 이렇게 자주 옵니다. 라고 그렇게 홍보를 한다는 거죠. 연예인 입장에서는 공짜로 프로포플 주사를 맞아 좋겠지만 그래서 병원장이 나를 참 사랑하나보다, 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는 그 병원장의 소유물이 되어 가고 있는 거예요. 내가 필요한 것을 갖고 있는 내가 필요한 자를 내 소유로 만들기 위해 그 상대방에게 약간의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집안 전체 일을 맡긴 것은 그러한 의도였던 거예요. 그걸 라캉의 이론이라고 하는데 모든 인간이 자아형성을 할 때 나에게는 없는 어떤 것을 가진 타인, 즉 나 이외에 다른 인격체가 가진 것으로 내 부족한 것을 채우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어요. 그걸 대체 욕망이라고 해요.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최진실이라는 배우가 자살을 했을 때 한국의 많은 주부들이 한동안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요. 왜 자기와는 일면식도 없는 여배우가 자살을 했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을까요? 우리 교인 중에도 최진실 죽은 날 아,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요.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신 분 계세요. 왜 그랬을까요? 자기 엄마가 돌아가셔도 그렇게 슬프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최진실이 죽었는데 많은 이들이 공황상태에 빠져요. 왜냐하면 20년 이상을 TV 드라마나 광고들을 통해 보아왔던 그녀가 알게 모르게 자신의 자아형성에 개입을 해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 그리고 자기가 도달하지 못하는 거, 또 도덕이나 윤리 양심 사회법에 의해서 감히 저질러버리지 못하는 것 등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을 통해서 대리만족하며 살아가게 돼요. 그리고는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자기 안에 사유화 해버려요. 왜냐하면 인간의 가슴 속에는 너무나 큰 공허의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람보라는 영웅을 보면서 그 람보의 힘을 자신의 자아 속에 깊숙이 담아놔요. 구준표라는 꽃미남의 무례함과 당당함과 부유함을 보면서 도달할 수 없는 그의 삶을 동경합니다. 그리고 그 동경이 자기 자아 한켠에 자리를 잡아요. 여배우들의 미모와 화려한 삶을 보면서 아줌마들의 자아 속에 그 배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아요.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자아라는 것이 형성이 됩니다. 미국의 영웅주의는 거기에서 나오는 거예요. 무비 스타 스포츠 스타 정치적인 스타 온통 스타들을 만들어놓고 자기의 욕망을 거기에 투사하여 대리만족을 얻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영웅들에게 그렇게 돈을 많이 주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걸 대리로 시켜주는 거예요. 누군가 하나에게. 나는 안 되니까. 아니 날아오는 공을 잘 쳐낸다고 그게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아야 될 일입니까? 공 좀 잘 던진다고 일 년에 천만 불 이상씩 돈을 받아야 돼요? 계산해보니까 하루에 삼만 불 이상씩 받더라고, 그 사람들은. 그게 말이 되냐고요? 근데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영웅을 만들어놓고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 라는 것을 대신 투사하는 거예요.
