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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2월은 내게 한가한 시간이다. 가장 불안한 시간이기도 하고...
새로운 계획이 머리속에만 있고 계속 재고만 있는 내 모습이 답답하고 뭔가 에너지가 필요해서 지리산 종주산행을 아주 충동적으로 기습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
산장을 예약했을 때즈음은 봄이 곧 오겠구나 하던 때였는데 갑자기 추워지더니 대설주의보로 모든 국립공원 입산이 통제되었다. 2월 15일부터는 산불경방기간이 시작되어 지리산 종주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전에 가고 싶은데 아, 이번에도 못가는건가.
11일에 노고단대피소, 12일 벽소령대피소, 13일 장터목대피소를 예약해놨던 것을 모두 취소하고(3일 전에 취소해야 위약금이 없기에) 7일부터 시간 날때마다 실시간 지리산국립공원 통제상황을 확인하였다.
8일 아침에도, 저녁에도 풀릴 생각이 없어보였는데 9일 오전에 확인해보니 노고단, 연하천 산행구간을 제외하고 다른 구간의 통제가 풀려 있었다. 성삼재에서부터 시작하는 종주는 포기하기로 하고 벽소령에서부터 천왕봉으로 일정을 수정하게 되었다. 연하천에서 벽소령구간은 산행기를 쓰고 있는 아직까지도 통제가 풀리지 않으니 도대체 얼마나 러셀이 어렵길래 내내 막아놓는 것일까 지도의 등고선을 들여다보아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음정마을에서 연하천대피소로 올라가야 종주거리가 느는데 아쉬웠다.
겨울철이고 통제 직후라 대피소 이용객이 거의 없을 것이므로 천천히 예약해도 되겠구나. 대피소 예약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코스로 오르고 내가 어디까지 하루에 걸을 수 있을지 신중하게 코스와 교통편을 확인에 확인을 한다.
결국 연하천대피소를 이용할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한 10일에야 벽소령을 예약하고 함양행 시외버스를 끊었다. 벽소령 이후 세석에서 잘지 장터목에서 잘지 결정은 벽소령에 가서 정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10일은 정말 바빴다. 개인적인 일정이 두 군데 있어서 볼일 보고 나서 마트를 세 군데나 들러 산행 행동식을 준비하였으며 혼자 지낼 남편을 생각해서 찰밥과 반찬 등을 만들어두고 나서야 산행배낭을 쌀 수 있었다.
산에서 먹을 요량으로 미리 지어놓은 밥을 소분해서 4덩어리로 싸놓고
산에 가면 하루쯤은 고기를 구워야 한다는 불변의진리로 약간의 목살을 챙겨놓고
1인분의 라면을 끓일 수도 있고 고기도 구울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의 후라이팬과 넉넉한 용량의 개스, 점화기, 버너, 약간의 김치와 쌈장을 챙겼다.
청소년위원회 김경률위원께서 하사해주신 나무수저, 씨에라컵1,씨에라밥그릇2,보온력이 우수한 스탠리보온병, 물2L 2개, 헤드랜턴과 AAA건전지6개, 휴지&물티슈, 세면도구와 스포츠타올, 얇은침낭, 각종 의류(보온우모바지, 여벌양말2set, 보온점퍼, 겨울용방풍쟈켓, 여벌티셔츠, 경량우모점퍼), 젯보일, 다량의 행동식(빵류, 연양갱, 에너지바, 사탕류), 고글, 산길샘용공기계핸폰, 보조배터리, 핫팩3ea, 스프레이형파스, 신분증, 신용카드, 털모자, 겨울용바라클라바
준비하니 이 정도. 60L배낭에 넣어보는데 배낭을 잘 꾸렸는데도 배낭헤드가 꼭대기까지 올라온다. 과연 이걸 매고 산길을 걸을 수 있을까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한다. 오랜만에 종주산행을 준비하다보니 예전 생각으로만 짐을 쌌구나. 한창 때 산에 다니던 내가 아니라는 걸 미처 자각하지 못했달까. 20kg는 안넘은 것 같고 17, 8kg 된 것 같았다.
2월 11일(화)
근 십년만에 신어보는 라스포르티바 빙벽화. 통제가 풀리자마자 올라가는 것이니 눈이 엄청 많이 쌓였을터라 일반 등산화 말고 발이 푹푹 빠져도 부담이 없는 빙벽화를 선택했다. 눈이 없는 아래쪽 산길은 일반 등산화로 갈아신을 생각으로 싸가려 했는데 생각보다 배낭이 무거웠기에 포기했다.
빙벽화 끈을 짱짱하게 발목까지 조여매고 일어선 다음 배낭의 양 어깨끈을 한 손에 하나씩 잡아 들곤 무릎을 굽혀 그 위에 팍 얹는다. 몸을 반 돌려서 한 쪽 배낭끈에 어깨를 집어넣고 무릎을 폄과 동시에 배낭을 튕겨 허리와 등에 배낭을 받치고 나머지 다른 쪽 배낭끈에 반대쪽 어깨를 넣는다. 무거운 배낭을 혼자 힘으로 매는 요령이다.
