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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골 동네사랑 열리다
감골 처녀 기순이는 천상 낙천적이어서
소녀시절부터 명랑한 심성으로 지개를 지었으니.
깍짓동 나뭇단을 받치고 까만 얼굴이 고개를 들 때마다 함박웃음이었다. 쬐끄만 계집애가 산더미 바지게를 지고 오솔길을 뒤뚱뒤뚱 내려오면, 만나는 사람마다 ‘으메, 나무꾼은 안 보이는데 나뭇단만 움직인다’며 혀를 내둘렀다. 게다가 기순이는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지개작대기 내려놓고 깍듯이 배꼽 인사를 올려서 칭찬이 자자했다. 그건 아버지 김씨가 가르쳐준 밥상머리 예법인데, 솔직히 진저리나게 들은 잔소리 탓이기도 했다.
밭매기․모내기도 선수여서 망아지 소녀 때부터 어른 일꾼의 삯을 받았다. 품앗이꾼을 모으는 ‘고지 오야지’들은 농땡이꾼 아줌마를 슬그머니 떼어내더니 대신 기순이를 야리끼리시켜 어물쩍 데리고 가곤 했다. 그 소문이 대나무 뿌리처럼 쫙쫙 뻗으면서 열네 살 이후로는 아예 윗동네 원정 품앗이까지 진출하면서 상일꾼 대우를 받았다. 동네 사람들이 ‘새마을 아가씨’나 ‘처녀 농군’이라고 추켜세우면 어깨를 으쓱하던 풋보리 소녀 때다. 뿌듯했다. 그러다가 앞가슴 부풀던 처녀 시절 즈음 공사판 품팔이로 변신했는데.
첫 자리가 독립기념관 건설 작업장이다
기순이는 몸으로 때우는 것 이외에 아무 기술이 없었으므로 기술자 선발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사람들 틈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건설소장이 면접 지망생 백여 명 가량을 작업장에 대기시켜놓고, 기계 다루는 테스트를 하는데.
“불도저 몰 수 있는 사람.”
하면, 남정네 몇 사람이 가벼운 거드름으로 앞에 나가 시범을 보였고, 나머지 대기자들은 기술자 뽑기가 끝날 때까지 보리자루처럼 앉아만 있는데.
“양수기 돌릴 수 있는 사람, 손 드슈.”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웬 장발 청년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튀어나가 기계를 슬쩍 쓰다듬는 순간 엔진 시동 소리가 부르릉 터지면서 환하게 밝아지는 표정도 보았던 것 같다. 지켜보던 소장이 쓰뭉하게.
“됐쇼.”
합격 판정과 동시에 인부 세 명을 붙여주자 우쭐우쭐 작업장으로 나가던 야무지게 생긴 남정네다. 그 사내가 면접장 바깥으로 사라지기 직전 얼핏 눈이 마주치는 순간 햇살에 비쳐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금세 잊었을 뿐이다.
사내 이름은 박진구.
6남2녀 중 다섯 째였으며 중농의 기와집에서 무탈한 소년기를 보냈단다. 석천중학교 1회 졸업생인데 공부도 중간 이상 성적으로 농고 졸업까지 마쳤고 제대 직후 집안일을 돕다가 차부 ‘기술자 모집 공고’ 게시판을 보고 건설 현장을 찾았단다.
이제 아무 특기가 없는 사람들만 오그르르 남았다가.
한꺼번에 몸으로 때우는 일용직으로 배치되었다. 남자들은 질통에 모래나 자갈․시멘트를 담아 온종일 날랐고 여자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하염없이 못을 빼면서 크기 별로 정리했다. 잔못은 못대가리에 장도리를 대자마자 단방에 뽑아냈지만 깊숙이 박힌 대못은 송곳으로 틈을 쑤셔서 펜치로 이빨을 물어 끌어당겨야 했다.
펜치를 당기며 어금니 옹물다 보면.
이따금 양수기 그 사내가 못을 뽑는 아낙네들 옆으로 훠이훠이 지나가는 것이다. 기순이가 곁눈질 해보면, 저니도 저만치서 장발족 머리칼 출렁대며 돌아보기도 했다. 깎은 밤톨처럼 야무지게 생긴 몸이 햇살 받아 후광처럼 반짝인다. 자기 얼굴에 점수를 주지 못하는 기순이도 아주 잠깐 설레었던가.
그날은 아침상 설거지가 늦는 바람에 작업장에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웬 차광막이 널따랗게 덮여진 채 오뉴월 햇살을 막아주는 것이다. 이제 작렬하던 땡볕이 차단되면서 여자들은 그늘에서 부은 발등 편안하게 식힐 수도 있게 되었다.