사람은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긴 하는데 자기 안에 없는 것을 자기 마음속에 품고 그것을 사유화하고 싶어 해요. 그게 바로 죄를 지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들의 결핍이 가져온 열매에요. 결핍에 의해서 나에게 부족한 것들을 다른 대체 욕망으로 채워서 나의 자아 화 시켜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오랫동안 내 대체 욕망의 대상을 내 것으로 만들어놨는데 그 ‘내 것이’ 어느 날 목매달아 죽었어요. 그 상실감을 못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배우가 죽었는데 내가 슬픈 거예요. 그녀는 아줌마들의 자아형성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인물이기 때문에 옆집 순이 엄마가 죽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반응을 끌어낼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한 것 중에 가장 큰 대체 욕망적 자아의 확장이 자식입니다. 부모라는 자아가 형성이 되는 데 있어서 50%이상을 차지하는 게 자식이에요. 왜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그렇게 화가 나는지 아세요? 내 팔다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뇌성마비라고 그래요. 나는 밥숟가락을 내 입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나의 뇌에서 시키는 명령을 손이 듣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때 얼마나 화가 나요? 마찬가집니다. 나의 대체 욕망적 자아의 한 부분인 내 자식이 내 말을 안 들을 때 마치 내 팔다리가 내 말을 안 들을 때와 똑같은 분노와 실망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옆집 철이가 말 안 듣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반응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 생명력을 잃어버린 인간은 그렇게 무엇으로는 자신의 속을 채워야 돼요. 그게 죄인들의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위장을 하기도 해요. 그러나 사실 그것은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집착일 뿐이에요. 진짜 사랑은, 성경에서 말하는 진짜 사랑은 상대방의 자원으로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내가 좋은 것을 소유한 자에 대한 호감을 나타내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진짜 사랑은 무조건적이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아니, 이 땅에서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나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짝사랑? 아뇨. 짝사랑도 그리움과 애틋함과 가능성이라는 욕망을 채워주는 것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짝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에게 전혀 무익하고 무관한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거기에서 건져내셔서 원수를 사랑하는 자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그 많은 무장해제와 그 많은 고난들이 우리의 삶에 폭포수처럼 밀어닥치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 되라고. 보세요, 그렇게 요셉을 자기 사유화하려했던 보디발에게 요셉이 충성을 다해요. 그게 성도의 삶이라는 거예요. 성도는 자기의 피를 뽑아 배를 채우려하는 상대방에게 기꺼이 목을 대주는 십자가의 자리로 끌려가게 되기 때문에 그래요. 왜 나만 그렇게 살아야 되냐고? 안간힘을 쓰고 버텨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고집이 우리를 그리로 끌고 가고야 마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삶에 이해가 안 되는, 불공평해 보이는 억지스러운 일들이 속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이 세상이 지금 이렇게나마 유지가 되고 있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잖아요. 싹 쓸어버려도 되잖아요? 근데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유지가 되고 있죠? 이 땅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축복의 내용 중에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해 복을 받는다, 라는 말씀이 있죠? 그건 전도를 통한 복의 계통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의 계획이 뭐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이 세상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관한 이야기이기도한 거예요.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 역사와 인생을 통과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성이 되어져야 되는데 그들이 죽어버리면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려놓는 것입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는 인간들에게 생명나무를 못 먹게 했는지 아세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의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먹으면 그게 사망이거든요. 하나님이 못 먹게 하는 거예요. 왜? 살려 둬야 돼요. 살려놓고 당신의 계획이 완성될 때까지 그들을 하나님의 성도 옆에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 때 부어지는 게 일반은총인 거예요. 햇빛, 공기, 물 이런 거. 여러분 그런 거 돈 내고 사십니까? 아니란 말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런 일반은총의 혜택을 받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부자가 되고 건강하기도 하고 예쁘기도 한 거예요. 그건 전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부어지는 복의 파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감사해야 돼요. 자기들이 이나마 사는 게 하나님의 백성들 덕분인 것입니다. 요셉의 삶이 바로 그거인 거예요. 그러나 세상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지 못해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발견하지 못해요. 이사야서에 나옵니다.
사 26:10
악인은 은총을 입을찌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은혜, 은총이 내려져도 의를 배우지를 못해요.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자기들이 왜 이렇게 이나마 살고 있는지를 절대 모릅니다. 그게 바로 보디발의 모습 속에 확연히 드러나 있어요. 보디발은 요셉 때문에 복을 받아요. 성경이 분명히 나오죠? 하나님의 언약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 요셉 때문에 세상 사람을 상징하는 보디발이 복을 받고 있단 말입니다. 신약시대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거 아니에요,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이 일하는 그 직장은 절대 망하면 안 되죠? 근데 자주 망하잖아요. ㅎㅎ. 그런 이야기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 요셉을 실컷 이용만 하다가 나중에 감옥에 쳐 넣는 다는 거예요. 그 후로 성경에서 보디발이라는 이름은 사라져요. 하나님의 백성의 백성 됨에 쓰여지고 소각되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 사람들의 운명이에요. 비참하죠.
