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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
바람이 좀 불지만 날씨는 여전히 맑은 아침입니다. 7시 반이 되어도 아무도 일어나는 기척이 없네요. 방에 앉아 아들녀석에게 편지를 씁니다. 산에 와서 걷다보니 아들에게 잘못한 게 솔솔 떠오릅니다. 더 늦기 전에 미안하다고 사과해야지..
9시쯤 출발합니다. 밝은 햇살이 탐세르쿠 쪽에서 옵니다. 타메-남체구간은 2년전 아들과 side trip으로 왔던 길이라 낮익습니다.
내려올수록 나무가 높아지고 굵어집니다. 10여일만에 본 남체는 봄볕에 훨씬 따뜻해진 모습입니다. 남체에서 점심을 먹고 계속 하산합니다. 올라오는 트레커 숫자가 열흘전보다 늘었습니다. 또 내일이 장날이라선지 짐꾼들과 당나귀 대열이 줄을 잇는군요.
짐꾼들은 보통 30킬로의 짐을 집니다. 저 앞에 커다란 합판을 5장을 지고 오는 사람이 있네요. 저건 60킬로 정도 나간답니다. 우리들은 한 장도 힘들 것같습니다. 소파를 두 개씩 포개서 짊어지고 오는 젊은이도 있네요.
다시 두드코시 출렁다리를 넘어 2천미터대로 내려옵니다. 밑으로 올수록 초록색이 많아지네요. 몬조의 체크포스트에 들러 복귀신고합니다. 그새 금년1월 방문객수가 691명으로 기록되어 있군요.
벵카에 오후 3시반 도착. 오늘은 여기서 머무를까 망설이는데 까르마란 놈은 은근히 팍딩까지 갔으면 하는 눈치입니다. 자기 친구가 한국인 트레커 모시고 루클라에서 올라와 오늘 팍딩에서 잔답니다. 친구 만나고 싶어하는 거지요. 여기서 팍딩까지는 한시간 정도 더 내려가야 합니다. 그래 가자. 팍딩으로.. 내려간 김에 쭈욱 내려가서 푸욱 쉬자.
팍딩 썬라이즈 롯지에 도착해서 올라올 때 묵었던 102호실로 갑니다.
오, 핫 샤워 !! 열이틀만에 머리를 감느라 비누로만 4번, 그리고 가져간 샴푸로 한번 더 감습니다.
그리고 달밧!! 푸른채소 샐러드에 김치도 있습니다.
뜻밖의 사람을 썬라이즈 롯지에서 만납니다. 홍콩남편과 한국인부인인 부부를 만나서 이런저런 정보를 나누고 있는데 부인이 절 찬찬히 쳐다보더니
“혹시 xx씨세요?”
“네? 맞는데요.. 어? 그럼 혹시 annapurna님?”
이렇게 해서 3패스 오기 직전에 야크존에서 글을 주고받고 따로 이메일까지 주고받았던 안나푸르나님을 딱 만나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2월 중순에 안나님도 3패스할 예정이라고 해서 루크라에 내려가면 야크존에다 소식을 올리려고 맘먹고 있었거든요. 야크존의 online 인연이 히말라야에서 우연한 offline만남으로 이어겼군요.
저는 안나님이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아주 예쁜.. 마치 아가씨같은 젊은 부인이군요. 남편은 ‘난 착한 사람입니다’하고 얼굴에 씌어있는 IT전문가이고 안나님은 전문간호사입니다. 두사람은 현재 호주에서 일하고 있는데 휴가를 내서 3패스를 시도하려고 왔습니다.
문제는 안나님 컨디션이 안좋아 힘들어 한다는 것. 3패스 정보와 함께 고소약 남은 것을 몽땅 주었습니다.
2월 12일
이집 주인의 이름은 나왕이고 금년 43세인데 벌써 손자가 있습니다. 아침부터 9개월된 손자 예뻐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손자의 아빠는 돈벌러 8개월전에 한국으로 떠났답니다. 그의 sunrise lodge는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히말라야 롯지 중 최고의 하나입니다. 방은 넓고 침대는 깨끗하며 화장실도 건물내에 있고 수세식으로 깨끗합니다. 다이닝룸은 따뜻하고 아늑합니다. 무엇보다 라왕의 인상이 포근합니다.
오늘 아침 안나님은 어제보다는 좀 나아보입니다. 새로 포터도 구해서 짐을 좀 가볍게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나님 부부와 사진찍느라 잠깐 마당에 나와 있는데 누가 지나가다 반갑게 인사합니다. 어? 임자체 산행차 추쿵에 머물던 오군이 아닌가? 반갑기도 하지만 참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어제 몬조에서 자고 아침일찍 내려가다 나를 본 것입니다.
안나님 부부의 성공을 빌며 작별인사를 나누고 오군과 함께 내려갑니다.