“성님, 이거 누가 쳤어. 좋긴 하구만.”
“저기 ‘걱정시러’ 아저씨나 그런 인심 베풀지 우리헌티 누가 이런 써비스 헤주겄남.”
사내의 별명은 ‘걱정시러’였는데.
익은 배처럼 자상한 성품으로 아줌마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였다. 차광막 아래에 판자때기도 깔아주고 부탄가스도 설치해서 ‘못 빼기조’ 아줌마들이 쉴참마다 라면도 추렴할 수 있었다. 아무튼 기순이는 가급적 관심을 끄려했다. 동료 아줌마들이.
“저 사람이 유부남인 것 같지만 착하구나.”
하기에, 당연히 앳된 새신랑인 줄만 알았으므로 처음부터 신경을 꺼버린 것이다. 남자의 연(緣)을 느낀 건 나중 얘기다. (독립기념관은 86년 8월 12일에 화재가 터지는 바람에 그해 8월 15일은 오픈을 못했다. 책임자들은 난리가 났겠지만 인부들 입장에선 일거리가 연장되었으니 손해 볼 것도 없었는데.)
파리 낚시질
이듬 해 병천 다리 신축장에서 또 만났으니 이런 게 연분일까.
진구씨는 거기서도 중장비 기술자로 업그레이드되어 등장했고 기순이는 여전히 모래를 나르거나 시멘트 버무리는 노가다로 배치되었다. 서로 아는 척은 하지 않았고 그저 알아봤다는 눈빛만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점심 식사를 마친 진구씨가 초가을 오후의 포만감으로 자재 창고에서 등허리 붙이는 중이다. 나른한 낮잠 타임에 빠지려는 참인데 뒷문 냇가 쪽에서 ‘하하호호’ 소리가 연방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뭐지’ 하며 몸을 일으켰다. 엉거주춤 아래를 내려다보니 공사판의 그 감골 색시가 꼬맹이 조카 둘을 데리고 대나무 낚시질에 빠져있는 것이다. 꼬맹이 사내놈들은 아랫도리 벗은 채 검바위 아래를 더듬고 있었고 처녀 혼자 포플러 치마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채 대나무 낚싯대를 드리우는 풍경이다. 조선무처럼 틈실한 무르팍이 드러나서 조금은 민망했는데.
기순이의 낚시 미끼인 쇠파리가 눈에 띄었다.
우선 낚싯밥 값이 안 드니 살뜰한 체질이다. 외양간이나 부뚜막에 올라온 파리를 때려잡아 ‘조양 성냥’갑에 꽉꽉 채워온 것들이리라. 그걸 공사판에 가져왔다가 점심 시간 직후 자투리 시간에 살여울 냇가의 붕어나 피라미 미끼로 쓰곤 했다. 잡은 물고기는 억새꽃이나 풀대궁에 거꾸로 끼워서 조카들 손에 들려 외갓집으로 보냈으니 참으로 야무진 손매다. 외삼촌네 부엌에서 청양고추 매운탕을 끓여놓은 다음에야 자기 집에 갔으니, 처녀 때부터 두 집 살림을 맡은 셈이다.
파리 낚시는 소일거리나 반찬 장만 말고도 색다른 재미도 있었다.
다리 위를 지나가던 트럭 뒷칸 남정네들이 손가락을 입 속에 넣고 ‘휘이익’ 휘파람을 불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덤프 트럭기사까지 합체하여 괴성을 지르며 질주한다. 기순이는 뽀얗게 먼지 날리며 치달리는 트럭 소리를 느끼면서.
‘저 인간이 나를 여자로 보는구나. 남자로 안 보고. 우히히히.’
새삼스레 치마끈 추슬러보기도 했다.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알타리무 종아리가 ‘냇가의 요정’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느낌이 예전과 사뭇 다른 이유는.
눈빛 때문이다. 자재 창고 문짝 너머로 훔쳐보는 사내의 눈길이 자꾸 목덜미를 찌렁찌렁 쑤시는 것이다. 얼굴이 싸-하게 달아올랐지만 시치미 뚝 떼고 낚시찌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긴장을 푼다며 부른 노래가 하필.
쇠아치 쇠아치
점백이 쇠아치
북한 사투리 송아지 노래다.
