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은 군사적 방어의 목적으로 축조되는데 방어해야 할 주된 대상이 국가권력의 행사 주체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행정적인 성격을 가지게 된다.
나. 일정한 거주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군사와 행정의 기능을 수행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일정한 공간을 갖추어야 함을 뜻한다.
다. 구조적 연결성을 갖는 인공구조물
방어를 위한 폐쇄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구조물
2. 성곽의 기원
가. 유래
청동기시대에 등장하는 주거지를 둘러싸고 있는 방어용 시설인 해자(垓字, moat)와 목책(木柵, wooden fence)으로 기본적으로 방어시설이면서 동시에 인간집단의 거주공간으로서의 문화 영역을 구분하는 존재였다.
나. 해자(垓字, moat)(濠隍<호황>, 城地<성지>, 溝池<구지>, 塹壕<참호>
⑴ 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
⑵ 능원이나 묘의 경계
다. 木柵(목책, 木寨<목채>, wooden fence)
나무울타리. 울창(梐枑<폐호>)
3. 문헌상 성곽
가. 왕검성
문헌상 가장 오래된 성곽은 고조선의 도성인 왕검성(王儉城)이며 현재 평양의 일대로 비정되는데 정확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나. 한서 조선전
“衛滿(위만)이 진번 조선을 침략해서 땅을 차지한 뒤에 관리를 두고 要塞(요새)를 쌓았다”는 기록을 통해 고조선시대에는 지방에도 성곽이 축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 고구려(高句麗)
고구려(高句麗)의 나라 이름의 구려(句麗)는 성, 읍락 등을 의미하는 고구려말인 구루(溝漊)로 통하는데 큰 성이란 의미였는데 기원전 1세기전부터 고구려가 등장하고 있다.
라. 삼국지 동이전
“변진에는 성곽이 있고, 진한에는 성책이 있으며, 마한에는 성곽이 없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Ⅱ. 삼국시대의 성곽
1. 성곽 축조
국가간에 영토 확장과 영역지배를 위한 치열한 전쟁이 지속되면서 많은 성곽이 축조되었다. 성곽 축조는 정치권력의 등장과 집중이라는 사회적 배경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당시 최대의 토목사업이라 할 수 있는 성곽 축조는 토목기술 및 대규모 노동력의 조직이 가능했던 삼국시대의 사회적 기반을 잘 보여준다.
2. 도성에서 출발
삼국의 성곽은 정치・행정의 중심지인 도성에서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
3. 지방성은 山城
삼국시대의 지방성은 산성(山城)으로 축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Ⅲ. 고려 조선시대의 성곽
1. 통일신라
주(州)와 소경(소경)을 비롯한 전국의 중요 도시에 평지의 성곽축성이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군현에서는 산성이 행정적인 치소(治所) 기능을 하고 있었다.
2. 고려
소규모이지만 평지에 읍성이 산성과 분리되어 축조되기 시작하였으며 산성은 전란시대 대피용으로 기능하였다. 산성도 삼국시대의 소규모 산성보다는 포곡식 형태를 갖춘 대규모 산성이 대거 축조되었다. 귀주성, 충주산성, 죽주산성은 몽고침입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강화시대에 전국에 산성방호별감을 보내어 각지에 산성을 축조하고 백성을 피난시켜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3. 조선
산성을 전국적으로 활용하였다. 고려말 왜구 침입시부터 중남부 해안지역으로부터 읍성축조하여 내륙지방도시로 다시 전국적으로 읍성이 확대되었다. 15세기전후 화약과 화포 등 무기체계가 변화하면서 성곽 및 방어기능이 변화하여 성곽의 높이가 낮아지는 대신 옹성, 치성, 해자 등 성곽의 부속시설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산성의 경우 규모가 큰 성곽은 유용하게 활용하고 소규모산성은 대부분 폐기되었다.
