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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한국 명리학의 3대 거목을 자강(自彊) 이석영(李錫暎:1920 ~ 1983),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1903 ~ 1992), 제산(霽山) 박재현(朴宰顯:1935 ~ 2000) 이라고 전술하였다.
이번 장에는 마지막으로 제산 선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제산선생은 실제 『푸른뫼』의 부모가 가족 모두의 사주팔자를 감정 받기도 하였고 감정서를 현재까지도 보관하고 있다. 제산의 학풍을 이어받은 후학들은 많이 산재해 있는데 정암 남용희 선생은 ‘운세누리’라는 온라인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운세누리는 원격상담 코너가 유명하다.)
제산 박재현
빅3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산 박재현을 이야기해 보자. 도계가 담담한 성품의 도학자적 스타일이라면, 제산은 좌충우돌 신출귀몰하는 천재형이었다. 그는 천재적인 두뇌와 아울러 격한 감정을 겸비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충돌하면서 스파크를 남겼다.
우선 제산은 관상부터 비범하였다.
보통사람이 제산의 관상을 보면 별로 잘생긴 얼굴은 아니라고 보지만, 관상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보면 제산의 얼굴은 원숭이형 관상이다. 눈과 눈썹 부분의 모습이 원숭이 같다.
자고로 원숭이형 얼굴을 가진 사람 중에서 천재가 많다.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극락산 자락에 맺혀 있는 을해명당(乙亥明堂)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제산은 과연 비범했다. 몸도 약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얌전해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아이로 보였지만, IQ만큼은 대단했다.
제산이 남긴 일화를 하나 소개해 보자. 1970년대 후반(아마 1978년쯤) 전국적으로 대단한 가뭄이 들었다. 몇 달째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부는 비상이 걸렸고, 해당 부서 장관인 장덕진은 그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대책이란 양수기 수만 대를 외국에서 사오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생각난 인물이 평소 알고 지내던 ‘박도사’였다.
양수기 수만대를 수입하려면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데, 혹시 박도사에게 물어보면 무슨 수가 없을까 해서였다. 당시 계룡산에서 칩거 중이던 제산은 장덕진 장관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보라. 내가 천기를 보니 몇월 며칠에 반드시 비가 오게 되어 있다”는 답을 주었다. 제산의 말을 믿은 장덕진 장관은 가뭄이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양수기 수입을 차일피일 미뤘다. 얼마 후 정말 비가 온다면 양수기 구입하는 데 들어가는 예산을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보름 동안 장덕진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탔다. 정말 비가 올 것인가. 하지만 비가 오기로 예언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는데도 비가 올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기예보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에도 날씨가 맑은 편이었는데, 점심 때가 지날 무렵부터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는 것 아닌가. 오래지 않아 장대 같은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전국적인 가뭄이 해갈된 것은 물론이었다.
제산의 내공이 절정기에 있을 때는 이처럼 언제 비가 올 것인가 하는 천기의 부분까지 꿰뚫는 능력이 있었다.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는 것과 국가적 대사를 예언하는 능력은 차원이 다르다. 언제 비가 올 것이라는 정도까지 적중하다 보니 1970년대 후반부터 제산의 이름은 정치인들이나 고관들 사이에서도 회자되었다. (기을림 3수중 태을을 통달하면 천기를 읽을 수 있다. 옮긴이 주)
1990년대 초반 포항제철의 박태준 회장은 헬기를 타고 제산이 살고 있던 서상까지 제산을 만나러 온 적이 있다. 박회장은 사석에서 박도사를 가리켜 “살아 있는 토정을 보는 것 같다”고 칭찬한 바 있다. 정치인 김복동씨와 김기재씨도 제산과 왕래가 잦았다.
박정희와 박제산, 운명의 여신은 두 사람의 관계를 끝까지 相生의 관계로 놓아두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부산 군수기지사령관 시절 이미 제산의 신통력을 파악했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 유신을 감행할 무렵 제산에게 사람을 보낸다. 이때 박정희의 메신저로 제산을 찾은 사람이 바로 청와대 S비서관이었다고 한다. S비서관은 제산을 찾아와 ‘維新’의 앞날에 대해 점괘를 물어 보았다. S비서관과 이야기를 나누던 제산은 담뱃갑에 ‘幽神’이라고 볼펜으로 끄적거렸다. 維新이 幽神, 즉 ‘저승의 귀신’이 된다는 무서운 예언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난 얼마 후 건장한 기관원들이 제산을 잡으러 왔다. 제산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가 며칠 동안 죽도록 얻어 맞았다.
제산은 31세이던 1965년에서 36세이던 71년까지 해인사에 머물렀다.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이 기간에 일어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살인사건이란 바로 20대 중반의 처녀가 해인사 경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늦가을 이른 아침 장경각 밑에서 낙엽을 청소하는데 낙엽 밑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사찰 경내에서 처녀 시체가 발견되자 해인사는 발칵 뒤집혔다.
범인은 누구인가. 관할 합천경찰서에서는 매일 해인사 스님들을 한 명씩 경찰서로 호출하여 알리바이를 심문했다. 매일 돌아가면서 스님들이 합천경찰서로 출두해야 하는 상황이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다. 범인이 나타나지 않으니 계속해서 스님들을 취조할 수밖에. 이러다 보니 해인사의 청정한 수행 가풍이 잘못하면 망가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하지만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애가 타는 상황에서 홀연히 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자청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제산이었다. 뒷방 요사채에서 밥이나 축내던 처사가 사건을 해결해 주겠다고 자청해 나섰던 것이다. 제산은 “이 사건은 오직 나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동안 축적되었던 냉대의 설움을 한 순간에 만회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는 선언이었다. “내가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단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아무개 총무 스님이 가사장삼을 입고 공손하게 큰절을 3번 해야 한다.