어머니 갑천댁이 펑펑 울 때마다 억지로 달래주던 엉터리 그 노래다. 앞집 고물장수네 타령쟁이 아줌마와 어울리면서 농한기 겨울철부터는 아예 낮술에 쩔어있기도 했다. 그랬다. 앵두나무 새댁은 하느님이 먼저 데려간 절름발이 아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울보 술꾼이 되었단다. 대낮부터 문설주에 쪼그려 앉아 ‘돌아오지 않는 아들’ 찾아 훌쩍훌쩍 훔치기 시작하면 점차 곡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그때마다 막내딸 기순이가 온갖 어리광으로 풀어주려 목소리를 더 크게 했다. 갑천댁이 ‘영만-아. 영만아’ 부르며 꺼이꺼이 울음이 커질수록 울랄라라 노래 가락의 목소리를 높였다. 처음에는.
“옴마 왜 우신댜?”
흔들어도 대꾸가 전혀 없다. 기순이는 분위기 반전을 위해 주특기인 북한 사투리 코미디를 꺼낸다. 더러는 얼굴에 검댕이 숯도 분칠한 채.
“이 에미나이 동문 와 이리 술만 마시고 울구 있시요. 날래 그치지 않으면 고저 대롱대롱 묶어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버리갔시우.”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토방에 올라 엉덩이 실룩실룩 송아지 춤을 춘다.
오마니 소도 점백이소
오마니 닮았수다레
펑펑 울던 아낙이 막내딸의 재롱에 견디지 못한 채 까르르 웃음보를 터뜨리는 것이다. 눈시울은 그렁그렁 젖은 그대로 입술 끝만 반달형으로 치켜 올렸다.
어린 날의 코믹한 슬픔을 떠올리던 기순이의 눈시울이 갑자기 시큰해진다. 바로 이 냇가다. 검바위 저쪽에서 영만이 오빠의 반발가숭이 몸뚱이가 풍덩 솟구쳐 나올 것 같은 것이다. 그랬다. 통빤쓰 속으로 거웃이 희끄무레 비치는 나이까지 영만이 오빠는 물속 자맥질로 붕어나 피라미를 잡아올리곤 했다. 아리고 쓰리다
요구르트 마실튜?
공사판 작업 스무 날 째, 진부한 신록의 늦봄이었다.
기순이는 바지런 체질이라 휴식을 몰랐다. 다른 아낙네들은 쉴참 때마다 그늘 찾아 등허리 붙일 궁리만 하는데, 기순이는 그 시간에도 자전거 바큇살 쟁쟁 굴리며 논두렁 밭두렁을 치달리는 것이다. 더러는 신작로까지 왕림도 했다. 마침 빙그레 대리점에서 일하는 동창생 묘희를 우연히 만나 얻은 요구르트 한 줄을 짐받이에 얹어놓은 터라 몸도 뿌듯하게 가볍다.
그러다가 아낙네들과 두어 칸 떨어져 고목나무 아래에서 ‘깎은 밤톨’ 그 사내를 만난다. 낮잠에서 깬 사내는 나무 등걸에 기대어 다람쥐처럼 눈 비비는 중이다. 짐짓 퉁명스럽게.
“요구르트 마실튜?”
일부러 쭈욱 뻗쳐 한 손으로 건네주었다. 사내가 뻘쭘하게 요구르트를 받았을 뿐인데, 이상하다, 또 뒷골이 땡기는 것이다. 저쪽에서 자는 척하며 키득대는 아낙네들의 ‘뒤통수에 박힌 눈동자’ 때문이기도 하다. 진구씨가 요구르트를 한 입에 홀딱 털어 넣을 때에도 아낙네들은 실눈 뜬 채 몰래 촉수를 세우는 중이다. 하필 그때 진구씨가 단도직입.
“우리 만날까요?”
“ …… .”
기순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푹 숙였으므로 사내의 눈빛과 마주치진 못했다. 누워있던 아낙네들만 손바닥으로 입술을 묶은 채 킥킥 웃음을 참는 중이다.
쿵, 쿵, 쿵.
가슴을 꽁꽁 누를수록 울렁울렁 굉음으로 확장된다. 태양이 차광막을 향해 수직으로 꽂히던 그 짧은 찰나가 하루보다 길다. 진구씨가 먼저.
“호수 다방이요. 내일 두 시.”
그렇게 툭 던지고 건설 현장 쪽으로 자박자박 사라지자마자, 그제야 아낙네들이 사지를 흔들며 까르르르 뒹구는 바람에 기순이는 목덜미까지 빨간 물감으로 젖어버렸다.
