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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 바로 <필경사 바틀비>이다. ‘필경(筆耕)’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글을 대신 써주고, 그 일로 인해 대가를 받는 것을 뜻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서류 작업이 컴퓨터의 워드 프로그램으로 작성되어, 필경사처럼 대신 글을 써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혹시 있다고 해도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을 대신할 뿐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글을 모르거나 혹은 악필인 사람들을 대신해서 서류를 작성해주는 직업이 있었고, 우리의 경우 그런 사람들을 ‘대서사(代書士)’라고 지칭했다. 그래서 관공서 주위에는 ‘대서사 사무소’라는 간판을 달고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서류 작성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대가를 치르고 일을 맡기곤 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되어, 서류 작성을 대신하거나 검토하는 일을 주로 하는 필경사였다.
다른 이들이 부탁한 서류를 작성하거나 검토해야만 하는 필경사의 업무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을 선택하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필경사에게 맡겨진 일이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작성되어야만 하는 서류 작업이기에, 자신이 선택한 일만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직업인으로서 필경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변호사 사무실에 고용된 바틀비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하겠다고 주장한다. ‘선호하지 않다.’라고 번역된 원문의 문장은 ‘I would preper not to.‘로써, 번역을 하는 사람에 따라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혹은 이 책처럼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합니다.‘로 옮길 수가 있다. 이 책에서는 그 표현을 일관되게 ’선호하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다른 이들이 요구하는 서류 작성을 하지 않는다면, 필경사로서의 역할은 끝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틀비의 고용주이자 작품의 화자로 등장하는 변호사는 ‘배심원을 향해 열띤 변론을 하거나 대중에게 갈채를 받은 적이 전혀 없는, 야망 없는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면접을 거쳐 고용된 초기에 바틀비는 ‘오랫동안 쓰는 일에 굶주렸던 사람처럼’ 엄청난 양의 서류를 ‘기계적으로 필사를 했다.’ 하지만 3일째 되는 날부터 화자의 부탁에 대해 ‘하지 않는 쪽을 선호하겟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던 것이다. 이후부터 어떤 부탁이든지 같은 말을 반복하며, 변호사인 화자와 필경사 동료들의 원망을 사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필경사로서 바틀비에게 맡겨진 서류 작성 작업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그 일을 선호하지 않는다면, 바틀비는 더 이상 필경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방법으로 설득을 하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고, 화자는 끝내 그와 헤어지기 위해 사무실을 옮기는 일을 감행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우호적이었던 화자가 그를 내친다면, 바틀비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발붙이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그리고 애초에 근무했던 사무실이 있던 건물을 방황하여, 건물주와 세입자들이 바틀비의 처리를 요구하기 위해 화자를 찾아오는 상황이 반복된다. 결국 공권력의 개입으로 바틀비의 행방이 처리되는 것으로 귀결되고, 모든 일에 ‘선호하지 않는’ 자신의 태도를 견지한 바틀비의 상황이 제시되고 있다. 줄거리는 명확하지만,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 가운데 바틀비를 작가의 분신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필경사와 마찬가지로, 작가라는 역할도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선보이는 존재이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만을 쓸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때로는 작가는 원하지 않지만 대중들이 원하는 작품을 써야만 하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할 것이다. 번역자는 작품 해설에서 <필경사 바틀비>가 ‘멜빌이 가장 정망적인 순간에 집필했던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틀비는 남들의 요구에 응하며 원하지 않는 글을 써야만 했던 멜빌을 형상화한 존재라고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대중들의 요구에 응해 억지로 작품을 쓰기보다, 차라리 절필을 택하겠다는 멜빌의 의지를 바틀비라는 문제적 인물을 통해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생각할 거리를 다양하게 제공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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