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9/143일차> 2012년 3월 2일(금) 이라클리온-->하이나(크레타), 흐림, 지중해 드라이브
밤새 에게해를 달린 페리는 아침 6시30분 지중해 동쪽 한 가운데 자리잡은 크레타 섬의 가장큰 도시이자 항구인 이라클리온(Heraklion)에 도착했다. 어제 밤 9시30분에 출발했으므로, 9시간이 걸린 셈이다. 페리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에게해를 미끄러지듯이 달려 푹 잤다. 다만 페리가 도착하는 시간이 이른 시간이어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약간 피곤했다.
9시간 야간페리를 타고 크레타 이라클리온 항구에 도착한 '하루 한걸음' 가족.
이라클리온 항구는 아직 옅은 새벽 어둠에 잠겨 있었고, 관광객이나 승객도 별로 없었다. 섬이라 그런지 바람도 심하게 불고, 비도 약간 뿌리고 있다. 우리는 숙소를 예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로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대합실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마침 대합실에 문을 연 스낵코너가 있어 따끈한 차를 마시며, 여행 안내센터가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타고 온 '블루스타' 페리. 아직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대합실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렌트카 부스에 한 아줌마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밑져야 본전인 심정으로 렌트카 가격을 알아보았다. 그 아줌마는 지금이 비수기여서 평소보다 20~30% 정도 할인해, 3일간 오토 승용차는 140유로, 매뉴얼 승용차는 100유로에 각각 대여해줄 수 있다고 했다. 가격을 파악한 다음, 가족들과 논의에 들어갔다.
우리가 다녀오려고 하는 크레타 서쪽의 하니아(Chania)까지 4명의 교통비만 100유로(1인당 20유로)에 이르는 상황에서, 자동차 렌트 가격이 그리 비싼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자동차를 렌트할 경우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정이 그러하니 모두 렌트카가 좋겠다고 이구동성이었다. 가격을 조금 더 깎아볼까 했으나, 더 이상은 어렵다고 했다. 결국 3일간 소형 푸조 매뉴얼 승용차를 100유로에 렌트했다. 3일 동안 기름값 45유로를 포함해 총 145유로 정도가 들었지만,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장기 배낭여행 중에 승용차로 여행한 유일한 코스가 됐다. 처음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지중해변을 신나게 질주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느라 모두 힘들었는데, 경치 좋은 곳을 드라이브하듯이 여행을 한 셈이었다.
매뉴얼 자동차에 익숙하지 않아 처음에는 시동을 자주 꺼먹는 등 애를 먹었으나, 조금 운전을 해보니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매뉴얼 자동차 운전과 현지 지리에 익숙해지기 위해 지중해변 도로를 한참 질주해보기도 했다. 가족도 내가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모두 신경을 써 주었다. 특히 창희는 조수석에 앉아 길을 상세히 알려주어 나는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먼저 지중해와 면한 박물관 옆의 거리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박물관을 관람했다. 박물관은 크게 특색을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이라클리온이 낳은 가장 대표적 문학가인 카잔차키스의 저작과 육필 원고 등을 별도의 공간에 전시하고 있었다. 사실 이라클리온을 방문해 꼭 보고 싶은 것이 그의 무덤과 발자취였는데, 박물관에서 먼저 그를 만나니 너무 반가웠다.
자유의 표상,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라클리온이 낳은 가장 유명한 작가입니다.
카잔차키스야말로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대에 잠들지 않는 ‘영혼의 자유’를 표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운 방랑자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나중에 이라클리온을 떠나기 전날 그의 무덤을 찾아 그가 추구한 ‘자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박물관에선 그의 발자취와 흔적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박물관을 나와 시내로 들어갔다. 이라클리온은 큰 도시가 아니어서 걸어 돌아다니는 데 문제가 없었다. 라이온 광장이라고도 불리는 베니젤로 광장(Plateria Venizelou)은 이라클리온 중심에 있었다. 주변엔 대성당과 시청 등이 자리잡고 있고, 상가와 카페 등이 밀집해 있었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시장에 물건을 사러 나온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모로시니 분수대(Morosini Fountain)도 작동을 멈추고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분수대는 날이 따뜻해 시원한 물줄기를 쭉쭉 뻗어내야 아름다운 법이었다. 인근의 카페에도 해가 잘 비치는 곳 이외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라클리온 중앙광장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모로시니 분수.
베니젤로 광장에 이어 베네치아 시대인 16세기에 지어진 타운 홀(Town Hall)과 현재는 이라클리온의 공식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는 성 마르코 바실리카(St. Mark’s Basilica) 등 주요 건축물과, 베네치아 성벽 등을 둘러보았다.
이라클리온 타운홀.
이라클리온 중앙광장과 이어져 있는 시장.