“머스마가 화끈하다. 호수 다방이요, 내일 두 시. 어휴. 새마을 아가씨 족두리 쓰겠네.”
“첫 날 밤 준비해야 하나. 허긴 내가 열여덟에 애 엄마 됐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기순이는 도저히 남자를 혼자 만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이고 두야. 설레설레 흔들며 장도리를 들어 대못 하나 단칼에 뽑아볼 참이다. 마침 송판때기에 쏘옥 박힌 왕대못 하나가 눈에 띈다. 펜치로 꽉 물고 단칼에 들어올려 못대가리가 쑤욱 빠지는 순간 ‘됐쇼오’ 소리가 터지다가, 아차 무심코.
“누후가 싸-랑을 아름답다 했던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불러버린 것이다. 까르르르르. 아낙네들이 아예 데굴데굴 뒹굴다가 숨이 막혀 죽는 시늉을 한다.
‘사내와 처음으로 단 둘이 커피를 마셔야 하는구나’
어쨌든 기순이는 사내을 떠올리며 몸도 마음도 무겁다. 하늘빛 새털구름이 오늘 따라 더 짙은 이유다.
연춘리에는 다방이 없고 목천 신작로에만 네 군데 있다.
호수 다방, 신신 다방, 삼거리 다방 그리고 대지 찻집까지 보리 수매대금 품은 시골 신사들이 투전판 기웃댈 즈음이다. 진구씨는 자기가 삼십 분 이상 먼저 도착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출입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바깥만 뱅뱅 돌았다. 아무래도 여자 혼자 다방에 들어가는 게 쑥스러울 것 같아서 문 앞에서 에스코트할 참이다. 그렇게 매칼없이 구두코를 바라보다가 거북선 담배만 두어 개피 더 피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여자가 나오지 않으므로 ‘바람 맞았나’ 구두코로 전신주를 콕콕 찍는데, 뒤에서.
“나 봐유.”
여자의 착한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는 것이다. ‘저기요’나 ‘여보세요’도 아니고 ‘나 봐요’ 란 단어가 이웃집 아줌마 목소리처럼 친근하다.
기실 기순이도 반대쪽 골목에서 혼자서 서성이고 있던 참이다.
목천 언니네 간다며 무작정 신작로에 나왔지만 여자 혼자 다방이란 데를 들어갈 용기가 차마 나질 않는 것이다. 파출소 골목 담벼락에 숨어 한 시간을 기다렸다. 신호등 앞에 바리게이트를 쳐놓고 교통위반자들을 한 시간씩 가두곤 하던 그 자리다. 주로 노가다 아저씨들이나 시장좌판 아낙들만 계도소에 잡혀 있었고 가끔 커피 배달하는 다방아가씨들도 있었다. 열 살 때던가, 아버지 김씨도 신호위반으로 한 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계도소 벌을 받은 화풀이로 술떡이 된 채 집안 식구들을 두들겨 패며 ‘어린 것들이’ 소리를 되풀이했다. (그 ‘어린 것들’이 누군지는 지금도 모른다.) 기순이는 영문도 모른 채 헛간으로 피한 채 잠이 들었었다. 한밤중에 깨어나니 쟁기와 쇠스랑, 낫 같은 것이 괴물처럼 널려 있었다. 이제 그 기억도 아득하고 알싸하다.
그 순간 진구씨의 뒷모습이 나타나면서 가위눌림에서 해방된 것이다. 반가움에 부른 소리가 ‘진구씨-’나 ‘아저씨’가 아니라 ‘나 봐유’다. 아무튼 선남선녀들은 가뿐한 몸짓으로 파출소 앞 대지 찻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기순이가 마신 생애 첫 번째 다방 커피다.
“날씨가 덥쥬? 이.”
기순이는 왠지 어항 속에서 퐁퐁 솟는 산소방울들과 손가락으로 맞춰야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커피를 흘리지 않게 스푼으로 조심조심 떠마신다. 진구씨가 ‘커피는 그냥 그릇째 마시는 거요. 스푼은 젓는 거구요.’ 하려다가 그만두는 표정이다. 유리창에 비친 뺀니가 어수룩하면서도 현란하다.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손바닥만 비비는데, 준구씨가 갑자기.
“내가 영만이 동창이요.”
소리가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왜요?”
