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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그분'의 사랑 ....
하느님은 아무리 작은 소리로 이야기해도/ 우리 가까이 계시므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십니다./ 하느님을 찾기 위해서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혼자 머물러/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무나 위대하신 분 앞에서/ 낯선 사람처럼 느낄 필요가 없습니 다./ 우리는 하느님께 겸손하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처럼/ 하느님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하나 이야기 하고/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되도록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사
* * * * 아참! 에어 프랑스가 어제부터 파업인지라 로마에 하루 더 있으며 라테라노 성당을 둘러본 다음 떠나 기로 하지요.
교황님은 전 세계 가톨릭의 어른이시기도 하지만 로마대교구의 교구장님 이시기도 해요. 교구에는 어디나 주교좌성당이 있잖아요? 로마교구의 주교좌성당을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으로 아시는 분이 많을 건데, 아니에요. 오늘 이야기를 펼칠 라테라노, 성 요한 성당이 주교좌 성당이랍니다. 상식 하나 보너스로 드린 겁니다. 아셨지요!
오늘은 풋치니와 그 유명한 토스카의 무대가 되었던 "거룩한 천사들의 성(城)"과 라테라노 언덕에 자리한 로마교구 주교좌성당인 "성 요한 대성당"을 둘러 본 감상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사실, 순례를 마음먹고서 제일 먼저 떠올렸던 곳은 "거룩한 계단성당"이었답니다. 그래서 로마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이자 교황좌가 있는 "라테라노 대성당" 일명 성 요한 대성당(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을 찾아 나설 수 밖에....
1304년 클레멘스 5세가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아비뇽 유수)으로 옮겨 가기 전 까지 전 세계 가톨 릭의 본부이며 상징인 교황청이 자리했던 곳은 바로 라테라노 궁입니다. 옆에 자리한 라테라노 대성 전은 기독교를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황제가 313 년 멜키아데스 교황에게 봉헌한 라테라노 언덕에 세워졌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공인 되면서 지상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교회가 되겠구먼요. 바티칸의 성 베 드로 성당(개축 공사하기 전) 보다 12 년이나 앞선 이 성당은 원래는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봉헌되었답니다.
그 후, 대 그레고리오 교황 때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되어 "라테라노의 성 요한 대성당"으로 불리어 오다가 16 세기에 대수리를 마친 후 다시 사도 요한에게 봉헌되어 이제는 "라테라노의 두 성 요한 대 성당"으로도 부르고 있으나 공식적인 명칭은 "구원자 하느님의 대성당(Archibasilica Sancitissimi Salvatoris et Sancti Iohannes Baptista et Erangelista in Laterano)"이라 하지요. (혹시 제가 라틴어에 박식한가 의혹을 가질까 싶어 미리 밝혀둡니다. 읽는 거 정도, 하지만 눈에 익혀 두시면 실제 로마에 가서 아~ 하고 쉽게 접하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라테라노 성전은 로마의 4대 성당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성당이자 첫째가는 지위로 우러러 보지요.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대성전도 예외는 아닙니다)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정면에는 구세주 그리스도“Christo Salvatore”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총대주교좌 성당을 대표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 그리스도께 봉헌되었습니다. 대성전은 바티칸 시국 영토 밖 , 이 성을 바라보며 오른 편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의 어머니 헤레나 모후가 거처하던 연한 주황색 벽돌이 특이한 라테라노 궁과 조화를 이루고 서 있습니다. 나중에는 교황님의 궁전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곳이지요.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 볼까요.
성전 내부 양 편에 바로크양식의 원주가 제단까지 도열하여 서 있습니다. 이 원주와 원주사이의 벽면에는 베르니니와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12사도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흡사 제단 위에 자리한 교황좌 (Cathedra Romana)를 호위하는 모습이더이다. 도열한 원주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 제단을 교황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는 "교황의 제단"(중앙 대제단)이라고 하지요. 검소하지만 품위가 느껴지는 큰 의자(교황좌)가 홀로 자리한 제단 위에는 고딕양식의 발다키노(천개)가 웅장한 자태로 솟아올랐는데, 여기에는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의 흉상이 있고, 이 흉상 안에는 두 성인의 두개골이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두 분의 유골만 보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되었다는 삼나무 탁자와 카타콤베에서 가져온 많은 유물도 보존하고 있지요.
