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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孟軻敦素 史魚秉直(맹가돈소 사어병직) ② (백운)
【本文】 孟軻敦素 史魚秉直 맹가돈소 사어병직
孟子는 素養을 도탑게 하였고 史魚는 剛直하여 바름을 堅持했다.
【解說】
지난 번에서는 맹자(孟子)는 본성(本性)을 돈독히 했음을 밝힌 맹가돈소(孟軻敦素)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사어(史魚)라는 인물을 들어 그의 강직(剛直)한 성품을 찬탄하였는데 그는 어떤 인물인가 알아볼 차례입니다.
사어병직(史魚秉直) 사어(史魚)는 강직(剛直)하여 바름을 견지(堅持)했다.
우선 글자의 자원(字源)부터 알아보고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사(史)는 우(又) + 중(中)의 회의자(會意字)로, '우(又)'는 '손'을 뜻하고, '중(中)'은 신에 대한 축문을 적어 나뭇가지 따위에 붙들어 맨 것을 상형한 것입니다. 이는 제사에 종사하는 사람의 뜻에서, 천자(天子)의 언행을 기록하는 벼슬아치의 뜻이 됩니다. 또, '우(又)'는 '오른손'을 뜻하고, '중(中)'은 중정(中正), 곧 똑바름을 뜻하여, 기록을 맡은 사관(史官)은 중정공평(中正公平)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魚)는 상형자(象形字)로, 물고기를 본떠 '물고기'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병(秉)은 우(又) + 화(禾)의 회의자(會意字)로, 벼[禾]를 손[又]으로 잡는 모양에서, '잡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직(直)은 십(十) + 목(木) + 은(ㄴ)의 회의자(會意字)로, '은(ㄴ)'은 숨긴다는 뜻입니다. 열 눈이 보는 바, 아무리 숨겨도 드러나지 아니함이 없다는 뜻에서 '바르게 봄'을 뜻합니다. 또, 똑바로 쳐다보다의 뜻을 나타내며, 일반적으로 '곧다'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 똑바로 쳐다본다는 데서, '정면으로 맞서다'의 뜻도 있습니다.
사어병직(史魚秉直)에서 사어(史魚)는 인명(人名)이고, 병직(秉直)은 성품(性品)을 말하는데, 병(秉)은 병집야(秉執也)라 했으니 병(秉)은 '잡는다'는 뜻이고, 직(直)은 직정야(直正也)라 했으니 직(直)은 '바르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병직(秉直)은 '바름을 견지(堅持)한다'는 뜻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사어(史魚)는 강직(剛直)한 성품으로 바름을 견지(堅持)했다'는 뜻입니다.
사어(史魚)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위(衛)나라 대부(大夫)로 성은 사(史)이고, 이름은 추(鰌), 자(字)는 자어(子魚)입니다. 혹은 사(史)를 관명(官名)으로 새기기도 합니다. 그는 위영공(衛靈公)이 어진 거백옥(蘧伯玉)이라는 이를 중용(重用)하지 않고 불초(不肖)한 미자하(彌子瑕)를 임용하자 부당하다고 직간(直諫)한 사람입니다.
거백옥(蘧伯玉)은 위(衛)나라의 현대부(賢大夫)로 성은 거(蘧)이고, 이름은 원(瑗),자(字)는 백옥(伯玉)입니다. 공자(孔子)는 그를 칭찬하여 "군자로다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거두어[卷] 감춘다." 하였습니다.
《논어(論語)》『위령공편(衛靈公篇)』에 공자께서 사어(史魚)와 거백옥(蘧伯玉)에 대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곧도다, 사어는. 나라에 정도(正道)가 행하여저도 화살같이 곧았고,
정도가 행하여지지 않아도 화살같이 곧도다.
군자로다, 거백옥은. 나라에 정도가 행하여지면 나아가 벼슬하고
정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면 가히 거두어 숨었도다.
子曰 直哉라 史魚여. 邦有道에 如矢하며 邦無道에 如矢로다.
자왈 직재 사어 방유도 여시 방무도 여시
君子哉라 蘧伯玉이여. 邦有道則仕하고 邦無道則可卷而懷之로다
군자재 거백옥 방유도즉사 방무도즉가권이회지」
이와 같이 사어(史魚)와 거백옥(蘧伯玉)은 공자께서 어진 이라 칭송하고 계십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사어(史魚)에 대한 일화가 있어 소개해 봅니다.