기순이도 ‘그래요’가 아닌 ‘왜요’ 라는 반문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억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열일곱 절름발이 걸음으로 하늘나라 찾아 떠난 그 오라비가 수족관 금붕어 틈으로 쏴-아 하며 솟아나올 것 같다. 친구를 집으로 데려온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친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긴 했구나. 창문 너머 하얀 조팝꽃들이 눈발처럼 쏟아질 것 같다. 이상하다. 이 사내 앞에 앉으면 속을 죄다 털어놓을 것처럼 마음이 푹 놓이는 것이다. “그러면 잔나비 띠슈? 아저씨.”
“아니요. 닭띠. 영만이가 열 살에 입학했으니까. 나는 한 살 늦은 아홉 살에 입학했고요. 둘 다 나이백인데 걔가 한 살 더 많쥬.”
기순이가 토끼띠니까 여섯 살 차이, 혼사가 이루어져도 흉이 되지 않는 나이다. 오늘은 첫 날이니까 조금 빨리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 같아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하는데, 사내가.
“내일 오비비어에서 만나요.”
보리 타작 지나간 밭두렁 보며 잠깐 상념에 빠진다. 내가 남자를 만난 것일까. 진구씨를 힐끔 바라보다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든다. 영만이 오빠의 기억은 그만 지워야겠다고 마음 먹을수록 벽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아, 영만이 오빠
영만이 오빠는 초등학교 때부터 땅바닥에 영어 단어를 끄적거릴 정도로 머리가 영민했지만 소아마비 소년의 총기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박한 시골 아이들도 장애소년 앞에서는 무조건 악마로 돌변하는 것이다.
조무래기들은 등하굣길마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놀려대었다.
절룩발이 소리를 수십 번 합창하며 송장에 말뚝 박다가 가끔씩 누이동생 기순이에게는 중국집 장아찌라며 덤으로 싸잡아 돌멩이를 던졌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쫓아가 잡을 방법이 없으므로 영만이는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바닥에 뒹굴며 후엉후엉 울음보를 터뜨리곤 했다.
그런 날은 기순이도 등굣길을 때려치우고 오빠를 따라 그냥 숲속 또랑에서 가재를 잡았다. 그랬다. 학교만 가지 않으면 모든 게 해결되었다. 밀린 기성회비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내질 일도 없고 회초리 맞으며 나머지 공부에 묶일 일도 없다. 다리를 절룩거리거나 얼굴이 까맣더라도 냇물과 들판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또랑 속에 비친 하늘빛처럼 편안한 공간들이 칠판이 되고 선생님이 되고 친구가 되자며 달려온다. 기순이는 고무신 속에 가재나 피라미를 채웠다. 눈물이 마른 영만이도 빤스 바람 자맥질로 바위 아래를 쑤셔 붕어를 잡아내며 아주 잠깐 슬픔을 잊는다.
식구들이 자꾸 숨기려는 것도 문제다. 큰오빠 영식이가 서울 색시를 데려올 때도 그랬다.
공장 생활로 자리를 다진 영식이가 집안 식구들에게 서울 색시를 인사시키기 위해 사립문에 들어섰던 날이다. 노란 양산 여자가 종합선물세트를 끼고 사립문을 들어서자마자 마당 전체가 화사해야 할 텐데, 이상하다, 적막한 그늘이 서리는 것이다. 영만이가 보이지 않는다. 낌새를 챈 영식이가 대뜸.
“영만이 어딨어요?”
“무슨 영만이냐?”
어머니가 짐짓 딴전 피우며 보따리를 받아 마루에 조심조심 올려놓는다. 무궁화가 그려진 선물 보따리가 하나, 포장 박스가 두 개다. 허름한 옴팡집이 금세 환해졌지만.
“내가 색시한테 다 얘기했어. 영만아, 빨리 나와. 제발.”
영식이가 울멍울멍 소리치는 순간 추녀 밑 제비가 푸두덩 날아올랐다. 그제야 뒤란에 숨어있던 영만이가 지팡이를 짚고 해쓱한 표정을 드러낸다. 지팡이가 안마당에 꽂힐 때마다 맨드라미 새순들이 바들바들 대궁을 흔든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며느리 자리에게 흉한 모습 보이면 안 된다며 영만이를 장독 뒤로 숨겨놓은 것이다. 노란 양산 서울 색시는 난감하게 뾰족구두 코빼기만 바라보는데.
“영만이 입히려고 남대문 시장에서 청바지도 사왔는데, 왜?”
영식이 혼자 푸르락푸르락 울분을 삭이는데 나머지 식구들 모두 죄인처럼 고개만 숙일 뿐이다. 김씨조차 ‘네가 흉이 잡혀 장가 못갈까 봐 그랬다’라는 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이제 구순이 이야기를 떠올릴 참이다.