華城(화성) 사적 제3호
1. 정조때 축조한 것으로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변화를 갖춘 한국성곽문화의 완결판
2. 성곽의 축조에 벽돌(塼)을 병용
3.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 및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식 성곽구조
4. 사용재료를 규격화하고 실학자 丁若鏞(정약용)은 청으로부터 구입한 古今圖書集成(고금도서집성)에 실린 Jean Terenz(장 테렝즈, 鄧玉函)의 奇器圖說(기기도설)에서 얻은 지식을 기본으로 연구를 더하여 설계한 起重機(기중기, 擧重機)등의 기계장치를 활용
5. 성곽의 군사적・방어적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는 시대에 축조하여 전근대성곽문화의 마지막
華城城役儀軌라는 책에 이와 관련한 시말(始末)과 제도, 의식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794년 2월부터 축조가 시작되어 1796년 9월에 완공되었으며, 둘레는 5,520m이다. 시설물로는 4대문인 팔달문·장안문·창룡문·화서문을 비롯하여 암문·수문·적대·공심돈·봉돈·포루·장대·각루·포사와 성신사·사직단·공자묘·행궁 및 그외 부속건물들이 축조되었다. 그중 공심돈은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시설인데, 치(雉) 위에 벽돌을 쌓아 세운 것으로 속이 텅 비어 있어 망루와 포루(砲樓)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적대(敵臺)·각루(角樓) 등도 새로운 설비였으며, 옹성(甕城)까지 제대로 갖춘 완벽한 시설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 거중기(擧重器)·활차(滑車) 등 근대적인 기기를 축성공사에 사용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2년 6개월이 소요된 공사에는 기술자 1,820명이 투입되었으며, 석재 18만 7,600개가 채취·운반되었고, 벽돌 69만 5,000여 장이 소요되었다. 연일수는 37만 6,342일, 총경비는 약 87만 3,520냥과 양곡 1,500석이었다. 종래의 전통적인 축성방법을 기본으로 하고 한국 성곽이 갖는 약점을 중국이나 일본의 축성술로 보완한 화성은 그때까지의 축성기법을 가장 잘 집약시켰다는 점에서 한국 성곽발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35년 일본이 '수원성곽'으로 문화재 지정을 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화성'으로 명칭을 환원했다.
제2절 성곽의 유형
Ⅰ. 입지와 형태에 따른 분류
1. 성곽의 입지조건
가. 平地城 : 평지에 위치
⑴ 배후에 鎭山(진산)을 두고 그 아래에 시가지를 잡는 우리나라 지방도시의 형태에 의해 발달. 평양 고구려 長安城, 수원 華成
⑵ 지리적 조건상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용이하나 군사적 방어에 취약
나. 山城 : 산에 위치
⑴ 우리나라 성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형태로 한국성곽문화의 중요한 특성으로 한반도와 남만주일대에서는 산지지형이 많은 지리적 환경에 의해 자연히 산에 의지해 성을 축조하는 산성아 발달
⑵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공력이 적게 들고 방어력을 증대시킬 수 있으나 주민들의 거주공간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⑶ 종류
① 包谷式 山城
계곡을 끼고 주위의 산능선에 성곽을 축조한 형태로 대형산성의 경우로 성안의 평탄면을 이용하여 거주공간 확보가 용이하다. 수원이 풍부하여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다. 집안의 산성자산성 등 대부분의 고구려산성, 보은 삼연산성, 광주 남한산성, 목천 목천토성
② 山頂式 山城(테뫼식 山城)
산정상부의 평탄면을 이용하여 주위에 성곽을 두른 형태로 소규모 성곽의 경우로 백제와 신라의 산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부여 성홍산성, 예산 임존성, 함안 성산산성, 상주 견훤산성
임존성(任存城) :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 국가지정문화재 사적90호
임존성은 대흥면 봉수산(鳳首山 484m)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성 주위가 약 2.4㎞의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산의 표고는 483m이다. 성벽의 높이는 약 350㎝이며 너비는 약 350㎝ 인데 남쪽의 성벽외면은 석축으로 되었으나 내면은 토석 혼축으로 내탁을 하였다. 남쪽 성벽에 수구를 설치하고 있으며 이곳 수구로 성내 물을 유도하기 위하여 깊이 90㎝, 폭 60㎝의 도랑이나 있다. 그 위에는 넓적한 판석을 덮고 있으며 수구의 크기는 폭 70㎝, 높이가 30㎝이다. 이 성의 특징은 네 모서리에 축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다른 곳보다 약 2m정도 더 두텁게 내탁하였으며 성의 높이도 약간 더 높게 축조되었다. 