총무 스님이 3배를 하고 난 후 지필묵을 나에게 바치면 그 붓으로 사건의 해결책을 써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총무 스님의 삼배를 요구한 이유는 당시 해인사 총무를 맡았던 아무개 스님이 평소 제산을 천대했기 때문이었다. 해인사 측에서는 달리 해결 방도가 없었으므로 오만방자한 이 처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산이 정식으로 총무스님의 3배를 받고 난 후 붓으로 써준 글씨는 다음과 같다. ‘일목탱천 목자지행’(一木撑天 木子之行). 탱(撑)자는 ‘버팀목 탱’자다. 해석하면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하는데, 목자(木子) 즉, 이(李)씨의 소행’이라는 뜻이었다.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지탱한다는 의미는 바로 목수를 지칭한다. 목수는 나무 기둥을 세워 천장을 지탱하는 업종에 해당한다. 그 목수 중에서도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범인이라는 뜻이었다.
목수를 찾아보니 사건 한달 전에 대웅전 보수공사를 하느라 목수들이 해인사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공사가 끝난 후 목수들은 모두 흩어졌는데, 그 목수들 가운데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을 수소문 해본 결과 이씨 성을 가진 젊은 목수를 찾아 살인을 자백받았다. 죽은 처녀는 목수와 사귀던 여자였고, 변심할 기미를 보이자 해인사로 찾아온 애인을 그만 충동적으로 살해했던 것이다.
이 일로 해서 제산의 명성은 경상도 일대에 널리 퍼졌다. ‘해인사에 천출귀재’(天出鬼才,하늘이 내린 귀신 같은 인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제산을 만나기 위해 많은 인파가 해인사로 몰려왔다.
그러던 어느날 50대 중반의 남자가 제산을 만나러 왔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자신을 부산 자갈치시장의 갈치장수라고 소개한 남루한 행색의 그 남자는 제산에게 다른 사람의 사주팔자를 물었다. 자신은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심부름을 왔으니 그 권 아무개의 사주를 봐 달라고 하였다. 권 아무개라는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들여다보던 제산은 갑자기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보아하니 여기 써 있는 권 아무개가 바로 너구나! 네가 권 아무개지? 너는 대구검찰청에 있는 검사장이지? 나를 떠보려고 변장하고 왔구나. 네 놈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와서 갈치장사를 한다고 하면 내가 속을 줄 알았나? 네 이놈,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나를 시험하느냐!” 하면서 내리 호통을 쳤다.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벌겋게 달아오른 권 아무개 검사장은 망신만 당하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산은 격한 감정의 소유자라서 자신의 비위에 안 맞으면 직설적인 육두문자로 감정을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렇지만 뒤끝은 전혀 없었다.
권 아무개 검사장은 제산의 신통력을 혹독하게 체험하고 나서 평소 친분이 있던 삼성의 이병철 회장에게 해인사 갔다 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제산은 한국 최고의 재벌 회장인 이병철 회장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병철과 제산. 당대 그 분야 최고수의 만남이었다. 사판(事判)의 대가이면서 남달리 이판(理判)에도 관심이 깊었던 이회장은 젊은 제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일반에서는 삼성의 각종 인사, 특히 중역급 이상의 고위 인사에 알게 모르게 제산이 많이 관여했던 것으로 회자된다. 다른 재벌 그룹에 비해 삼성맨 가운데 유달리 배신자가 적다는 항간의 이야기는 인사를 채용할 때 이판(理判)과 사판(事判) 양쪽으로 치밀하게 검토한 이회장의 심모원려(深謀遠慮)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러한 이판 참모 가운데 하나가 제산이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 무렵 이회장이 제산에게 부산에 있는 5층짜리 빌딩을 사준 것은 사실이다. 물질 가는 데 마음 간다고 5층짜리 빌딩을 사줄 정도로 이회장은 제산을 높이 평가하였고, 그만큼 후하게 대접했던 것 같다.
해인사를 내려온 이후인 1970년대 초반부터 제산은 주로 부산에서 자리잡고 활동했던 관계로 부산 사람들은 박도사(제산)의 명성을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한 사람은 박도사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 한두 가지쯤은 알고 있는 편이다. 복채는 평균 20만원 정도 받았다. 서민이 20만원이고 정치인은 200만~300만원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에 20만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다.
일반 서민은 부담을 느낄 만한 액수였다. 하지만 효과(?)에 비하면 그 정도 액수는 싸다고 여겼기 때문에 박도사의 집은 항상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몸이 약했던 박도사는 하루에 상담해 주는 사람을 15명 이내로 정했다. 그 이상은 사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 보면 알지만 남의 인생사를 들어주고 상담해 주는 일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지금도 부산 사람들은 옛날에 박도사가 풀어준 사주 간명지를 농 밑에 넣어 놓고 한번씩 꺼내 본다고 한다.
▲ 만세력은 사주팔자를 보려면 꼭 필요한 달력이다. 생년, 월, 일, 시를 육십갑자로 표시하였다.
<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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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한 분이셨던것 갔네요....지금 살아 게시면 함 찿아가 보고 싶은걸요...ㅎㅎ
제산선생은 제자를 양성하지 않은 분으로도 유명합니다. 그 이유는 어렵게 공부하여 통달한 학문을 쉽게 남에게 전수하기 싫어했던 평소의 제산선생의 성품이었다고 할수있죠. 그러나 그의 제자로 자처하는 술사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으나 진위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