자격증 없이 이빨을 고쳐주는 국동리 ‘야매 치과의사’네 집은 내리 9남매를 두었는데, 첫지와 끝지가 스무 살 차이다. 부인 몽순아지매는 아이만 열두 번 배었는데, 한 명은 유산시켰고, 하나는 다리부터 나와 낳자마자 죽었고 구순이 아래 열 번째 막둥이는 이레만에 죽었다. 어쨌든 형제자매 모두 인물이 훤했는데 특히 맨 아래 구순이가 가장 예뻤다. 눈동자가 호수처럼 출렁거렸고 허벅지가 삶은 달걀처럼 뽀얗다.
영만이 오빠는 구순이를 꼬맹이 때부터 아주 귀여워했다.
날마다 구순이를 데리고 살여울에서 물고기잡이로 시간을 때우기도 했다. 개울가로 ‘풍덩’ 자맥질하여 피라미를 잡아 검바위로 집어던지면 구순이가 박수치며 환하게 웃는 표정이 그리도 행복했단다. 영만이는 구순이의 해맑은 표정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검바위 물속으로 무던히도 알몸을 감췄다. 물고기 잡이에 빠져 귀속에 물이 들어가 귀앓이 고름이 질질 흐르더라도 구순이가 웃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다. 구순이 가슴이 봉곳할 때쯤 그 귀여움의 마음이 설렘으로 바뀐 게 문제다.
그뿐이었다. 짝사랑 소용돌이를 가슴에 꽁꽁 감췄으므로 아무도 상사병의 고통을 눈치 채지 못했다. 결정적 사건은 문풍지로 들어온 사소한 입방아 때문이다. 사춘기 어느 저녁 대밭집 금자가.
“사랑방에서 묵 내기 윷놀이할 때 영만이 오빠를 부르자고 했더니 구순이가 흉하다며 싫다고 했어.”
무심한 돌멩이 한 방에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마음 여린 사춘기 사내는 덜컥 벼랑 끝까지 떨어져 납덩이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오빠가 이상해.”
문간방 고리를 당기면 영만이 혼자 어두운 방구석에서 배를 끌어안고 하얗게 떨고 있다. 그래봤자 아버지 김씨는 절름발이 아들에게 그 흔한 침 한 방 놔줄 심사가 없었다. 그저 침침한 골방에 짐승 먹이 들여놓듯 밥그릇 쟁반만 밀어줬는데 어느 날.
“구순이를 사랑했었어요.”
한 마디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머니는 실성한 듯 틈만 나면 아들내미 묻은 자리로 찾아가더니, 언제부터였나, 그마저 발을 끊으셨단다. 정을 자르는 줄만 알았는데, 술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한 게 문제였고.
그날 밤, 기순이는 생전 처음 생맥주란 걸 마셔보았다.
남자들이 이래서 술을 마시나 보다. 어머니도 이런 기분으로 오빠 생각을 하며 술에 젖었었구나. 창자가 싸-해지면서 닭똥 같은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이다. 500짜리 두 개를 더 시킨 것까지 기억난다. 한 잔만 더 먹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게 끝이다. 나머지 기억은 싸그리 지워졌다. 진구씨가 택시를 불러 태워다 줬다는데 필름이 하얗게 사라진 만큼 사내와 가까워졌다. 필경 내 남자다.
기순이네 아버지 김씨는
집이 없고 땅도 한 뼘 없는 달랑 불알 두 쪽 가장이다.
천수답 서너 마지기마저 외삼촌 소유였으므로 외나무다리 농사를 짓는 것이다. 그가 뿌린 씨앗 여섯 자식 모두 초등학교를 졸업시키자마자 오로지 밥그릇을 줄이기 위하여 바깥으로 내몰았다. 밥은 겨우 먹을 수 있었지만 재산은 십 원도 불어나지 않았다.
여자들은 통과의례처럼 ‘남의집살이’를 거쳤다. 젊은 날에 이혼하고 혼자 사는 외삼촌이 기순이네 자매들에게 밥과 빨래를 통째로 맡긴 것이다. 기숙이 언니나 기옥이 언니가 결혼 살림 밑천을 조건으로 그 집안 치다꺼리를 해주었듯 기순이도 졸업하자마자 식모살이를 자청했지만 결국 일품만 팔고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아버지의 이중 성격도 거시기했다.
