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에게
시. 천상병
온실에서 갖나온 꽃인양
첫걸음을 내디딘 신부여
처음 바라보는 빛에 눈이 부실 테지요.
세상은
눈부시게 밝은 빛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빛도 있답니다.
또한 기쁜 일도 있을 것이고
슬픈 일도 있답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쓴맞이 더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은 괴로움만도
또한 아닙니다.
신부님곁에는 함께 살아갈
용감하고 튼튼한 신랑이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사랑하고 양보하며는
더 큰 복을 받을 테지요.
신부여,
성실과 진실함이 함께 한다면
두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의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용기와 힘을 합쳐 보세요.
그러면 아름다운 꽃이 필 것이며
튼튼한 열매가 맻어질 것입니다.
*천상병 詩集 <<요놈 요놈 요 이쁜놈>>..
----------------------------------
바다 생선
시. 천상병
바다 생선은 각종각류이지만
무엇보다 바닷물이 선결 조건이다.
하기야 우리를 비롯한 인간도 수분이 꽉 차 있다.
플랑크톤이 제일 작은 생선일 것이다.
힘이 약하고 작은 것은
유력하고 덩치가 큰 놈이 처먹게 마련.
인간의 플랑크톤은
어떻게 잔존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불가사의한 사실이다.
맛도 괜찮고 양분소도 많다.
칼로리는 오징어가 많다는데
알다가도 모를 만한 일이다.
나는 생선을 매우 입에 알맞다고
밥때마다 먹고 즐기지만,
선조의 시초라고 생각하면 언짢다.
*천상병 시집 <<주막에서>>..
----------------------------------
소릉조
시.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
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
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
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나는 영영
가지 못하나?
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천상병 시집 <<저승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
광화문에서
아침길 광화문에서 '눈물의 여왕' 그녀의 장례
행진을 본다. 만장이 나부끼고, 악대가 붕붕거리
고, 여러 대의 차와 군중이 길을 메웠다. 나는 곰
곰히 생각해 보았다. 죽은 내 아버지도 '눈물의
여왕'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댔지......아니다. 그
런 것이 아니다. 문인들 장례식도 예총 광장에서
더러 있었다. 만장도 없고, 악대는 커녕 행진은커녕
아주 형편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임이었다.
그 초라함을 위해서만이 그들은 '시'를 썼다.
--------------------------------------------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
초롱꽃
이 시를 쓰는 지금은
92년 5월 10일입니다.
방문을 열어놓고
뜰을 보니
초롱꽃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초롱꽃의 빛깔은
내 마음에 안 들지만은
그래도 싱싱하게 핀 초롱꽃에
나는 맥주를 한 병 마셨습니다.
우리 집 뜰은 넓진 않지만
가지각색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초롱꽃도 그 한가지입니다.
--------------------------------------
비
부슬부슬 비 내리다.
지붕에도 내 마음 한구석에도-
멀고먼 고향의 소식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아득한 곳에서
무슨 편지라든가......
나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그저 하나님 생각에 잠긴다.
나의 향수(鄕愁)여 나의 향수여
나는 직접 비에 젖어보고 싶다.
향이란 무엇인가,
선조(先祖)의 선조의 선조의 본향(本鄕)이여
그곳은 어디란 말이냐?
그건 마음의 마음이 아닐런지-
나는 진짜가 된다.
------------------------------------
어두운 밤에
시. 천상병님
수만년 전부터
전해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
사용자 PC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스크립트를 차단했습니다. 원본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노도(怒濤) . 1
시. 천상병
바다의 물결은 파폭(波幅)이 매우 세다.
그 거리도 긴 것 같고
스케일이 세계적이요 우주적이다.
수심(水深)은 몇킬로미터나 될까?
요량할 수도 없다.
생선(生鮮)들도 모른다.
노도(怒濤)는 풍속으로 일어나지만은
여러가지 생명체의 시원체(始原體)인데
그래도 그런 흔적도 없고 아예 숨긴다.
-----------------------------------------
국화꽃
시. 천상병님
오늘만의 밤은 없었어도
달은 떴고
별은 반짝였다.
괴로움만의 날은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심만이 내가 아니라도
탁자 위 컵에 꽂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
추억
시. 천상병
세계는 지금 걱정투성이지만
내 마음 그런 것 아랑곳없이
과거로만 치닫는다.