베드로 대성전의 압도하는 화려함보다 라테라노 성당의 근엄한 모습이 순례자를 편하게 합니다.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으뜸인 교회"라 일컫는 이곳에는 라테라노 공의회가 다섯 차례 열렸고, 교황청과 뭇솔리니의 이탈리아정부와 종교협약, 일명 라테라노 조약(교황청의 재산인정과 바티칸 시국을 공인하여 이탈리아와 알력관계에 있던 교황청과 관계개선을 이룸)을 맺은 유서 깊은 곳이랍니다. 대성전에 들어오는 입구에는 커다란 청동 조각,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 수도원)를 교황님께 공인 받으러 온 프란치스코 성인과 수사님들의 모습이 실물 크기보다 훨씬 크게 조각되어 있어 아씨시의 감동이 다시금 일어났습니다.
대 성전을 바라보며 오른편으로 꺾인 곳에 자리한 "거룩한 계단 성당(la Chiesa di Scala Santa)"을 바라보는 순간, 그토록 기다려온 님을 대하듯 가슴이 울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의 빌라도 총독이 재판했던(헤로데 궁전 또는 안토니오 요새)의 대리석 계단을 가져다 놓은 거룩한 계단(scala santa)성당이 반겨 줍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재판 받으러 나아가실 때 한 걸음 한 걸음 힘든 걸음을 떼어 놓은 계단입니다. 아직도 몇 군데에는 예수님께서 흘리셨던 핏자국이 남아 있어요.
세계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이 무릎걸음으로 기도하며 올라 가다가 핏자국이 보전되어 있는 곳에 입맞춤을 하지요, 뜨거운 가슴으로... 요즈음은 대리석 계단을 보호하기 위해 대리석 계단 위에 나무 계단을 깔았답니다. 물론 대리석 계단을 생생하게 볼 수 있구요. 나무 계단을 깐 이유는 그 아래 있는 귀중한 돌계단을 잘 보존할 수 있을 뿐 더러 돌계단에 얼룩져 있는 "그분"의 핏자국도 생생하게 볼 수 있게 배려한 것이지요.
어처구니없이 빌라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셨던 "그분"의 수난을 생각하며 묵주기도를 바치며 무릎 걸음으로 28계단을 올라가는 순례자들 틈에 끼었던 첫 번째 로마 방문을 생각해 봅니다. 맙소사, 아무리 무릎 꿇는 일이 드문 요즈음 생활이지만 첫 번째 계단에서 묵주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무릎이 깨어지는 아픔에 비명을 지를 뻔 했지요. 이건 대단한 체험이었습니다. 첫 번째 계단, 그것도 주님의 기도조차 채 끝내지도 못한 짧은 시간인데 결국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 설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내 보잘 것 없는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며 부끄러움만이 물밀듯이 아려 오던 첫 방문 이후, 이곳에 왜 그리 오고 싶었을까요? 지금 나는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주님께 부끄럽지 않게 나설 수 있다고, 뻔뻔스럽게 나서려는 것은 아닙니다.
감히 말씀 드린다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어쩌지 못하는 ‘그분’께로 향하는 그리움이 나를 이끌어 온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내 그리움에 반해 "거룩한 계단 성당"은 오후 4시부터 문을 연다는 사실에 맥이 빠졌지만 한편으로는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니까요. 또 한 번의 시험이 부담이 되어서 말입니다만, 돌아서는 나는 그리움이 무산되어버려 허탈했고 못내 씁쓸해졌습니다.