산지기 김씨는, 바깥에서는 샌님 같은 남자로 통했지만 자기 집 문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표독한 가장의 권위를 부리기 시작했다. 처가살이 응어리를 집안 식구들에게 고스란히 되갚음으로 뒤집어 씌웠다. 특히 집안 여자들을 몸종 부려먹듯 했고 기순이도 당연히 받아들였다. 갑천댁 역시 순하고 착했던 때는 그렇게 사내의 권위에 다소곳이 당해주는 게 ‘여자의 일생’인 줄 아셨단다. 그 중에서 기순이가 어린 날부터 한이 맺힌 건 ‘집’과 ‘밥상’이었는데.
밥상머리에서 비린 냄새를 참아야 한다는 게 그리도 고역이었다.
꽁치 한 마리 구워먹기 힘들었다. 어쩌다 한 마리 얻게 되면 국물을 내기 위해 조리고 우렸는데, 아궁이 곁불로 간장에 졸인 꽁치 냄새를 맡을 때부터 온몸이 배배꼬였다. 맛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차마 살점을 떼지는 못하고 젓가락 끝으로 살짝 찍어 비린 맛만 느끼려 해도 김씨가 당장.
“계집년이 비린 것만 밝히냐?”
호통이 떨어지는 바람에 움찔 물러서야 했다. 그래서일까. 기순이는 어른이 되면 절대로 먹거리 가지고는 아이들을 힘들게 하지 않겠노라 암팡지게 결심했다. 커가면서 남들 앞에서는 반드시 하하호호 웃는 여자가 되겠노라 마음도 다졌고.
대추나무에 사랑 걸렸네
기순이와 진구 씨네 집은 빠른 걸음으로 40분 거리다.
그네들은 일부러 비포장도로를 골라다니며 느린 걸음으로 도보 데이트를 나누었다. 돈도 아낄 수 있고 마음이 편했다. 버스를 타도 기다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그게 그거라며, 서로 데려다 주고 또 데려다 주는 맞배웅을 하다 보니 동네방네 시나브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가장 신바람 난 사람은 진구씨의 아버지 박주사였다.
석천중학교 ‘학교 아저씨’ 출신이라, 교직원들이 부르는 대로 박주사라고 불리는 그는 만사태평과 자상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착한 가장답게 사랑의 우체통 역할을 착실히 맡아주었던 것이다. 기순이가 주막 ‘사철집’까지 걸어가서 전화기를 돌리면 진구씨가 받지 않고 십중팔구 박주사가 받았는데, 그리도 지성스러울 수가 없었다.
기실 공중전화도 진구씨 덕분에 걸어본 것이지 예전에는 기억이 없다. 공중전화는 5원이고 가겟방 전화는 곱빼기로 10원이다. 10원짜리 다보탑 동전을 돼지 저금통에 넣고 전화기 손잡이를 돌리면 교환수의 목소리가 ‘네-’하고 들리는 게 솜인형처럼 감미롭다. 기순이는 그저 무뚝뚝하게.
“308번유.”
하는데도, ‘네-에’하고 상냥하게 연결시켜준다. ‘따르르르릉’ 사랑을 기다리는 송신 신호까지 그리도 살가운 것이다.
“이예.”
다시 초로의 어른이 긴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다짜고짜.
“죄송하지먼 박진구 씨좀 바꿔 줘유.”
그러면 박주사가 화들짝 떨며.
“아, 니예. 진구야 -. 전화 받아라. 이.”
시아버지 자리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긴장하는 것이다. 진구씨가 협동조합 공판장에서 친구들과 막걸리 추렴 중이면 박주사가 몸소 사오 분 거리 술청까지 찾아와서 기어이 여자 친구의 전화 소식을 알려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진구 씨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 방법이 없었다. 기순이네는 가난해서 전화가 없었으므로 그저 진구씨 혼자 전화벨 소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시집을 오면서부터 처음으로 자기를 찾는 전화를 받아본 셈이다.)
박주사는 ‘야매 의사’ 신재호 씨에게 넌지시 며느리감의 품성을 물어보기도 했다. 막내딸 구순이도 시집을 갔고 사업에 실패해 귀농한 큰아들네 농사를 거들다가 가끔 남의 이빨도 뽑아주면서 부수입을 챙기는 사람인데.
“재호, 김동호는 기실 우리랑 사돈의 팔촌 간인데 그 집 막내딸 꺼멍이 색시랑 우리 아들놈이 연애한댜. 보기에 어뗘?”
신재호씨는 옛날 ‘영만이와 구순이’ 사연도 접어줄 겸 짐짓 넉살스럽게.
“성님, 봉 잡었슈. 그 색신 사막에 갔다 놔도 솜사탕 팔아 열 식구 먹여 살릴 여자여.”
