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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싱 페이퍼 / 김윤이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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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레이싱 페이퍼(tracing paper)는 그림이나 글씨 위에 대고 그것을 베껴낼 때 쓰는 얇은 종이를 말하지요. 시의 제목이 ‘트레이싱 페이퍼’인 걸로 보아 이 시에서 트레이싱 페이퍼란 무엇이며, 그것을 통해 베껴낸(보여지는)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보는 것이 바로 ‘시 읽기’가 되겠네요.
잘 마른 잎사귀가 바스락거리며 나를 읽네
- 이런 문장을 두고 멋진 시적표현이라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말이 안 되는 황당한 소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황당하다는 것은 사실이나 보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인데, ‘새가 나를 본다 > 꽃이 나를 본다 > 나뭇잎이 나를 본다 > 마른 잎사귀가 나를 읽는다’ 이렇게 나열해보니 위의 문장도 그다지 황당하지는 않지요?
깊은 밤 어둠속에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누워있는데 밖에서 마른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누군가 자기를 엿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자기를 들켜버렸다는 느낌이 되고, 그래서 ‘나를 읽네’ 라는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몇 장 겹쳐도 한 장의 생시 같은,
서늘한 바람 뒤편
달처럼 떠오른 내가 텅 빈 아가리 벌리네
- 아마도 이 부분은 무슨 소린지 감이 잘 안 잡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네요. 나도 그 중 하나니까요. 그러나 모국어로 된 말이니 느낌이 오는 대로 해독해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소통을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던져버리면 그만지요.
여기서는 ‘서늘한 바람’ 이 트레이싱 페이퍼 역할을 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몇 장을 겹쳐도 생시 같다니, 또렷이 잘 보인다는 것이겠지요. 그 뒤에는 달처럼 떠오른 내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고요.
‘서늘한 바람’이 이 문장을 해독하는 키워드가 되겠네요. 우선 ‘냉정한 자의식’ 쯤으로 환치해 볼까요? 자기성찰이나 회한의 바람이라고 해도 되겠고요. 그것이 투사지(透寫紙 ) 역할을 해서 그 뒤의 나를 비춰낸다는 것이지요. ‘텅 빈 아가리를 벌리네’ 는 배가 고프다는 뜻일까요? 모르겠으면 그 장면을 그대로 머리에 담아 두고 넘어갑시다.
지루한 긴긴 꿈을 들여다봐주지 않아 어둠이 흐느끼는 밤
백태처럼 달무리 지네
일순간 소낙비 가로수 이파리,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네
- 1행을 축의적으로 읽으면 어둠이 꿈을 꾸었는데 누가 들여다봐주지 않아 흐느낀다는 것이고, 2행은 달에 백태처럼 달무리가 생겼다는 것이니, 달이 백태(달무리)가 끼어서 어둠의 꿈을 들여다 봐주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겠네요. 달무리 진 밤의 분위기가 그렇다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가지요.
‘눈꺼풀이 축축하게 부풀어 오르고’는 달무리진 달에서 나온 연상일까요? 갑자기 가로수 이파리를 두드리며 소낙비가 쏟아지고 거리마다 지렁이가 흘러넘치는군요. 지렁이는 빗물에서 온 연상고요? 그런데 그런 현상이 왜 ‘일순간’에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군요.
아아 무서워 무서워
깨어진 잠처럼 튀어 오른 보도블록,
불거져 나온 나무뿌리
갈라진 혓바닥이 배배 꼬이네
비명이 목젖에 달라붙어 꿈틀대네
-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장면 같기도 한데, 표현이 절박하고 그로테스크 한 것으로 미루어 가위눌린 악몽(惡夢)이 아닐까 싶 네요.
나는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고 싶지만
손금이 보이지 않는 손
금 밟지 않기 놀이하듯 두 다리가 버둥대네
- 악몽은 대개가 무엇에 쫓기는 꿈이지요. 하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군요. 그럴 때는 손바닥에 침을 뱉어놓고 손가락으로 쳐서 방향을 정하지요. 그런데 손금이 보이지 않는다는군요. 손금이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평상적인 사태는 아니군요. 도처에 위험이니 다리가 버둥거릴 수밖에요.
두 동강난 지렁이 이리저리 기어가고
구름을 찢고 나온 투명한 달
내 그림자는 여태도록 나를 베끼고 있네
- 구름을 찢고 달이 나왔다는 것은 악몽에서 깨어나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으로 읽을 수 있을 것도 같고, 트레이싱 페이퍼를 걷어낸 현실적인 나로 돌아왔다 의미도 될 것 같네요. 그런데 마지막 행에서는 투사지를 걷어낸 현실세계에서도 나를 베끼는 그림자가 있었네요. 뭔가 의미심장한 여운을 주는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 트레이싱 페이퍼로 투사(透寫) 해본 그림은 급박하고 그로테스크한 악몽과 같네요. 그런데 화자가 이 그림을 통해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지 나로서는 해독이 안 되네요. 주제의식이 모호하다고 할 수밖에요. 개인적으로 이런 시에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 심사를 한 황지우 시인은 이 시를 어떻게 읽었는지 보기로 하지요.
< 당선작으로 김윤이의 ‘트레이싱페이퍼’를 정하는 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쁜 숨결 속에서도 잘 유지되는 묘사력과 활달한 상상력으로 개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었다. 이 작품과 함께 응모한 작품에서 보여지는 다소 시류적인 어투와 산문성은 이 시인이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근사근 시를 풀어내는 언어감각은 앞으로 한 시인으로서의 항해에 눈부신 햇살을 예고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새 시인의 출발을 축하한다. 한국시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서, 힘차게 비상해 줄 것을 믿는다. > - 황지우(시인)
첫댓글 소재에 대한 집중도가 강하고 언어의 정제(精製)가 일종의 미학을 이루고 있다. 즉 정공법으로 쓴 시이다. 불안한 상념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어디에서 연유한 불안인지 잘 모르겠기에 시인에게 물어보고 싶다. / 2007년 신춘문예 작품총평 (이승하)- [다층] 2007년 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