위(衛)나라에는 거백옥(蘧伯玉)과 함께 사어(史魚)라는 어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맨 처음 거백옥은 아직 위(衛)나라 영공(靈公)에게 등용되지 않고 반대로 소인인 미자하(彌子瑕)가 높은 자리에 올랐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어가 그 부당함을 여러 번 영공(靈公)에게 간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사어가 병이 들어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되자 그는 아들을 불러 놓고 유언을 했습니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고 있으면서도 저 어진 거백옥(蘧伯玉)을 등용하지 못하고, 또 소인 미자하(彌子瑕)를 내쫓지도 못했다. 신하로서 살아 있는 동안 제 임금을 바르게 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신하로서의 도리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즉 이제 내가 죽더라도 장사를 예법에 맞추어 지낼 필요가 없느니라. 내가 죽거든 시신을 창문 아래에 놓아 두거라. 그것이 내 분수를 다하는 길이다."
사어의 아들은 그의 유언을 거역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영공이 사어를 조상(弔喪)하러 갔다가 이 모양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더니 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영공에게 자세히 고했습니다.
이에 영공은 깜짝 놀라 실색하며 말했습니다.
"이는 과인의 허물이도다.[是寡人之過也]
사어(史魚)가 살았을 때는 항상 어진이를 나오게 하고[史魚生時恒欲進鎣]
불초(不肖)한 자를 물러가게 하려다가[而退不肖]
그 죽음에 이르러서는 또 시체로서 간하니[及其死 又以屍諫]
가히 지극한 충성이라고 이를 만하다."[可謂至忠矣]
이렇게 후회하고 나서 사어의 아들에게 명하여 새로 예를 갖추어 장사를 후하게 치르게 했습니다.
그리고 영공은 즉시 거백옥(蘧伯玉)을 상경(上卿)으로 등용하고 미자하(彌子瑕)를 물리쳐 멀리 보냈습니다.
영공이 미자하(彌子瑕)를 퇴출(退黜) 시킬 때 이렇게 질책했다고 합니다.
"지난날 먹다 남은 복숭아를 내게 먹게 함이 하나의 불충(不忠)이고,
과인의 수레를 사사롭게 타고 귀가한 것이 두 번째 불충(不忠)이며,
거백옥(蘧伯玉)을 너로 말미암아 쓰지 못함이 그 세 번째 불충(不忠)이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듣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 열렬하게 간하던 자도 죽으면 그만이었는데,[古之列諫之者 死則已矣]
사어처럼 죽어서도 시체로서 간하여,[未有若史魚死而屍諫]
그 임금을 감동시킨 자는 있지 않았으니,[忠感其君者也]
가히 곧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可不謂直乎]
이와 같은 고사(故事)에서 시간(屍諫)이란 말이 나왔는데 시체로써 임금을 간(諫)하여 정도(正道)를 걷게 한 사어(史魚)는 직간(直諫)의 종결자(終決者)라 할 것입니다. 사어병직(史魚秉直)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라 할 것입니다.
임금이 바른 선택을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임금의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는 간신(奸臣)이 있게 마련이고 이에 반하여 올곧은 바른 신하들은 직간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고래로 목숨을 걸고 직간하는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하(夏)나라 때 관용방(關龍逄)은 걸왕(桀王)의 무도(無道)한 정사를 간(諫)하다 죽임을 당했고, 은(殷)나라 때 비간(比干)은 주왕(紂王)의 음란함을 직간(直諫)하다 심장이 도려지는 죽임을 당했고, 역시 은나라 때의 충신 악후(鄂侯)는 주왕의 무도함을 간하다 포(脯)가 되는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전한(前漢)의 성제(成帝) 때 주운(朱雲)은 황제의 어린시절 사부였던 관계로 위세를 부린 정승 장우(張禹)를 탄핵(彈劾)하여 목을 베라고 상소를 올려 황제가 이를 보고 대노(大怒)하여 끌어내라 하니 무관들이 그를 끌어내려 하자 그는 난간을 결사적으로 부여잡고 장우의 목을 베야 한다고 간했는데 이 과정에서 난간이 부러졌다고 합니다. 마땅히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죄를 면하였습니다.