하면, 그 옆에서 몽순 아지매도 곁다리 끼어.
“남극에 던져놔도 아이스케키 장사로 집안 식구 삼겹살 파티 벌여줄 여걸이랑께유.”
부창부수로 맞장구쳤다. 그래서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혼인 날짜를 잡기로 했단다.
기순이가 소녀 시절부터 사내에 대한 바람이 있었다면, 바로 ‘집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남의 집이 아닌 내 집에서 하루라도 자고 싶다. 아버지 같은 안방 꼰대가 아닌 자상한 사내를 만나 구들장 따땃하게 데우고 이불 홑청 함께 펴면서 알콩살콩 살고 싶다는 소망이다. 그 욕심이 이렇게 단박에 이루어지게 만든 사내.
진구씨는 정말 하늘에서 던져준 복덩어리다.
작업장 쉬는 날마다 기순이네 소작농까지 원정 가서 농사일을 거드는데 좌우지간 초꼬슴부터 마무리까지 딱부러졌다. 마을 사람들이 사윗감 나타났다며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쑥스러웠지만 모내기와 추수는 물론 탈곡이 끝난 마당에 빗자루질까지 쌍뚱하게 마감해주는 것이다. 구석이나 구멍에 박힌 낟알까지 죄다 꺼내어 털어주는 막판 뒤처리를 보고 마을 사람들까지 완전히 두 손 들었다. 사내가 느타리버섯이나 배추를 짊어지고 토방에 쌓아놓기도 해서 기순이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행복했더란다. 이제 혼자가 아니므로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 것이다.
너는 이제 내 식구다
마지막으로 신부 자리 집에 첫 인사하러 갔을 때 얘기 한 토막.
그 사이에 기순이는 동갑네 처녀들을 문간방에 주르르 불러 모았다. 아닌 게 아니라 문강방 앞에 옹기종기 놓여있는 여자들 신발이 수상하긴 했다. 하여, 진구씨가 색시네 방 문고리를 잡아당기자마자 웬걸, 막내 여동생 친구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오는 것이다. 남영이, 재옥이, 숙자 같은 망아지 처녀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는 척 시치미 떼며.
“오빠 여기 왜 왔슈?”
“니네야말로 여기 웬 일이셔?”
“기순이가 묘희네 대리점 요구르트로 오빠 꼬셨다메. 얼레꼴레리.”
처녀들이 쨍그랑쨍그랑 유리알 깨지는 소리로 배꼽을 뜯으며 뒤집어진다. 그랬다. 애인 기순이와 막내동생 묘희가 초등학교 동창생이었으니, 학창 시절엔 서먹했던 묘희도 기순이에게 사근사근 대해줬다. 우등생에 새침떼기였던 묘희와 착한 덜렁이 기순이가 그렇게 ‘요구르트로 이어진 시누이 올케’ 사이로 소문났더란다. 빙그레 대리점 시누이는 신접 살림을 차리면 당분간 한솥밥을 먹기로 손가락도 걸었더란다. 친구들이.
“야, 네네 오빠 마누라 잘 얻었다. 기순인 무지 착하고 생활력도 강하잖아.”
추켜세우는 바람에 더욱 바싹 가까워질 수 있었다.
추석날 시댁 자리로 인사하러 갈 때는 일단 민망했다.
칭찬 받을 생김새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시부모 자리 모두가 한복 차림의 기순이를 보자마자 입이 벙글어지는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뱃속에 아이를 실토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때 왜 갑자기 몸이 달았을까.
독립기념관 완공 행사 잔치 무대가 파한 후 또 생맥주를 마셨고 깨진 가로등 아래서 입맞춤을 받을 때 거기서 끝냈어야 했다. 처녀가 애를 배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데……업질러진 물을 후회하며.
“사실은.”
진구씨가 입을 떼려 해서 기순이는 숙인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한다. 그런데 박주사는 아들의 실토를 듣자마자 대뜸.
“벌써 아이가 생겼어. 아따 이젠 너는 진짜 내 식구다. 오늘부터 얘랑 우리 집 안방에서 함께 자라. 우리 늙은이들은 당장 건너 방으로 옮기련다.”
손주 하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반색하더니 당장 안방의 이불들을 문간방으로 옮기는 것이다. 행복하다. 기순이는 죽을 때까지 이 사내 뒤만 촐랑촐랑 따라다니겠노라고 마음 다진다. 박주사네 시골 저녁 밥상 너머로 쟁반 같이 둥근 달이 파안대소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