벌써 꽃이 피기 시작했군요..
우리는 그동안 각자 산행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내려갑니다. 햇빛은 따뜻하고 완연한 봄날씨입니다.
오군은 임자체 등정을 못했답니다. 5천7백-8백미터 정도에서 크레바스가 너무 많아 더 이상 오르는게 위험하다고 가이드가 말해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오르기 직전 텐트에서 먹은 물이 잘못되어 하산길에 복통으로 그만 실신한 것입니다. 가이드 등에 엎혀 간신히 내려와 그대로 뻗었다는군요. 임자체 등정은 못했지만 하루 쉬고 그 다음에 칼라파타르는 다녀왔다니 대단한 친구입니다.
(누군가 한국의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을 새겨놓았군요)
점심 때 루클라에 도착. 히말라야 롯지에 투숙합니다. 여기는 한국인들 포스터로 도배가 되어 있군요. 그런데 주인은 없고 어린 처녀들이 지키고 있는데 서비스가 엉망입니다. 주인이 없으면 다 이 모양입니다.
네팔짱과 통화해서 꽁마라 문제를 이야기하고 포터비는 15일에서 문제의 하루를 뺀 14일치를 지불하기로 합니다. 까르마란 놈은 전화로 카트만두로부터 꾸중을 들어서인지 시무룩해있다가 팁을 받고는 얼굴이 밝아집니다. 팁은 14일치 급료의 15%를 쳐주었습니다. 또 그동안 3패스 넘은 날마다 특별 팁으로 200루피씩 별도로 주었습니다.
하산파티를 위해 락시를 구하러 간 오군이 동네청년들이 있는 선술집을 알아갖고 와서 그리 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루크라 청년들과 어울립니다. 이들은 우리네 70년대와 같이 라면땅같은 것을 락시 안주로 먹습니다. 이 셀파족 청년들은 한국 풍습이 자기네 셀파 풍습과 비슷해서 친근감이 간다고 합니다. 예컨대 어른에게 잔을 올리는 습관이 그렇답니다.
2월 13일
6시40분 기상. 어라? 구름이 쫘악 끼어있고 비도 좀 내린 것 같습니다. 오늘 비행기가 뜨려나 걱정이 되기 시작합니다. 아침을 먹고 활주로 쪽만 쳐다보는데 카트만두에서 비행기가 들어오는 기색이 없습니다.
아가씨 말로는 카트만두에서 들어오는 쪽 계곡의 구름이 걷혀야 비행기가 온답니다. 10시 40분 싸이렌이 울립니다. 이건 카트만두에서 비행기가 이륙했다는 신호입니다. 서둘러 오군과 짐을 챙겨 공항으로 가서 체크인하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30분 쯤 있으니 비행기가 오다가 카트만두로 되돌아갔다는군요. 허탈합니다. 갑자기 구름이 더 많아지고 어두워집니다. 항공사 직원 말로는 12시 반에 한번 더 try할거라고 하지만 자신없는 표정입니다.
아무래도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아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하고 롯지도 파라다이스 롯지로 옮깁니다. 여기는 주인이 있어서인지 다이닝룸도 더 따뜻하고 음식도 히말라야 롯지보다 더 낫습니다. 다만 방 시설은 좀 낡았습니다.
회색빛 하늘아래 무료한 오후를 보냅니다. 상점도 철시하여 을씨년스럽습니다.
비행기가 끊기니 2800미터 교통요지가 아니라 산중오지에 불과합니다.
공항입구 벽에는 루클라-카트만두까지 헬리콥터가 430달러라는 작은 벽보가 붙어 있습니다. 지난 1월에 며칠씩 비행기가 결항되었을 때 붙인 것 같습니다.
저녁은 집에서 가져온 ‘밥에 비벼먹는 오징어(한성기업)’을 달밧에 비벼먹으니 오랜만에 입맛이 돕니다. 밥그릇을 깨끗이 비웠습니다. 오군과 릭샤를 데워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합니다.
2월 14일
일어나자 마자 밖을 보는데 여전히 구름이 골짜기에 가득합니다. 롯지에는 우리말고 말레이시아에서 온 부부가 있습니다. 오늘은 비행기가 뜰 것 같은지 각자에게 물어보니 오군과 부부 모두 뜰 것같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희망하는 쪽으로 예상합니다.
11시가 되어도 오늘은 카트만두에서 비행기가 떴다는 소식조차 안들립니다. 이러다 루클라 주민등록증이 나오게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군이 들어오더니 롯지 사장이 그러는데 카트만두에서 좀 있으면 헬기가 한 대 뜨는데 여기서 카트만두까지 250달러 주면 태워준답니다. 처음엔 안타겠다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내일도 못뜰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엄습해옵니다. 몇주전 1월에 오군이 올 때도 6일이나 결항했다는데... 이 불확실한 상태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오케이합니다. 오군도 같이 가겠답니다.
