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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tiger 2012-06-09
며칠 전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재위 60주년(Diamond Jubilee) 행사가
영국에서 며칠에 걸쳐서 성대하게 펼쳐졌다.
이 다이아몬드 주블리는 영국에서 엘리자베스여왕 1세가 1897년에 치른 이후 두번째의 행사라고 한다.
한 개인도 60년간을 살았다면 적잖게 기록 될 사항이 많기 마련인데
한 나라의 왕으로 그것도 여왕으로 60년을 지냈으니 얼마나 많은 기록들이 남겨졌을까?
역사의 기록이 다른 왕들과 달리 당연히 길어질 것으로 짐작된다.
영국이 대영제국(Britsh Empire)에서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으로 영국의 체제가
바뀌면서 세계 국력의 판도가 달라지고,
영국의 영향력은 확연하게 줄어 들었으며, 엘리자베스여왕 즉위시에 수상이였던 처칠 수상을 시작으로
현재의 데이빗 카메론수상까지 13명의 수상을 겪어왔으며,
왕실의 위상도 함께 예전과는 달리 쇄퇴됨과 그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여왕의 가족이나 측근들의
불미스런 일들로 세상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른 것이 한두번이 아니였으니
여왕의 그 깊은 마음은 누구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 같아 보인다.
조지6세인 엘리자베스여왕의 아버지는 사랑을 위해 왕관을 포기한 세기의 로맨스의 주인공인
자신의 형님인 에드워드8세가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심슨부인과 결혼하기를 원하자
그 당시 영국의 수상인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영국 왕의 신분으로는 불가하다는 강력한 반대 때문에 왕좌를 포기하게 되면서
그의 동생인 조지6세가 왕좌을 1936년에 물려 받았다.
조지6세는 건강이 좋지 않았었고, 그리고 그동안 항상 에드워드8세인 형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으며, 1차세계대전 중에는 영국의 해군과 공군에 종사했었으며,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왕으로서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추지 못한 채로 윈저가에서는 3번째로 왕위에 올랐다.
1952년 병으로 조지6세가 죽음으로써 그의 큰 딸인 엘리자베스여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여왕은 1939년 13세살 때에 5살 연상의 필립공과 만나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키웠다고 한다.
필립공은 당시 공식 명칭은 Prince Philip of Greek and Denmark 이지만
실제로 왕가나 왕국은 없는 것으로 엘리자베스와 결혼 할 당시엔 문제가 되진 않았다고 한다.
다만 결혼 후에 2차대전이 발발했을 당시엔 필립공의 누이동생이 나치와 결혼한 것 때문에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기도 했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와 필립공은 1947년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슬하에 4자녀을 두고있다.
현재 영국 왕실의 대표적인'비운의 공주 마가렛'으로 불리우는 여왕의 유일한 여동생인 마가렛공주는
16년이나 연상이고, 한번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두고 있는 피터 타운센드대령과의 결혼문제로
왕위 즉위식을 앞둔 엘리자베스여왕은 당시에 많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조지6세가 별세한 뒤, 언니는 여왕으로 왕위를 이어 받아 버킹햄궁전에 남아있고,
마가렛공주와 여왕의 어머니는 버킹햄궁전에서 이사 나오면서 이 두모녀의
호위와 모든 일상을 책임 맡은 피터 타운센드대령과 마가렛공주가 사랑을 하게 되어
결혼하겠다고 엘리자베스여왕한테 허락을 구하자
한 집안의 가장이며 언니로서, 그리고 여왕으로서 동생의 엉뚱한 결혼상대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던 끝에
마가렛공주의 결혼문제는 여왕의 즉위식이 끝나고 영연방국들의 순방을 마치게 되는
1년 뒤에 다시 생각해 보자며 결혼승낙을 미루었고,
여왕은 그 미루는 동안 동생의 마음이 바뀌길 기대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또한 이는 영국내각의 수반이였던 처칠수상까지도 나서서 영국 왕실의 체면에 맞지않는
일개 호위대령에 불과하고, 게다가 한번 이혼한 경력의 소유자인 타운센드와 공주가 결혼한다는 것은
영국 교회에서 허락되지도 않는 일로,'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강경한 정부 차원에서
반대를 하는 사회적인 큰 이슈까지 되었었다고 한다.