요한 성당을 뒤로하고 로마를 세로로 지르는 테베레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천사들의 석상이 늘어 서있는 "천사들의 다리"가 참 아름답습니다. 천사들의 다리 아래로 테베레 강이 조용히 흘러가는 구조입니다. 천사들의 다리 너머 원통형의 고색창연한 “거룩한 천사의 성“을 마주하면, 아~! 하고 말을 잇지 못하지요.
130년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세운 정방형의 기단 위에 세워진 웅장한 원통 형의 단층 탑으로 이 탑의 외부 벽은 도리아식 기둥과 대리석상입니다. 그 정상에는 원래 영묘(가족 묘)로 쓰던 하드리아누스황제가 사륜마차를 끄는 위엄에 찬 모습의 청동상이 꼭대기에 자리했답니다. 그후 6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시대에 오늘에 보듯 긴 칼을 칼집에 다시 꽂는 대천사 미카엘상으로 바꾸어 세웠습니다.("주님께서 천사에게 분부하시어 칼을 칼집에 도로 넣게 하셨다"역대기 상, 21장 27절. 유대인에게 흑사병을 보낸 하느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시는 장면)
이제 테베레 강을 건너 위용을 자랑하는 산타젤로성(개신교 신자들은 미국식으로 부르지요.) 이야기를 할까합니다. '거룩한 천사의 성(Castel Sant' Angelo)'이 맨 처음부터 그렇게 불려진 것은 아니었답니다. 맨 처음에는 하드리아누스황제의 영묘로, 또는 침략자로 부터 로마를 지켜내던 요새의 역할을 하던 이곳은, 1300년 보니파키우스8세 교황이 처음으로 대희년을 선포하면서 로마가톨릭 교회의 궁극적인 순례지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로마를 찾아온 순례자들의 행렬 속에 유명한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신곡의 저자 단테. 당시 35세의 젊은 나이에 피렌체의 최고 통치자의 자리에 올랐던 단테는 대 희년의 행렬을 신곡의 지옥편 제18곡에 기록해, 살아 있을 때 유혹에 넘어가 지옥의 형벌을 받은 자들이 벌거벗은 채 천사의 다리를 건너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1300년에 로마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 올린다. 거룩한 천사의 다리를 건너 성 베드로 성당으로 걸어가던 순례자 행렬이다. "이것은 마치 희년에 군중이 너무 많아/ 로마 사람들이 그들을 다리 위로/ 지나가도록 배려했기 에.....// 한쪽에는 모두가 이마를 성 쪽으로 돌려/ 성 베드로 성당으로 가고/ 다른 쪽에는 산 쪽으로 가는 것과 같았다"
천사의 다리는 고된 여정을 거쳐 바티칸을 찾은 순례객이나 여행객을 환영하는 적극적인 시각 장치였습니다. 베르니니는 환상적인 천사 조각상으로 바티칸에 막 들어선 이들에게 당신은 이제 천국의 세계에 들어왔음을 축복하려던 겁니다.
그렇다면 로마 황제의 무덤이 왜 천사의 성으로 바뀌게 된 걸까요?
590년 유럽을 휩쓸던 페스트로부터 로마를 구해내기 위해 성모자상이 그려진 성화를 들고 신자들과 시내를 행진하며 기도를 하던 그래고리우스 교황은 영묘 꼭대기에 서서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 있던 천사의 모습을 봅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내리셨다는 징표지요. 유럽을 휩쓸던 폐스트는 종식되었습니다. 교황은 사륜마차를 끌던 용맹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동상을 내리고 천사의 모습을 조각해 성의 꼭대기에 세운 이후 성 안젤로, 거룩한 천사들의 성(castel sant' Angelo)으로 불러오게 되었답니다.
순례란 꼭 교회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지요.
