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니모
유태용
미국 서부 영화를 보면 기병대와 인디언들이 서로 총을 쏘면서 죽고 죽이는 장면을 보게 된다. 본래 북미대륙에 살던 인디언들은 서부보다는 자연환경 면에서 더 살기가 좋은 동부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을 앞세운 유럽인들의 이민 물결이 동부지역으로 몰려 들어오자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땅을 내주고 아직은 백인들이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서부지역으로 옮아갔다.
‘제로니모’는 미국 작가 포리스터 카터(1925~1979)가 인디언 ‘아파치’의 구전 역사에 근거해서 쓴 소설 제목이다. 작가 자신이 체로키 인디언의 혈통을 일부 받아서인지 그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제로니모’라는 한 특출한 역사적 인물을 통해 인디언들의 삶과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모두가 인디언의 생활과 투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면에서 그는 영원한 인디언 대변자였다.
아파치족들은 산밑 계곡 밭에다 옥수수와 콩, 애호박, 둥근 호박 따위를 심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심은 곡식을 수확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습격한 적들과 싸우다 산속으로 도망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그렇게 달아났다. 남자와 여자들은 산봉우리 높은 곳에 자리 잡고서 적들의 동태를 항상 주시했다. 그 당시 그들의 적은 멕시코인이었다. 멕시코인은 죽음을 의미했다.
‘제로니모’의 여섯 살 때 이름은 「고크라예」 (‘하품하는 남자’)인데 일곱 살 때쯤에는 아파치 아이들 놀이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는 저녁이 되면 어린 「고크라예」를 옆에 앉혀 놓고 이렇게 말했다. “항상 적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저들과 싸우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땅 밑에서 금속을 파내는 중노동을 시킬 거다. 우리가 저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영성 없는 짐승으로 만들어 버릴 거다. 속세의 육신이 먹을 음식과 속세의 육신이 누울 자리와 세속의 먹을 약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짐승으로. 그렇게 되면 영혼에 필요한 양식은 잊힐 테고, 결국 영혼은 죽고 말 거다. 영혼은 자유가 있어야 살 수가 있으니, 그러니까 싸워야 살 수가 있다.”
또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마코는 네 할아버지다. 그는 위대한 전사로 네드니 아파치의 추장이었다. 나는 베돈코헤 아파치인 네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추장이 될 권리를 포기하고 네 엄마를 따라 이곳으로 왔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베돈코헤 아파치이고 추장 가족이 아니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하기 위해 여자 부족을 따라야 한다. 남자는 어머니 땅에 뿌려진 씨앗과 같다. 하지만 남자들은 전쟁으로 쉽게 죽는다. 남는 쪽은 여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파치에게 생명을 준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아파치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으니까.”
아버지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보아라. 우리는 이렇게 각각 떨어진 손가락과 같다. 베돈코헤, 네드니, 치헨, 치아헨 등. 우리는 또 치리카후아 아파치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톤토, 지카리라, 메스칼레로, 밈브레스 등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아파치들이다. 우리는 이렇게 작은 무리를 지어서 살아야 한다. 한 무리가 적에게 몰살당하더라도 다른 무리들은 살아 남을 수 있게.” 아버지는 손가락을 오무려 주먹을 만든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 함께 모인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고크라예」는 자신이 누군지, 자신이 어떤 집안에 속하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은 전쟁의 일부일 수밖에 없었다.