결국은 마가렛공주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어 끝내 타운센드대령과의 결혼 포기선언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 후로 마가렛공주는 수많은 남성들과의 염문을 뿌리며 다니던 와중에 타운센드경의 나이에
반밖에 안되는 어린 나이의 여인으로 마가렛과 비슷한 점이 많은 벨기에의 젊은여인과
결혼 한것이 알려진 바로 다음날인 1960년 2월에 마가렛공주는 웨스트민스트사원의 전속 사진사인
안토니 암스트롱 존스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깜짝 발표로 모두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웨스트민스트사원에서 거창하게 거행되는 왕실결혼식을 최초로 TV 중계를 하고,
결혼식의 준비사항, 결혼식에 들어 온 온갖 결혼선물(게중에는 카리비안에 개인 소유로 된 섬을
선물로 증정했다고 함)등이 낱낱히 밝혀지는 온 세상이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비운의 공주 마가렛의 결혼 후의 생활은 그 사교의 범위란 공주의 신분에서
많이 벗어난 것으로 연예계등을 모두 섭렵함과 동시에 1960년대의 패션스타일을 주도하는
롤 모델이 되기도 했으며,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스캔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외형적으로는 화려했지만 불행하기만 한 결혼생활은 더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두 남매를 둔채 1978년 이혼으로 끝났다.
이로써 마가렛공주는 빅토리아공주의 1905년 이혼 후 처음 이혼한 왕족이 되었다.
마가렛공주는 15세 부터 시작된 흡연은 일생동안 심한 해비스모커로 끝내 한쪽 폐를 절제하는
수술을 했고,1991년 부터 금연은 했지만 여전히 알콜중독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었다고 한다.
두번에 걸친 스트록으로 신체적인 부분마비 때문에 휠체어를 이용하기도 하면서
힘든 말년을 보내다가 2002년에 처음 부터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불발로 그친 첫사랑에 한이 맺히고
파란만장한 불행을 초래한 비운의 생을 마감하며 생전에 본인의 유언대로 가족장례를 거쳐
한줌의 재로 변해 자신의 아버지인 조지6세 묘 옆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맏아들로 태어난 찰스왕자는 1948년에 태어나 1958년에 왕자로 공식 명칭을 받았고,
1969년에 제1순위 왕위 후계자로서 대관식을 치렀다.
다이애나와 결혼하기 전에 수많은 여인들과 데이트을 하며 염문을 퍼트렸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의 여인인 카밀라 샌드와는 다이애나와 결혼을 했음에도
헤어지지 못한 채로 남아 있으면서 결국 1980년에 결혼한 다이애너와는 1996년에 이혼으로 끝나고
그 다음해인 1997년 다이애너는 불행히도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윌리엄과 해리 두왕자를 남겨두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찰스왕자는 자신 보다 한살 많고, 그동안 파커보일과 결혼해서 두아이들 둔 카멜라 샌드가
이혼을 하고 난 뒤 2005년 여왕부부가 불참한 채로 평민의 결혼식을 올렸다.
찰스왕자는 영국 교회법에 의해 이혼경력이 있는 배우자와 결혼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두사람은 결혼 허락을 받았고, 엘리자베스여왕 또한 두사람이 함께 살아도록 허락을 했다고 한다.
카멜라 파커 보일드(첫번 결혼으로 성이 바뀌었음)는 찰스의 죽은 전처인 다이애나왕자비를
존중하는 뜻에서 공식 명칭인 Princess of Wales 를 사용치 않고
Duchess of Conwell로 불리기로 정했다고 한다.
맨 왼쪽 부터 카밀라파커, 찰스왕세자, 엘리자베스여왕, 윌리엄왕세손, 그리고 케잇 미들턴왕세손비.(구글에
서 퍼옴)
둘째로 태어난 앤공주는 1973년 웨스트민스트사원에서 마크필립 여왕호위대 대위와 결혼했다.
결혼식에서 여왕은 필립대위에게 왕족과 결혼함으로서 주어지는 신분의 명칭으로
백작을 수여하려 했으나 필립대위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여왕의 손주들 중에서 그의 자녀들은 그의 사촌들과 달리 이때문에
지금도 유일하게 왕족으로서의 명칭이 없다고 한다.
1992년에 이들의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이해 겨울 앤공주는 다시 티모시 로렌스와 재혼을 했다.