난간을 교체 보수하려 하자 황제는 끊어진 난간을 그대로 붙여 놓아 직간한 충신의 충성의 표징으로 삼겠다고 하였으니 이 고사를 일러 절함(絶檻)이라 합니다.
정관(貞觀)의 치(治)로 유명한 당태종(唐太宗)에게는 간관(諫官) 위징(魏徵)이 있었습니다. 위징은 당태종에게 직간을 많이 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많이 산 신하로 유명합니다. 당태종은 그의 간언에 밥맛을 잃을 정도였으나 그를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위징이 죽자 "나는 이제 거울을 잃었다." 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그가 이룬 정관지치(貞觀之治)는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직간한 신하들이 많았습니다. 직간을 하면 노여움을 사 내쳐져 유배를 당하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아니 되옵니다!"
현재의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떠할까요? 집권당의 정치인들은 대통령께 직언(直言)을 할까요? 그런 직언을 들어 주고는 있을까요?
위징(魏徵)은 말했습니다.
"간언(諫言)을 하면 자신이 위태롭지만, 간언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언로(言路)가 열리면 정관지치(貞觀之治)와 같은 영광을 보게 되고, 언로가 막히면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
그리고 여기에 미자하(彌子瑕)가 많이 나오니 미자하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마칠까 합니다.
미자하(彌子瑕)는 미남자(美男子)로 위영공(衛靈公)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으로, 임금의 총애를 빙자하여 위나라의 정치를 휘두른 사람입니다.
《한비자(韓非子)》『설난편(說難篇)』 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미자하(彌子瑕)라는 아름다운 소년이 위(衛)나라 임금의 총애를 받았었다.
위나라 국법에서는, 승낙 없이 임금의 수레를 쓴 사람은 발을 짜르는 월형(刖刑)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이 위독했을 때, 밤에 사람이 몰래 찾아와서 미자하에게 소식을 전했다. 미자하는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여, 임금의 수레를 타고 어머니를 보러 갔다. 임금은 그것을 듣자 미자하를 칭찬하여
"효자로구나. 어머니를 위해, 다리가 잘리는 것조차 잊고 있었으니!"
하고 말했다.
또 하루는, 임금을 모시고 과수원으로 가서 복숭아를 먹게 되었다. 하도 맛이 있는지라 먹다 남은 반을 임금에게 올렸다. 그러자 임금은
"나를 끔직이도 생각하는구나. 제 입에 넣은 것도 잊고 나에게 먹으라고 주다니!" 하고 말했다.
그뒤 미자하의 얼굴이 거칠어지고 사랑이 식었을 때, 임금에게 허물을 지게 되었다. 그러자 위나라 임금은 미자하를 이렇게 말했다.
"이놈은 전에도 임금의 명령이라고 속이고 내 수레를 탄 일이 있었고,
또 내게 먹다 남은 복숭아까지 먹인 일이 있었다."
미자하의 행동이 처음과 나중이 달라진 것이 아니지만, 앞서는 칭찬을 받았던 일이 뒤에는 죄를 얻게끔 된 것은 사랑과 미움의 변화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임금의 마음에 드는 동안은, 이쪽의 생각이 상대방의 마음에 맞아 더욱 친하게 되지만, 한번 임금에게 밉게 보이게 되면 이쪽의 생각이 상대방의 마음에 맞지않게 되어,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임금에게 간하는 말이나 무슨 상의를 하려는 사람은, 상대방의 사랑과 미움이 어떠한가를 잘 알고 난 다음에 말을 꺼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용(龍)이란 동물은 정을 붙이게 되면 그 위에 올라탈 수도 있지만 그 목 밑에 있는 한 자쯤 되는 역린(逆鱗)을 건드리게 되면 용은 반드시 그를 잡아먹게 된다. 임금에게도 마찬가지 역린이 있다. 임금을 달래려는 사람이, 용케 그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으면 우선은 성공한 걸로 볼 수 있다.」
이상으로 맹가돈소(孟軻敦素)와 사어병직(史魚秉直)에 대하여 공부해 보았습니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길은 올바른 행위를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소양을 돈독히 하면 어떤 난관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사어(史魚)로부터 그 곧음을 배워 불의에 굽히지 않는 당당한 기상을 견지한다면 위의당당(威儀堂堂)하게 팔정도(八正道)를 걸어가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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