햐~ 오랜만에 이 동작을 해보는구나.
집을 나서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데 고개를 완전히 들 수가 없네.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려고 하면 뒷통수에 닿는 배낭 느낌이 무슨 장벽같다. 모험을 시작해볼까 라며 나선 이 길이 혹시 개고생의 시작일까...? 잡생각이 시작된다. 할 수 있을까?
출근시간대에 버스를 타야 한다는게 문제다. 큰 배낭 때문에 민폐끼칠 생각을 하니 엄청 부담스러웠는데 다행히도 버스가 매우 매우 한가했다. 너무 다행.
오전 9시 10분에 딱맞춰 복합터미널에 도착했다. 예매한 내용을 종이티켓으로 발권받고 버스에 탔다. 지리산에 간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므로 설레임 따위도 없었다. 잠이 온다.
한참을 가다 눈을 뜨니 출발한지 한 시간. 함양까지 1시간 20분 걸린다던데 창밖을 보니 멀리 햇빛에 빛나는 흰 산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 능선자락이 이렇게 멋지구나. 외국산이 최고네 멋지네 해도 우리 산의 능선미를 알아보는 사람은 알 것이다. 마음이 울렁인다.
함양IC를 지날 때 도로를 따라 버스가 도니 산자락이 더욱 잘 보인다. 꼭대기는 더 짙은 흰색이다. 계획한 3일이 순삭이겠구나.
함양은 처음 가보는 곳으로 이제야 설렌다. 내린 시간 10시 30분. 함양시외터미널에서 밖으로 나갈 필요없이 그 자리에서 음정행 티켓을 끊고 타면 된다. 버스내에서 교통카드를 찍어도 되고 여기서 표를 사도 된다고 하셔서 안전빵으로 표를 샀다. 미리 알아온대로 음정행 버스는 11시 출발.
마음이 놓이고 신이 난다. 버스 앞에서 폼 잡고 셀카도 한번 찍어보고...
11시 정각에 출발한 음정행 버스는 생각보다 쭉쭉 달린다. 어느새 함양을 지나 남원으로 들어서는데 음정마을은 함양이지만 남원의 끄트머리 경계와 인접해있어 버스는 남원쪽을 밟았다가 함양으로 갔다가 그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열심히 눈에 담는다. 달리는 버스를 따라 나란히 흐르는 덕전천이 햇살에 반짝반짝하고 너무나 깨끗해보여 구경하는 기분이 난다.
겨울내내 먹고 자고 살을 찌운 건 다 오늘을 위한 큰 그림이었을까. 다 빼고 버리고 와야지. 모험을 시작해보아요. 출발하기 전엔 약간의 염려와 주변의 걱정으로 이럴까 저럴까 생각이 많았지만 역시 한발짝 내딛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야. 계획했으면 하는 거다.
12시 음정정류소 도착.
스틱 조정하고 산길샘 앱의 내위치를 켜고 출발준비를 한다. 시작부터 길은 음정마을의 급경사 오르막. 경사가 매우 쎈 임도 오르막을 천천히 걷는데 급경사진 계곡에 웬 집들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다. 택배도 오지 못할 곳으로 보이는데 예쁜 집을 짓고 지리산에 기대어 사시는 분들이 궁금했다.
임도길이 걷기 좋지만 너무 길면 지루한데 눈이 많아 덕을 보는 것도 같다. 걸어들어갈수록 눈이 많고 차량을 이용하여 러셀된 두 길은 어느새 한쪽 타이어길만 남아 외길이다.
러셀된 이 길을 따라 앞서 들어간 분들은 등산객일까 국립공원 직원일까, 오늘 난 발자국일까 어제 혹은 그제 난 발자국일까.
14시 25분 연하천삼거리 도착. 배낭 무게 때문에 걷는 것이 힘들어 1,000걸음마다 쉬었다. 그러다보니 대략 0.5km 정도씩 줄어들더라. 1,000걸음에 500m.
샤베트눈이라 속도가 나지 않고 배낭이 무거워 힘들었지만 오랜만에 찾은 만큼 즐겁게 기분좋게 가자 긍정적인 다짐이 저절로 들었다.
연하천삼거리 이후부터는 많이 힘들었다. 경사가 세지기도 했고 눈길이 안좋아서 중심 잃고 잘못 딛으면 종아리까지 푹 들어갔다. 러셀된 곳 아닌 다른 곳을 딛으면 100% 발이 깊숙하게 빠졌다.
1,000걸음 마다 쉬던 것을 500걸음으로 줄인다. 어디서 북소리가 나나 했더니 내 심장소리였다. 맥박이 미친듯이 뛴다.