영국 교회에서는 이혼한 배우자가 살아 있는 한, 다른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앤공주는 스코틀랜드의 교회에서 로렌스와 결혼식을 올렸고, 로렌스 역시 영국왕족의 신분을 의미하는
귀족 칭호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서 앤공주는 영국왕족 중에서 이혼한 배우자가 살아 있는 중에 재혼한 경우로
1905년 빅토리아공주 다음으로 두번째가 되었다고 한다.
배우자인 남편들이 모두 왕족의 칭호를 거부한 것을 보면
앤공주는 왕실에 대한 식상함을 갖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세번째인 앤드류 왕자도 웨스트민스트사원에서 사라 퍼거슨과 결혼했으나
두 딸을 두고 이혼으로 끝났다.
네번째 막내 아들인 애드워드는 유일하게 여왕의 자녀들 중에 개인적인 커리어를 소지한 여성인
소피 라인존스와 다른 세명의 형제들과 달리 결혼식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닌
윈저성 안에 있는 센 조지채플에서 올렸다.
이렇게 여왕의 동생 마가렛공주를 필두로 해서 찰스왕자, 앤공주, 앤드류왕자 모두가 여왕의 친족들로
웨스트민스트사원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렸지만 모두 이혼으로 끝나게 되어
웨스트민스트사원에서 왕족들의 결혼은 이혼으로 끝나게 된다는 불명예스런 징크스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한 가정사로서도 평탄치 못한 기록을 갖고 있는 엘리자베스여왕의 가족사는
영국 역사상으로 보면 그리 특기 할 만한 일은 아니다.
생애 6번의 결혼으로 6명의 아내를 두었던 헨리8세가 첫번째 결혼을 자신의 임의로 끝내고
(당시 로만캐톨릭의 교리로 이혼은 절대 불가하기 때문에)
2번째 아내인 앤 보일린과 합법적으로 결혼하기 위해서 로만캐톨릭에서 부터
영국이 종교적으로 독립선언을 감행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만 봐도 현재 엘리자베스여왕의 가족사란 큰 이변이 아닐지도 모른다.
잘되면 내 덕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혹자들은 현재 영국 왕실의 복잡한 결혼사를 두고
혈통이 좋지 않은 집안의 내력이라 말하기도 한다.
현재 영국 왕실이란 이름만 남아있는 상징적인 존재임에도 왕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이
$1billion이 넘는다는 기사를 보니 왕족으로 태어나는 것은 특혜이긴 한가 보다.
(참고로 엘리자베스여왕 $ 510million, 찰스왕자 $210million, 윌리엄왕손 $19million, 해리왕손 $16million,앤드류왕자 $75million, 에드워드왕자 $45million 에 달하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여왕의 자산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라는 평가 또한 눈에 뜨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기록을 보면 행복한 왕족 보다는
비운과 불행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윈저가의 빛이란 엘리자베스여왕 한사람 뿐으로 여왕 자신 또한 행복했었는지도 궁금하고,
여왕의 뒷전의 그림자 속에서만 존재가 인정되며,
과히 부럽지 않은 왕족들의 현실에 그 댓가로 $1billion이란
비운과 불행을 감수하며 일생을 보내야만 하는 그 값어치로는 충분한가?
첫댓글 나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존경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평생 품위를 지켜가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 수 있었는지...
그래서 왕실이 오랫동안 존경을 받으면 지속될 수 있는것 같습니다.
왕실의 위상은 많이 쇠퇴했지만
그래도 왕실이 있음으로 영국이 존경을 받고
왕실때문에의 관광 수입도 좋고...
앞으로 윌리엄 왕자비 케이트가 장래 왕을 잘 보필하고
왕실의 존경받는 안주인이 될것 같았는데
아프다니.. 암이라니.. 빨리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넷플렉스가 제작한 시리즈 "The Crown" 덕분에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녀 가족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마가렛 공주는 사진으로 보니 The Crown 에 나온 배우보다 더 우아한데, 그녀가 줄담배에 알콜 중독이었다니...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들과 결혼하게 허락해주었더라면 마가렛 공주도, 찰스도, 다이애나도,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았을텐데.
더 크라운을 통해본 여왕은 아기때부터 본인이 키우지 않아서 그런지 모성애가 좀 없는것 같더군요.
여왕뿐만 아니라 영국의 상류층 사람들 자체가 그런지도?
본인은 70년씩이나 여왕으로 재임했지만, 여왕도 자녀들의 이혼으로 인해 속은 끓었겠죠?
전 시간이 없었어 "The Crown" 시즌 5,6 편을 아직 못봤는데,
청이님 덕분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