특히 이라클리온의 외곽을 감싸고, 해안까지 뻗어있는 베네치아 성벽은 매우 인상적이어서, 호기심을 번득이며 성벽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곳은 역사적인 성벽이라기보다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찾아오는 관광객은 우리밖에 없을 듯싶었다. 성곽의 일부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성벽엔 스프레이 낙서가 어지럽게 나 있었다. 그리스가 보존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이런 것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라클리온을 감싸고 있는 베네치아 성곽.
시내를 끝에서 끝까지 관통해 걸어 샅샅이 돌아본 다음, 이라클리온 항구로 향했다. 과거 배를 정박시키고 화물을 보관했던 거대한 돔 형태의 건축물들이 항구에 죽 들어서 있었고, 항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작고 멋진 요트들도 많았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여름날, 이들 배들이 돛을 올리고 파란 지중해 바다를 하얗게 수놓는 풍경은 상상만 해야 했다.
이라클리온 항구.
항구 끝에는 베네치아 시대에 만들어진 바다 성벽이 있었다. 바다 끝에 만든 성채로,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새벽에 이라클리온에 도착할 때부터 심상치 않게 몰아치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그 바다는 거센 파도를 만들었고, 그 파도가 성채에 부딪치며 하얀 포말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우리도 성채에 올라가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봐야만 했다. 처얼썩~ 처얼썩~ 파도 소리만이 성채에 울려퍼졌다.
방파제 끝에 세워진 베네치아 성채로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가 거세 성채로는 올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항구까지 이라클리온을 한바퀴 돈 다음 11시30분 바닷가에 세워놓았던 차를 다시 몰고 서쪽 하니아로 이동했다. 오른쪽에는 파란 지중해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길은 해안의 절벽 아래로 이어졌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새벽 잠을 설친 가족들은 자동차에 올라타고는 꾸벅꾸벅 졸다가 아예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운전을 하다가 멋진 풍경이 나타나면 가족들을 깨웠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와~ 멋있다” 하고 탄성을 토해내고는 또다시 꾸벅꾸벅 거리기 시작했다. 아쉬웠지만 어찌하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 눈꺼풀인 것을.
우리가 3일간 100유로에 빌린 푸조 자동차. 작지만 잘 나갑니다.
아름다운 지중해변을 1시간 반 정도 신나게 달려 오후 1시 이라클리온과 하니아의 중간에 있는 작은 마을 레팀노(Rethymno)에 도착했다. 해변가의 식당을 찾아 생선과 고기, 야채 등으로 푸짐한 식사를 했다. 많은 레스토랑이 문을 닫은 상태였지만, 문을 연 곳에는 손님들이 많았다. 이라클리온에선 비 바람이 불던 날씨가 레팀노로 오니 활짝 개이고 바람도 그렇게 많이 불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다음 해변을 한참 걸었다. 지중해변이 반짝반짝 빛났다.
레팀노 중앙광장.
레팀노 해안식당에서 먹은 맛있는 그리스 음식.
다시 차를 몰아 서쪽으로 향해 오후 4시 우리의 목적지인 하니아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지중해를 느끼면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크레타 여행의 목적이었다. 숙소를 예약하지 않은 상태여서 차를 시내와 거의 붙어 있는 해변의 공터에 주차해 놓은 다음, 아내와 창희, 동희가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여행정보도 알아보고 숙소도 잡기 위해 시내로 향했다. 아침부터 계속해서 운전을 해온 나는 차에서 쉬면서 아내와 이이들을 기다렸다. 차를 몰고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지만, 아무래도 일방통행도 많은 등 교통사정이 복잡해 걷는 게 편리할 것이라 판단했다.
하니아 해변 모습. 서쪽으로 기우는 햇살을 받아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한참 지나자 아내와 아이들이 “좋은 숙소를 구했다”고 싱글벙글 거리며 나타났다. 여러 숙소를 돌아보며 심사숙고해 잡은 것이었다. 역시 좋은 숙소였다. 중앙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구시가 중심지의 바라나스(Varanas) 호스텔로, 2인실이 30유로로 모두 60유로였다. 방도 크고 시설도 깨끗하고 모든 것이 잘 정비돼 있었다. 숙소엔 부엌이 갖춰져 있어 아내와 아이들이 인근 슈퍼에서 쌀과 야채, 고기 등을 잔뜩 사가지고 와서 저녁을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지중해 동쪽 한 복판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 크레타에 새벽에 도착해, 이라클리온과 레팀노를 거쳐,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의 하나인 하니아까지 드라이브를 한 즐거운 하루였다. 넓고 쾌적한 방에서 일찍 잠자리에 들며 내일의 또 다른 여정을 기약했다.
첫댓글 좋았겠다. 나는 가보지 못한 Greece 여행, 그리고 이제부터의 유럽 여행, 마음 끝 즐기고 돌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