성의 주문은 남문지로 추정되는데 문지 근처는 두터우며 좌우에 성문의 일부로 추정되는 석축구조가 보이고 북문지로 추정되는 곳도 남아 있다. 성내는 평평하게 경사를 이루고 또한 남벽 내에서는 백제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간혹 눈에 띄고 있으며 계단식으로 된 건물지가 보인다. 임존성은 서천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서천군 한사면 지현리 산3, 사적 제60호. 周留城 추정과 함께 백제 부흥군(遲受信의 최후거점, 665년)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본래 이 산성은 주로 북쪽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하여 구축된 산성으로 보이며 원래는 백제시대에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축조한 것으로 또한 대흥산성이라고도 한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福信 12000명(주류성(周留城)), 道琛 10000명(임존성(任存城)), 黑齒常之 10000명(眞峴城, 오늘날 黑石東山城, 密巖山城, 흑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鳳谷洞) 山 26-1.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5호), 相如 3000명 (이례성(尒禮城), 충남 논산군 노성면), 遲受信 3000명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聖興山城) 충남 부여군 임천면과 장암면에 걸쳐 세워진 산성. 사적 제4호)
가. 백제의 부흥운동
⑴ 복신의 진현성 탈환(661년)
⑵ 백제부흥(재건)운동
福信 재건 총사령관
12,000명. 주류성(周留城) 서천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서천군 한사면 지현리 산3, 사적 제60호
10,000명. 眞峴城, 오늘날 黑石東山城, 密巖山城, 흑대전광역시 서구 봉곡동(鳳谷洞) 山 26-1.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5호
相如
3000명 이례성(尒禮城), 충남 논산군 노성
遲受信
3000명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聖興山城) 충남 부여군 임천면과 장암면에 걸쳐 세워진 산성. 사적 제4호
좌평 정무(正武)
두시원악(豆尸原嶽). 충남 청양군 정산면 두릉윤성(豆陵尹城)추정
달솔 여자긴(餘自進)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 웅진(熊津 공주)의 한글 발음인 ‘고마(곰)나루’를 한자로 표현한 것
왕자 부여풍(扶餘豐)
왕. 中大兄. 제명천황(보황녀)의 아들
⑶ 반목
내분으로 福信이 道琛을 죽이고 豐은 福信를 죽였다.
⑷ 부여 隆과 黑齒常之의 항복
⑸ 부흥운동 실패;
③ 複合式 山城
산정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의 결합 형태로 규모가 큰 도성. 고구려 평양의 대성산성, 백제 공주의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다. 平山城 : 산성과 평지성을 결합
2. 성곽의 규모
가. 대형 : 지방의 주요 거점성
나. 중형 ; 대형산성의 위성 산성
다. 소형 :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
3. 성곽의 수
가. 단곽식 성곽 :하나의 성곽
나. 복곽식 상곽 : 둘 이상의 구역으로 나뉜 성곽. 고구려 장안성은 4개의 구역으로 되어 있어 대표적 복곽식 성곽
4. 성곽의 기능
가. 王宮城 : 왕 거주
나. 都城 : 首都(수도)
다. 治所城 : 지방통치의 중심지
라. 遮斷城 : 교통로상의 협곡을 가로지르며 축조된 것으로 중국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관마장산성, 망파령산성, 신라의 경주관문성
마. 長城 : 변경지역에 길게 축조. 고구려 영류왕때 천리장성(631년 영류왕 13년~647년, 기록), 고려의 천리장성, 조선의 장성(북방변경의 행성을 여러 개 묶어 연결한 것)
바. 城堡 : 교통로상 요충지에 설치된 군사적인 것
사. 堡壘城(堡砦) :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토석으로 쌓은 소규모 군사요새. 峨嵯山城(阿且山城
Ⅱ. 축성법에 따른 유형분류
1. 土城
가. 의의
흙으로 쌓아올린 성루(城壘)
나. 방식
⑴ 成土法 : 흙을 쌓아올리는 방식
⑵ 削土法 : 험준한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기존의 지형을 깍아 내려 성벽을 축조하는 방법
⑶ 版築法: 흙 등 재료를 다져서 층층히 쌓아 올리는 방법. 風納土城, 夢村土城, 공주 공산성, 부여 사비성
2. 石城
가. 의의
돌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가장 견고한 성벽구축을 하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성곽
나. 방식
⑴ 片築式(內托式) : 외벽만 석축을 하고 내측은 흙이나 돌로 채우는 방식
⑵ 夾築式 : 안팎 성벽을 모두 돌로 쌓는 방식
⑶ 퇴물림식 축성법 : 城壁, 角臺, 望臺 기단부에 큰 돌을 쌓고 위로 올라가면서 층마다 안으로 들여 쌓고 윗 부분은 수직으로 하는 방식. 고구려~조선.