그런데 보디발 말고 또 다른 여자가 나타나서 요셉의 주인 역할을 하고 싶어 해요. 그 여자는 다름 아닌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했다 그래요. 히브리어로 보면 아페 투아르 아페에요. 그게 반복되고 있는데 그 단어들은 전부 아름답고 현명하다, 아름답고 현명하다, 아름답고 현명하다, 에요. 얼마나 이뻤으면. 얼마나 잘 생기고 현명했으면 그 단어를 세 개를 반복해서 쓰고 있어요. 요셉은 아름답고 현명했다는 거예요. 당연히 그는 다른 사람의 대체 욕망의 대상이 되겠죠. 아름답고 현명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한 이들에게 대체 욕망의 대상이 된단 말입니다. 누가? 요셉이. 보디발에게는 충성과 싹싹함과 명철함이라는 대체 욕망을 제공함으로 해서 보디발의 종이 되었어요. 보디발의 아내에게는 아름다움과 현명함과 젊음이라는 대체 욕망의 대상이 됐어요. 그런데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요청을 거절을 해요. 이건 단순히 요셉이 하나님을 믿는 자로써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그 유혹을 뿌리쳤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보디발의 아내도 상당한 미모를 소유하고 있었을 거예요. 애굽 최고 권력자 중의 한 사람의 아내니까. 그런 사람이 아무나하고 결혼했겠습니까?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똑똑했을 거예요. 그리고 권력까지 가지고 있어요. 시위대장의 아내입니다. 뭐든 할 수 있어요. 권력과 미모를 가진 여자가 자기를 매일 유혹했어요. 날마다 유혹했다 그러죠? 나쁜 맘 한번 먹고 그 여자의 말을 들어주면 팔자가 바뀔지도 몰라요. 성경은 일부러 거기에다가 아무도 없었다, 는 말을 삽입해 놉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저질러도 아무도 몰라요. 충분히 요셉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그런 대체 욕망의 대상이에요. 그건 죄인들의 본능이거든요. 근데 요셉이 그걸 거절한 거예요.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것이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 어떤 일이 먼저 있었죠? 밧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다윗이 보았어요. 아름다운 밧세바의 목욕장면을 본 다윗의 마음에 다른 것을 소유해서라고 나의 행복과 쾌락을 만족스럽게 채워내겠다, 라는 그런 죄인의 죄 성이 꿈틀거린 것입니다. 그건 죄인의 본성이에요. 이 다윗, 음탕한 놈. 나는 너와는 달라! 이거 우리에게 배우라고 거기에 그런 사건이 기록된 거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모양으로 다윗과 똑같은 대체 욕망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인 거예요, 우리는요. 여러분, 여러분 옆집에서 장동건이나 조인성이나 구준표 같은 꽃미남들이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을 얼핏 지나가다가 봤다고 생각해보세요. 좋아 죽네요, 아주 그냥~. 그걸 음탕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맨날 배 불룩 나오고 그냥 아무데서나 방구도 막 붕붕 뀌고 하는 남편만 보다가 그런 조각 같은 꽃미남이 내 앞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여러분 마음이 어떡겠냐고요? 다윗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게 우리란 말입니다. 거기에 장동건이나 구준표가 아니라 저 최영이나 아니면 전원주 신봉선 그런 사람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래 봐요. 당장 경찰에 신고해야 돼요. 그건 공해죠? 폭력입니다, 그건. ㅎㅎㅎ. 그렇잖아요? 사람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그리고 내가 갖고 싶은 그것을 보았을 때 당연히 갖고 싶어 해요. 당연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해요. 그게 내 자아 형성에 기여를 한다니까요. 그래서 보디발도 그렇고 보디발의 아내고 그렇고 요셉을 자기 소유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그 대척점에서 그걸 거부하더라는 거예요. 그 여자의 유혹을 거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거는 단순히 요셉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로 살려고 했다, 라는 그걸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요셉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의 모델로 등장하잖아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로 그 안이 채워져 있는 자이기 때문에 그 대체 욕망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요셉이 영원히 그런 상태가 된 거 아닙니다, 여러분. 나중에 요셉은 엉터리의 삶을 많이 살아요. 그러나 그러한 그림을 통하여 성도들아, 너희들이 어느 지점으로 가는 건 줄 아니? 바로 요 지점으로 가는 거야,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 그림 속에서. 그렇게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자로 지어져 가기 위해 여러분의 삶 속에 무장해제의 사건들이 개입이 되는 거예요. 고난과 환란이 개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 성도의 목적지인 거예요.