아름다운 추억도 있었지
그리고 멋진 일도 한두 번 아니지
그러나 그런 것 지금
기억해도 다 소용이 없네.
----------------------------------
사용자 PC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스크립트를 차단했습니다. 원본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폭풍우
시. 천상병
내가 스무 살 때
부산에서 충무 가는 배 탔는데
거의 다 와서 난데없이 폭풍 만나
간신히 살아남은 회상(回想) 생생.
선체 침몰하듯 뒤흔들리고
손님들의 철석 같은 신음 소리 높고
금시 저 세상인 줄 알았었다.
하복부 큰 힘주고
애오라지 마지막이구나 싶은데
선원이 '다 왔다!' '다 왔다!' 외쳐서
아이구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도.
---------------------------------
어머니 생각
시. 천상병
어머니는 60년대말에 가셨지만
두고 두고 생각이 난다
이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어머니였다
천석꾼인 아버지에게
시집와서는
남편을 잘 모시고
아이들을 잘 길렀다
내가 오랫동안 기억나는 것은
내가 일곱살 때 봄에
고향에서, 장독대에서
어머니와 정답게 점심 먹은 일이다
어릴 때나 클 때에도
나는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도 사랑스러웠던 어머니
이제 언제 만납니까 언제 만납니까
---------------------------
고향사념(故鄕思念)
시. 천상병
내 고향은 강원 창원군 진동면. 어린 시절 아홉 살 때 일본
으로 떠나서, 지금은 서울 사는 나는 향리 소식이 소연(消然)
해-
어른 되어 세 번쯤 갔다 왔지만 옛이 안 돌아옴은 절대진리
(絶對眞理)니 어찌할꼬? 생각컨대 칠백 리 밖 향수 뭘로 달
래랴......
원(願)하고니 향토당산(鄕土堂山)에 죽어 묻히고파. 바다가
멀찌감치 보일듯 말듯 청명천연(淸明天然)에......
-------------------------------------------------
아버지 제사
시. 천상병님
아버지 제삿날은 음력 구월 초사흘날
올해도 부산에 못 가니
또! 또!
아버님 영혼께서 화내시겠습니다.
가난이 천생(天生)인 것을
아버지 영혼이시여 살펴주소서
아버님도 생전에
"가난하게 살아야 복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는 젊을 때
천석(千石)꾼이었는데
일본놈에게 속아 다 날리고
도일(渡日)하여 돈을 버신 아버님.
아버지! 아버지!
지금까지 생존하였다면
팔십이 살짝 넘으셨을 아버지
오로지 천국에서 천복(天福)을 누리옵소서
=----------------------------------------
<PRE><BL><BL><UL><U><u>
나 무
시. 천상병
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하느님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왜냐구요? 글쎄 들어보이소.
산 나무에 비료를 준다는 일은 없다.
그래도 무럭무럭 자란다. 이건 왠일인가?
사실은 물밖에 끌어들이는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저렇게 자라다니 신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산이란 산마다
나무가 빽빽히 자라는 것은 누가 심었더란 말인가
. 그것뿐만이 아니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도 나무는 있다.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누가 심었더란 말이냐?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다만 하느님이 심으셨다는 생각이 굳어갈 뿐이다
. 보살피는 것도 하느님이다.
*천상병 시선집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
-------------------------------------------
편지
시. 천상병
아버지 어머니, 어려서 간 내 다정한 조카 영준
이도,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그새 시인
세 분이 그 동네로 갔습니다. 수소문해 주십시오.
이름은 조지훈, 김수영, 최계락 입니다. 만나서 못
난 아들의 뜨거운 인사를 대신해 주십시오. 살아
서 더없는 덕과 뜻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그 세 분만은 저를 욕하진 않을
겝니다. 내내 안녕하십시오.
2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전세계보다
더 복잡했고
어둠보다
더 괴로웠던 사나이들
그들은
이미 가고 없다.
----------------------------
달
시. 천상병
달을 쳐다보며 은은한 마음
밤 열 시 경인데 뜰에 나와
만사를 잊고 달빛에 젖다.
우주의 신비가 보일듯 말듯
저 달에 인류의 족적(足跡)이 있고
우리와 그만큼 가까와진 곳.
어릴 때는 멀고 먼 곳
요새는 만월(滿月)이며 더 아름다운 것
구름이 스치듯 걸려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