드디어 벽소령대피소 300m 전. 임도길을 버리고 오른쪽 산길로 진입해야 한다. 300m 라니 드디어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보다 산길이 왜 이렇게 빡쎄보이나 하는 마음이 더 앞섰다. 먹은 게 없어서 기력도 없고.. 등산의 첫 날을 임도로 오른 게 다행이다 싶다. 마음을 다잡고 산길로 들어선다.
경사면을 스틱으로 누르고 양손 동시에 밀며 몸을 추진하는데 40걸음을 넘지 못하고 지쳐서 숨을 고른다. 경사가 쎄니 준비되지 않은 허벅지와 허리가 아주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고개를 들면 안부가 코앞인데 숨고르느라고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다시 40걸음만 더 가자 숫자를 세며 오르고 스틱으로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앞으로 전진시킨다. 기합소리가 절로 난다. 또 제자리에 서서 숨고르고 다시 40걸음.
끙끙 소리내며 안부 위로 올라서니 공단직원분이 서 있어 반가웠다. 겨울에 워낙 산객이 없으니 반가워서 여기 서서 환영해주시는건가 했는데 곧 헬기가 오니 얼른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하신다.
오후 4시 벽소령대피소 도착.
44번을 배정받아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다. 따뜻해서 좋았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는다. 바닥의 전기온도를 올리고 짐을 정리하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나오니 다른 등산팀이 대피소 안으로 들어오려고 앉아서 신발을 벗고 계시다.
미소로 인사를 나누는데 나와 같은 길인 음정에서부터 내 뒤로 올라오신거였다. 안 그래도 올라오면서 혹시 내 뒤에 다른 팀이 올라오는가 싶어 뒤를 돌아 멀리 시선을 두기도 했지만 '에이 누가 올라오기엔 시간이 늦지' 싶어 그 생각을 접었는데 1시간 떨어진 거리에서 같은 길로 올라오셨다고 하니 너무 반가웠다. 또 방금 걸어올라간 내 발자국을 알아보았다고도 하셔서 지루한 임도길을 러셀자국만 쳐다보며 걸어온 나와 같은 마음이셨구나 동병상련을 느낀다.
천주교를 잘 몰라서 이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프란체스카 등산동호회라고 하셨던 것 같다. 남자분이신 신부님과 수사님, 여자분이신 신도님들 세 분 이렇게 다섯 분이 오셨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기로 하고 취사장에 취사도구와 식재료를 놓고 나오는데 '음주금지'라는 안내문과 CCTV가 보인다. 옛날에 지리산 다닐 적 생각만으로 아주 당연히 지리산에서 한 잔이 가능할 줄 알고 200ml 팩소주를 한 개 가져왔더만 아유... 예전에는 장거리 종주산행 하고 삼겹살에 소주 정도는 너무 당연한 거였어서 어찌나 서운하던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첫날 먹으려고 소량으로 준비한 목살을 대충 대충 구워서 먹었는데 별로 맛이 없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벽소령대피소 앞마당에 가만히 섰다. 밤이 푸를 정도로 밝아 벽소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던데. 1,300m 고지대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고요하다. 바람소리도 없고 짐승소리도 없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더라. 보름인 줄 모르고 하늘의 별만 열심히 들여다보다 들어왔다.
2월 12일(수)
오전 5시 20분 기상. 밤새 대피소를 밀어뜨릴 기세로 강풍이 불어대더니 바람만 불어댄게 아니라 눈도 같이 내렸었나보다. 화장실 다녀오면서 보니 어제의 발자국이 새로 내린 눈으로 다 사라졌다. 밤새 족히 15cm 는 온 것 같다. 국립공원 홈페이지로 확인하니 지리산의 극히 일부(성삼재-노고단) 구간을 제외하고 전 구간이 다시 통제되었다. 초당 풍속 12m!
아침 7시에 대피소 직원분들의 업무가 시작된다니 오늘 일정은 그때나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전 7시 5분
공단 직원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점으로 가서 창문을 두드려 직원분께 문의했던 것인데 기본적으로 비상상황인데 왜 직원분들이 먼저 상황공지를 해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여하간 통제가 언제 풀릴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음정마을로 하산할 분은 자유롭게 하산하란다. 그리고 벽소령에서 다른 구간으로 이동은 현재는 불가한데 현장결제를 통해 대피소에 더 머무를 수는 있다고 한다. 난 대피소에서 최대 이틀은 더 버틸 생각으로 남기로 했다. 천주교팀 다섯분과 혼자 오신 남자분 한 분 그리고 나 이렇게 총 7명이 있었는데 혼자 오신 남자분은 13일 아침까지 기다릴 꺼라고 했다. 그때에도 통제가 풀리지 않으면 대학생 딸 졸업식 때문에 내려가셔야 한다고 했고 천주교 팀도 일단 하루는 더 있어보고 이후 일정을 계획해보시겠다고. 난 최악의 상황으로 14일 오전에야 통제가 풀린다면 부지런히 걸어서 장터목으로 가야겠다 그렇게 해서 천왕봉 찍고 하산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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