그렇게 요셉에게 거절을 당하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하죠.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안에 채우려했던 대체 욕망의 자리를 무엇으로든 다시 채워야 돼요. 그 비어 있는 걸 그대로 놔둘 수가 없어요. 공허하고 심심하고 괴로워서. 보디발의 아내는 그 요셉의 빈 자리를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우려고 해요. 요셉을 모함하죠. 저놈이 나쁜 놈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뜻대로 안 된 그 대상이 죽거나 아니면 자기 안 된 그 대상을 악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돼요. 저것이 내께 안 된 이유는 바로 저것이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것을 폭로시켜야 나의 의로움이 증명이 됩니다. 그게 마귀적 발상인 거예요. 우리 주변에서 근데 흔히 보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자주 나타나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교제를 하던 연인들이 헤어진 후에 서로 상대방에 대한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모함을 하고 하는 경우 자주 보시죠? 그건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자아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것에 대한 공허함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채워내려고 하는 아주 악한 발상인 거예요. 사람들은 결혼조차도 대체 욕망의 충족이라는 차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어요. 나의 빈 곳을 상대방의 자원으로 채워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람들은 결혼을 해요. 그래서 많은 부부들이 결혼 후에 행복하지 못합니다. 실망을 해요. 서로가 서로에게 대체 욕망의 대상이 되어 달라고 요구를 하니 그 생활이 행복할 리가 없는 거예요. 상대방이 내 것이 되어서 내 수족처럼 움직여줬으면 좋겠는데 그 상대방도 나에게 똑같이 그런 것을 요구하거든요. 그러니까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알고 자기부인, 자기 비움의 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가정에서 참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둘 중의 하나가 좀비처럼 피를 빨아서 자기 행복을 채우려하는 그러한 자의 희생물이 되어주기 전에는 그 집안에 진짜 행복이 찾아올 수가 없어요. 거기는 항상 충돌만 있을 뿐이에요.
바로 성숙한 성도가 그 역할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숙해지면 상대방이 바뀌어서 하나님이 내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지면 상대방이 더 깊이 이빨을 찔러 넣는 것입니다. 그걸 참는지 못 참는지 우리에게 시험하시는 거예요. 예수 잘 믿으면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죠? 예수 잘 믿으면 저 못된 남편의 성격이 좋아질 줄 알았죠? 예수 잘 믿으면 저 바가지 긁는 여자가 천사로 변할 줄 알았죠? 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계속 당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해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은 악해요. 결핍 속에 빠져있는 세상은 반드시 다른 대체 욕망으로 자아를 세워야 돼요. 그런데 하나님으로만 행복해하는 자들이 나타났어요. 그들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자들이고 하늘의 풍요로 자신들의 행복의 근거로 삼아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들을 빼앗겨주는 것입니다. 아니, 내가 빼앗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뺏기게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안 놓으니까.
명예를 빼앗겨주고 인기를 빼앗겨주고 재물을 빼앗겨줘요. 당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자신을 물어뜯는 자들을 같이 물어뜯음으로 해서 나의 의로움을 챙기지 못하게 해요. 그래서 모함하는 사람에게 변명도 못하게 해요. 네 의로움은 내가 네 의이기 때문에 네 스스로 안 챙겨도 된다는 것입니다. 억울하죠. 근데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요셉의 삶이었어요. 요셉은 변명하지 않고 감옥으로 향했습니다.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석방을 약속 받았는데 그 술 맡은 관원장이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술 맡은 관원장은 단순히 술이나 대접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느헤이먀가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죠? 근데 왕에게 이야기를 해서 유대인들을 전부 가나안으로 보내서 성벽을 재건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큰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숲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은 왕의 비서실장 정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나가서 한 순간만이라도 요셉을 생각했으면 요셉을 풀어줬을 겁니다. 약속했잖아요. 잊어버렸어요, 이 인간이.
그런데 그 후로 이년 동안 요셉이 그 사람에게 메시지 하나 전했다는 말이 없어요. 그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감옥의 제반 업무를 맡아본 사람이었어요. 요셉은요. 그 전옥에게 그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 편지나 하나 좀 전해주세요. 왜 못했겠습니까? 근데 이년 동안 가만히, 하나님이 내보내지 않으시는 거라면 그냥 감수하겠다라고 가만히 있는 거예요. 요셉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런 삶이라니까요.