3. 土石混築城
가. 의의
흙과 돌을 섞어 쌓는 성. 신라 월성
나. 방식
⑴ 순수토석혼축법
⑵ 가운데는 토축 외면은 석축 마무리하는 방식
⑶ 가운데 석축 외면은 토축으로 마무리 하는 방식
4. 塼築城
가. 의의
벽돌을 구워 쌓은 성
나. 일부 축조
조선 초기 일부 읍성, 수원 화성의 경우 여장, 옹성, 치등에 사용한 적은 있으나 성곽전체를 벽돌로 축조한 예는 없다.
제3절 성곽의 구성과 방어 시설
1. 城壁 : 성의 담벼락(石築)
2. 城門 : 성의 문으로 외부와 출입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드는 시설(虹蜺門, 虹霓門)
虹蜺(虹霓, 홍예) 螮蝀(螮蝀, 체동) 珥蜺(이예)무지개
3. 城樓: 城閣
4. 甕城 : 성문 밖에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별도의 성
일자형, 장방형, 반원형, zigzag형
5. 將臺 : 전투지휘소, 성안의 가장 높은 곳이나 정문 근처에 배치
6. 敵臺 : 성문 주위의 雉(치)
7. 雉城(치성) :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벽을 장방형이나 반원형으로 돌출시켜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시설.
8. 角樓 : 성곽의 모서리부분에 설치된 치와 건물(수원화성의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
9. 女牆(여장, 성가퀴, 城堞, 雉堞, 埤堄, 陴堄) : 군사들의 몸을 은폐하기 위한 시설로 성위에 덧쌓은 낮은 담. 평여장, 볼록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이 있다.
10. 眉石 : 女牆과 體城(성곽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몸체부분) 성벽 사이의 납작한 돌로 튀어나오게 설치한 시설물(눈썹모양)
11. 垓字 : 성곽 주위를 자연하천이나 인공적으로 땅을 파서 방어력을 높이는 시설. 월성 해자, 몽촌토성 해자
12. 烽燧臺 : 화성 봉돈. 서울 남산(木覓山) 봉수대
13. 水源施設 : 水口門, 排水口
14. 기타 건축물 : 관청, 주민 거주지
제4절 都城과 邑城
Ⅰ. 도성제의 변천
1. 都城
정치・사회의중심지인 수도에 축조
2. 高句麗
졸본성→국내성(2대 유리왕)
평양성(20대 장수왕)
장안성(25대 평원왕)
평지성
국내성
안학궁성, 청암동토성
복합식 평산성
산성
환도산성. 산상왕(山上王) 13(209)년에 국내성(國內城) 으로부터 옮겨 와 장수왕(長壽王) 15(427)년에 평양(平壤)으로 옮겨 가기까지의 고구려(高句麗)의 왕도(王都)
대성산성
환도산성(丸都山城 . 위나암성)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해발 676m의 산중에 건설했다. 평상시에는 국내성에서 거주하고, 적이 침입해 오면 환도 산성으로 대피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성벽을 쌓는데 있어 산의 능선을 적극 활용한 지혜가 돋보인다. 동 · 서 · 북 3면은 험준해서 자연 지형을 성벽의 기초로 삼고 부족한 곳에 돌을 쌓아 보충했다. 경사가 심한 곳은 흙을 돋워 올렸다. 타원형으로 조성된 성벽의 총 길이는 6,951m이고, 가장 지세가 험준한 서쪽을 제외한 삼면에 각각 1~2개씩 문을 설치했다. 산성의 남쪽 바로 아래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퉁거우허(通沟河)가 흐르면서 해자 역할을 했다.국내성에서 제일 가까운 남문이 정문이다. 정문을 돌아서 들어가면 화강암으로 멋지게 쌓은 점장대(点将台, 뎬장타이)가 있다. 지대를 높게 돋우어 쌓아서 퉁거우허와 주변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기슭에 자리한 궁전 터는 아쉽게도 밭으로 변해 있다
천리장성
고구려가 당나라의 태종 이세민이 야욕을 보이자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631년(영류왕 13년)부터 16년 간에 걸쳐 647년에 완성된 북의 부여성부터 요동반도 비사성(중국명: 大黑山山城)에 이르는 성.