「고크라예」의 말 타는 솜씨는 무척 빼어났다. 빠른 당나귀를 타고 쫓으면 산토끼까지도 곤봉을 날려 잡을 수 있었다. 열두 살이 되기도 전에 고크라예는 사슴을 추격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는 조그만 덤불을 앞으로 밀면서 계속 기어가다가 한참 동안 가만히 엎드려 있으면서 사슴이 눈치채지 않았는지 살피곤 했다. 그런 식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기다리다가 다시 기어가기를 반복하면서 초원지대를 가로지르는 거리가 몇 킬로미터에 달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슴이나 적을 죽이려면 고통스러운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십 대가 되고 나서는 곰을 추적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는 산속 높은 곳에 놓인 바위의 한 지점을 돌아 나오다가 생전 처음으로 커다란 회색곰과 맞닥뜨렸다. 곰이 그를 덮칠 듯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하지만 뱀을 공격하는 독수리만이 포착할 수 있는, 그 순간적인 망설임의 찰나에 고크라예는 높이 치켜든 곰의 두 팔 사이로 번개처럼 달려들어 곰의 심장 깊숙이 창을 박아 넣었다. 그리곤 간발의 차이로 곰이 휘두른 날카로운 발톱에서 벗어난 그는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곰을 달고서 그 회색곰이 쓰러질 때까지 죽으라고 달렸다. 곰이나 적이 망설이는 그 순간적인 찰나를 포착해 번개처럼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는 본능을 자신은 타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여섯 살이 되자 고크라예는 170㎝의 키에 팔과 어깨가 근육질인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하루에 110㎞를 달릴 수 있었으며, 입안에 물을 머금은 채 삼키지 않고 반나절을 계속 달릴 수 있었다. 고크라예에게는 물질 욕구와 필요를 조절하고 극복하는 아파치 특유의 강한 영적인 의지가 있었다. 갈증으로 입술이 갈라지고 혓바닥이 퉁퉁 부어도 물을 마시는 게 위험할 때는 마시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물웅덩이를 지나칠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하는 게 매복 공격에 위험하다면 나무나 덤불의 그늘을 그리워하지 않고 사막의 타들어 가는 열기 속에 누워 있을 수 있었다. 아픈 다리를 가지고는 멀리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계속 달릴 수 있었다. 이것이 아파치 특유의 ‘초인적인’ 의지력인데 고크라예에게는 이런 의지력이 특히 강했다.
미국 정부의 인디언 말살 정책은 해가 갈수록 혹독했다. 인디언 관리국 국장 E.A.그레이브스는 간결하게 이 정책을 설명했다. “이 종족이 빠른 속도로 사라져갈 운명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모든 기독교 문명 정부가 그렇듯이 우리 정부가 해야 할 일도 이들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말끔하게 지워버리는 것이다.” 이런 미국 정부의 인디언 말살 정책을 전혀 모르고 있던 메스칼레로족 추장 조세시토는 미국 정부에 청원했다. 이에 대해 미 육군은 메스칼레로 아파치 부족을 포위하여 화이트 마운틴 밖으로 내몰아 보스크 레톤도 보호구역에 가두는 것으로 응답했다.이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심지어 오두막을 지을 덤불조차 없는 황폐한 황무지였다. 메스칼레로 부족은 섭씨 30도를 웃도는 열기 속에서 들개처럼 땅 속에 굴을 파서 살았다. 어떤 곡식도 자랄 수 없었다. 인디언 관리국에서 지급하는 식량배급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사막 파리와 모기떼들이 메스칼레로 부족의 머리 위에 자리 잡았다.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조세시토가 이같은 대우에 항의하자 그들은 그를 살해했다. 뉴멕시코 전역을 지휘하는 칼레톤 장군은 휘하 지휘관들에게 내린 명령을 통해 미 육군의 의도를 명확히 했다. “인디언 남자는 보는 대로 죽여라. 만일 그들이 평화협정을 요구하면, 우리는 평화를 체결할 권한이 없다고, 우리는 그들의 반역죄와 범죄행위를 징벌하러 왔노라고 말하라.”
자연과 더불어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신을 위치시켰던 인디언의 생활 방식을,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정복을 통해서만 발전해 갈 수 있었던 자본주의는 인디언의 순수한 영혼을 뿌리째 짓밟았다. 스페인과 300여 년에 걸쳐서 싸웠고, 미국의 인디언 말살 정책에 맞서 그야말로 멸종 직전 때까지 싸웠던 치열하고 장기적인 저항 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인디언 종족이 아파치족이다. 제로니모는 꺼져가는 아파치족의 마지막 저항 전쟁을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전쟁 주술사이다. 자신의 운명을 미리 내다볼 수 있고, 백인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전략과 전술로,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나무의 맥동을 느꼈다.
제로니모와 아파치 들은 그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한가지 교훈을 남겼다. “인간이 사는 데 있어 영혼의 자유보다 중요한 건 없다.” 1909년 2월 17일 제로니모는 실 요새에서 죽었다. 제로니모가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는 이랬다.
오하레
오하레
나는 변화를 기다린다!
그는 절대 항복하지 않았고 죽음조차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