특히 유럽의 성지는 교회가 낳은 숱한 이야기를 문학이나 음악, 또는 조각으로 담아낸 예술가들의 작품을 대면하는 재미가 굉장하지요. 사실 유럽의 예술은 교회를 빼고 이야기할 순 없잖아요. 이곳은 이태리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자코모 풋치니의 그 유명한 오폐라 "토스카"의 무대였던 "성 안젤로성"이 아닌가요?
나폴레옹 군대가 이태리와 오스트리아 왕국의 연합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던 시대, 온 유럽의 지식인들, 공화주의자들은 나폴레옹한테서 희망을 보면서 환호합니다. 그렇지만 민중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하지요. 베토벤은 나폴레옹에게 교향곡 "영웅"을 헌정하려다 찢어버립니다. 나폴레옹한테서 민중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펼쳐지리라 기대한 베토벤의 실망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토스카는 민중들의 힘으로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정부를 세우려던 급진적 혁명의 불길이 온 유럽 땅에 타오르던 시절의 이야기이지요. 새 시대의 도래를 꿈꾸던 젊은 화가 카바라도시와 사랑을 가꾸던 토스카의 기구한 사랑을 그린 오폐라 "토스카"의 클라이막스. 성 안젤로성, 혁명아 카바라도시가 사형당하는 새벽입니다. 카바라도시는 연인 토스카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먼동이 트는 로마의 하늘을 배경으로 그 유명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을 격정적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총살형에 쓰러지고 맙니다. 이어 나타난 토스카는 연인의 죽음 앞에 절망을 하고 성 위에서 테베레 강으로 뛰어내려 자살을 감행합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슬프디 슬픈 젊은이의 사랑을 그린 "토스카"가 아닙니까? 가혹한 운명 때문에 더욱 애절한 사랑의 무대, "거룩한 천사들의 성"을 둘러보며 토스카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것이 다 부질없는 일일까요?
(....별은 빛난다./ 흙의 향기도 그윽한 저녁/ 문소리 나며 모래 밟는 발소리 달려가는 나/ 향기로운 그녀가 들어서며/ 내 두 팔에 쓰러져 안기네/ 오, 부드러운 입맞춤/ 달콤한 손길//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베일을 젖히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드러내는데 아, 이젠 영원히 사라진 사랑의 꿈이여/ 그 시간은 가버리고/ 절망 속에 나는 죽어가네/ 나는 죽어가네/ 내 짧은 생에서 이런 사랑을 한 적이 없었네/짧은 인생이여.....“)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분'의 사랑,
그 사랑에 흠뿍 빠져 돌아오는 멀고도 먼 동방에서 온 순례자의 귓전에 루치아노 파바롯티가 유려한 음성으로 부르는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E lucevan le stelle)이 들려온다. 무심하게 흐르는 테베레 강물은 토스카의 붉디붉은 순정을 우리에게 속삭이며 "넌 사랑의 승리를 믿느냐?" 며 우릴 유혹하네,... 유혹하네...
저녁, 로마의 서쪽 하늘을 물들이는 석양이 참 가슴을 저미도록 아름다웠습니다.
우기인 1월에 저녁 노을을 보기란 힘든 것이야 하고 누군가 가난한 순례자를 부추깁니다.
외로운 순례자가 보내는 저녁인사를 그대는 거절하지 마시라...
"Buona notte!" * * * *
오늘 뉴스 보셨나요? 에어 프랑스가 파업이라 파리로 들어갈 수 없어서 토스카를 일별하고 다음 비행기로 파리에 가지요. 교회의 시작이었던 라테라노 성전이 오늘따라 보고 싶네요. 여기서 헤레나 세례명을 쓰는 분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교회의 귀중한 유적과 발자취를 애써 모은 헤레나 모후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교회의 귀중한 유산을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이자 교회로 이끈 헤레나 모후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빌라도 총독관저의 대리석 계단과 숱한 예수님에 관한 유물을 이 성전에 보관하였던 것은 바로 헤레나 모후가 교황에게 기증 하기 전까지 라테라노 궁전에서 살았던 인연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