고려시대 거란 ·여진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여진족과의 국경에 쌓은 성(城)이다. 고려는 초기부터 거란과 여진의 침입에 대비해 왔는데, 1033년(덕종 2년)에는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인 류소(柳韶;?~1038)에게 명하여 이 장성을 쌓게 하여 1044년(정종 10년)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성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서쪽의 압록강 어귀인 흥화진(興化鎭)으로부터 맹주(孟州:孟山) ·삭주(朔州) 등 성을 거쳐 정변(靜邊) ·화주(和州) 등의 성에 이르고, 다시 도련포(都連浦)까지 이어지는 천여 리 되는 긴 성으로 높이와 폭이 각각 25자나 되는 석축이었다. 1044년경 완공되었는데 류소는 그 공으로 추충척경공신(推忠拓境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이 장성은 그 뒤에도 오랫동안 고려의 북방 방어선으로 이용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도 의주(義州) ·정평(定平) 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흥산성(大興山城)
개성직할시 개성시 박연리. 국보 126 호.
개성시 박연리에 있는 고려의 성터로 수도방위를 위하여 쌓았으며, 천마산성이라고도 한다. 개성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약25km 떨어진 대흥산의 산성골을 감싸 안으며 천마산, 청량봉, 성거산, 인달봉 등 높 낮은 봉우리들을 이어가며 쌓은 석성이다. 산성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성안에서 발견된 고려시기의 기와들로 보아 고려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여 지며, 조선 순조때 기록인 《중경지(中京誌)》에 따르면 조선 후기인 1676년(숙종 2)과 1783년(정조 7)에 보수한 기록이 있다.
성의 둘레는 10.1km, 높이는 보통 4~5m이고, 골짜기를 넘어서는 지점에는 6~8m이다. 방어시설로 성벽 상부에는 성가퀴를 두었으며, 10개소에 치(雉)를 설치하였다. 성의 동, 서, 남, 북 네 면에는 큰 성문들을 두고, 그 사이에 사잇문과 암문을 냈다. 문 가운데 보존상태가 좋은 것으로 박연폭포 옆에 있는 북문을 들 수 있다. 이 북문은 높은 축대의 중앙에 홍예문을 두었고, 그 위에 문루를 두었는데, 문루는 후세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성에는 4개의 수구문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북문과 같이 박연폭포 옆에 있는 북쪽 수구문이다.
성 주위의 높은 봉우리에는 장대터가 있고 성의 서북쪽에는 망루터가 있다. 성 안에는 본영인 제승당터와 그 밖에 병실, 병기창고, 식량창고 등의 집터가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사찰로 유명한 관음사(觀音寺)와 대흥사(大興寺)의 일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대흥산성 내에는 크낙새의 보호구역으로 유명하다.
6. 朝鮮
나성 : 태조초에 석성과 토성을 쌓고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세종4년(1422년) 대대적 보수. 숙종30년(1704년) 무사석(武沙石, 네모반듯한 돌로 층을 지어 높이 쌓아올린 축석)으로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성문 주위의 성벽 축조. 북한산성과 남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