2시가 되자 아주 작은, 어찌보면 예쁜 장난감같은, 그러나 지금은 너무 작아 불안해보이는 빨간 헬기가 한 대 착륙합니다. 저기에 내 운명을 맡겨? 그래 맡기자.
일단 하늘에 뜨고보니 재미있습니다. 밑에서 보던 것처럼 짙은 구름은 아니고 뿌연 안개입니다. 안개가 걷히면 산자락의 다락밭과 집들이 보입니다. 산을 넘어갈 때는 헬기가 금새 산에 부딪칠 것같아 아슬아슬합니다.
2시 50분 카트만두에 무사착륙. 휴, 살았다..
저녁에는 김센터장과 오군과 정원 레스토랑으로 닭백숙 먹으러 갑니다. 레스토랑 여주인이 닭이 너무 커서 다 드실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오군과 둘이서 깨끗이 해치우고 또 삼겹살까지 주문해서 먹습니다. 소주까지 한잔 하니 비로소 긴장이 풀리네요.
이것으로 3패스는 마감해도 될 것 같습니다.
히말라야... 그 속에 있을 때는 힘든 때도 많았는데 이렇게 다시 나와있으면 자꾸 꿈에 보이고.. 가고싶고.. 하여튼 묘한 곳입니다. 벌써부터 내년엔 어딜 갈까 생각합니다. 임자체? 마나슬루 라운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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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오군입니다^^ 트레킹 후기를 보니 소중한 기억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오군! 개강은 했나요? 체력 보충되었으면 산에 한번 가세나..
팍딩이후 그런 사연이 있었네요. 후기 너무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씨나님 제가 처음에 긴가민가했던 것은 실물이 너무 잘생기시고 키도 너무 크셔서였습니다. ㅋㅋㅋ. 그리고 하이, 오군! 반갑습니다. 쪽지 확인하세요!
한국에 오시면 꼭 연락주세요. Jeff랑 맛있는거 사줄께요..^^
네에~
후기 잘 봤습니다.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네요. 내년에는....
해야님 AC 일정과 숙소 등이 제가 작년 그즈음에 간 여정과 흡사한게 많아 추억에 잠기며 잘 보고 있습니다.
후기를 정신없이 봤습니다.지도를 꺼내놓고 보고 또 봤네요. 금년 5월에 이 코스를 할 예정이기에
제겐 너무 소중한 자료입니다. 몇차례 더 자세하게 봐야겠습니다.
무사히 잘 마쳐셔서 축하드립니다.어느분이 그러셨던가요 3패스학과 졸업장이라고요.
충분한 값어치가 있는 졸업장입니다.잘 정리하여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경의를 드립니다.
도움이 되신다면 다행이겠구요. 5월에 멋진 트레킹 되시기 바랍니다.
눈에 익은 모습들을 보니 또 가고 싶어집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제가 찍은 모습들인데도 저도 또 가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사진, 실감나는 글, 대단한 씨나님의 체력입니다. 내려와서 삼겹살에 소주 한잔,,,,,,,캬 ,, 그 기분도 꽁마라 풍경 감상 못지 않을 것 같네요. 3패스 통과 축하드립니다.
히힛.. 소주가 물같더라구요..^^
아직도 머리한쪽에선 3패스 경치가 떠오르는 회로가 계속 돌아가고 있습니다. 또 가고 싶어요...
3패스 성공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늦었지만 잘 읽었습니다. 다음에 또 갈 기회가 있으면 3패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번 3월 추쿵에 갔을 때 비 오고 안개가 많아 아무 것도 본 게 없었는데, 씨나님 사진 주름치마 모습 장관이군요. 고맙습니다.
3월의 추쿵에 비가 오는군요... 다음엔 꼭 웅장한 모습을 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3패스 트레킹 강추합니다. 천천히 가면 됩니다. ^^
이번가을에 같은코스로 여행예정인데 씨나님의 여행기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모두 스크렙해서 좋은정보 잘쓰고 여행 잘 다녀오겠습니다...
^^
좋은정보 잘보고 갑니다.
참으로 유익한 정보에 감사하고 대단한 정렬과 체력에 박수를 보넵니다 ㅉㅉㅉ
3패스라는 좋은 정보 잘 얻어 갑니다.
수식간에 휙~ 읽을만큼 재미있었습니다. ^^
대단하십니다. 열정과 추진력! 씨나님의 후기를 읽다보니 3 패스의 코스를 꿈꾸게 됩니다
백두대간을 왕복하셨다니 쿰부 3패스 쯤이야?
체력과 열정, 그리고 글솜씨까지 훌륭하시군요!
와, 5년이 지난 지금 댓글을 달아주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