여기서 잠깐 한 번 상상을 해보자고요. 요셉을 잊어버렸던 그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일깨워주고 그 요셉의 고통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떤 게 제일 특효일까요? 그가 잊어버리고 산 동안 요셉이 감옥에서 겪은 일을 똑같이 겪게 해주면 될 일이에요. 아, 내가 잊어버리는 바람에 내 은인이 여기서 이런 고생을 했구나. 그가 그걸 거기서 깨달을 거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그렇게 잊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의 수고를 우리가 매 순간 기억하고 있나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셉의 감옥살이 즉 무죄한 자의 십자가의 수난을 자주 경험케 해주시는 거예요. 왜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돼? 아니 왜 내가 이런 손해를 봐야 돼? 왜 내가 남의 일로 이렇게 수고를 하고 고통을 받아야 돼? 내 일도 바빠 죽겠는데? 이런 일들이 우리의 삶 속에 생긴다는 거예요. 왜요? 무죄한 예수님이 바로 너 때문에 그렇게 고통을 받고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는 것을 기억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의 십자가의 삶이 그 감옥의 삶이, 요셉의 감옥의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 여러분이 세상에서 그렇게 바보 같이 당하는지 아시겠어요? 왜 하나님이 그걸 안 말려주는지 아시겠습니까? 예수 닮아가라고.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기억해서 알으라고. 요셉의 삶에 하나님이 동행하시므로 요셉이 예수의 삶을 살았어요.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의 십자가의 삶이 나타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억울해 하지 마세요. 잘 가는 거예요. 난 맨날 이렇게 바보 같이 사기만 당해. 여러분은 세상에게 사기 당하셔야 맞아요. 세상을 사기 처먹으시면 안 돼요.ㅎㅎㅎ.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여 심지어 대체 욕망이라는 것까지 동원해서 우리 자신을 채워야만 겨우 겨우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만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잘 안 되죠? 그래서 그러한 자로 만들기 위해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세상의 힘을 자꾸 뺏아 가시는 거예요. 건강까지도 뺏아 보시는 거예요.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을 때에는 우리의 꿈과 비전과 야망 때문에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인간의 꿈은 요셉을 통해 내려오는 어떠한 법칙에 의해 통제되고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본 우리는 알아요. 바로나 술 맡은 관원장, 떡 맡은 관원장 심지어 요셉의 꿈까지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 안에서 실행이 됐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들이 꿈을 꿨는데 요셉이 해몽하는 대로 돼요. 요셉이 하나님의 꿈을 갖고 그들의 꿈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내린 하나님의 꿈에 의해 인간들의 꿈이 제어되는 거예요. 통제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꿈이 내려왔어요. 어떻게 내려왔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의 현상들을 어떻게 해몽을 하실 거예요? 하나님의 꿈이 오늘날에는 성경으로 말씀으로 내려와 있단 말입니다. 내 뜻이 이거야, 내 비전은 이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주셨어요. 그걸 가지고 현상을 해석하셔야 되는 거예요. 현실을 해석하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이 끌려가지 않고 그 한나님의 꿈,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여러분이 오히려 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자의 삶인 거예요. 하나님의 꿈을 아세요! 그래야 여러분의 꿈을 놓을 수 있는 거예요. 그 꿈에 이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꿈을 쫓는 한 여러분은 고단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꿈을 분별하세요. 어떻게 분별할 수 있어요? 말씀을 공부하세요. 이제는 이 시대에 꿈이나 환상 같은 것으로 계시가 내려오지 않습니다. 성경으로만 하나님의 꿈이 우리에게 주어져요. 연구하시고 더욱더 진지하게 하나님 말씀 앞에 서십쇼. 그 꿈에 의해, 하나님의 꿈에 의해 이끌려 가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세상에게 보여주세요. 어줍지 않게 다른 대체 욕망으로 내 자아를 채우려고 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건 다 비워내셔야 돼요. 남들을 욕해서 나의 의로움 채우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마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 채워지신 분이에요.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되는 분입니다. 꿈과 비전 야망,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천만의 말씀. 꿈을 비우는 자들이 오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러분의 삶이 이렇게 고단한지 아시겠죠? 그렇지만 감수할 수 있겠죠? 하나님이 그렇게 가라니까. 그리고 그게 복이라고 하니까. 기도하겠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