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묘청의 난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序)
고려 인종 대를 전후하여 고려 내부에 유학파와 국수파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만주지방에서는 여진독이 성장하면서 고려와 무력 충돌이 잦아지고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1125년 거란을 멸망시키고 1127년 북송을 멸망하게 하고 고려에 대하여 칭신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고려사회의 국론은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묘청은 국수파(서경파. 풍수지리설파, 배외파)로서 서경천도,칭제건원론과 금국정벌론을 주장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Ⅱ.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모순
1. 문벌귀족의 형성
가. 문벌귀족의 출신 성향
신라 6두품 계통의 귀족들은 고려의 사회와 정치 질서를 개편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여 지위를 굳게 하였고 개경에 가까운 지방호족 출신자들도 점차 문신으로서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하는 수가 늘어 고려는 이성귀족(異姓貴族)에 의한 정치를 하였다
나. 본관(本貫) 사용과 별도 호적 작성
이성귀족들은 개성이나 출신지를 본관(本貫, 貫鄕)으로 삼고 문벌을 중시하며 평민과는 별도의 호적(戶籍)을 작성하였다.
다. 혼인정책
가문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왕실 또는 격이 높은 가문과 혼인정책을 사용하였다.
라. 대표적인 문벌 귀족
안산 김씨(安山 金氏. 金殷傅), 인주 이씨(仁州 李氏. 李子淵과 李資謙), 파평 윤씨(坡平 윤씨. 尹瓘), 해주 최씨(海州 崔氏. 崔沖), 경주 김씨(慶州 金氏. 金富軾) 등이 대표적인 문벌 귀족이었으며 11대 문종때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안산 김씨 김은부(金殷傅)는 세딸을 8대 현종의 비로 들인 이루 11대 문종때까지 4대 50년간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점하였고 인주 이씨 이자연(李子淵)은 세딸이 문종의 비로 들어간 후부터 안산 김씨를 대신하여 인종때까지 7대 80년간 인주이씨 세상이었고 나중에 이자겸(李資謙)은 왕이 되려고 하였다
마. 문벌귀족의 특권
문벌귀족은 음서를 통해 관직을 세습・독점하는 겅치적 특권과 공음전의 혜택을 받아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통해 불법적으로 토지를 착취(토지겸병)하는 경제적 특권을 누렸다.
2. 문벌귀족사회의 동요 : 이자겸(李資謙)의 난(1126)
인주(경원) 이씨는 이자연(李子淵)에서 이자겸(李資謙)에 이르기까지 약 80년간(문종~인종)때가지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자겸은 둘째 딸을 16대 예종(睿宗)의 비로 들여서 그 소생인 해(초명은 구(構)이고 해(楷)로 개명) 인종(仁宗)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다시 두딸 3녀와 4녀를 인종에게 주어 이중 인척관계를 맺어 권력을 독차지 하였다.
이자겸 일당은 한안인 등 반대파를 몰아내고 남의 토지와 재물을 강탈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재화를 획득하고 18자(十八子)가 왕이 되리라는 도참설(圖讖說)을 믿고 왕이 되려 하자 인종은 왕 4년 1126년 이자겸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여 인종은 행동의 자유를 잃고 최탁, 안보린 여러 신하도 해를 입었다. 이자겸은 인종을 시해하려다가 왕 5년 1127년 인종에 포섭당한 일파인 척준경(拓俊京), 김향(金珦), 이공수(李公壽), 정지상(鄭知常)등에 타도되어 쫓겨 귀양을 가게되어 인주 이씨가 몰락하였다.
이 난으로 문벌귀족사회의 해체가 촉진되고 궁궐이 불타고 민심이 불안하여 도참이 유행하고 서경천도론이 대두되었다.
Ⅳ. 묘청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1135)
1. 유학파(개경파)와 국수파(서경파)의 대립
문벌귀족은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으로 분열 대립하였다. 그리고 금나라는 고려에 종종 압박을 가하여 고려는 외교적 시련에 직면하였다.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 서경파・풍수지리설파・배외파로 불리던 서경인들은 이자겸의 난 때 불타버린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2. 묘청의 난
묘청 등은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개경은 땅기운이 쇠하고 서경은 땅기운이 왕성하므로 서경으로 천도하면 국가를 중흥시킬 수 있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송이나 금과 대등한 입장을 칭하고 금국을 정벌할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종도 처음에는 마음이 움직여 서경에 대화궁(大花宮)과 팔성당(八聖堂)을 짓고 호의적이었으나 개경파・유학파・사대파 귀족들이 반대를 하여 서경천도가 어렵자 묘청은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여 인종 13년 1135년 서경에서 서경 분사시랑 조광(分司侍郞 趙匡), 분사병부상서 류참(分司兵部尙書 柳旵), 사재소경 조창언(司宰少卿 趙昌言), 안중영(安仲榮)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리고 하였으나 백수한, 정지상, 김안을 출병전에 참수하고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조광이 묘청, 류참과 그 아들 류호를 목베어 항복했다가 정부가 항복을 받아 들이자 않자 다시 싸우는 등 내분과 전략 실패로 1년만에 서경이 함락되고 난이 진압되었다.
3. 경과
이 난으로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극화되고 분사제도와 삼경제가 폐지되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의 분열과 지역 세력간의 대립이었고 자주적 전통 사상(풍수지리설 등)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과의 충돌 및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갈등(신라 계승 이념과의 대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1천년 내 최대사건‘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Ⅲ. 결어
비록 묘청의 난은 내부 분열과 전략 실패 및 정부의 진압으로 실패했지만 고려의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개경파(유학파)가 승리하여 금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12. 무신정권에 대하여 논하라.
Ⅰ. 서(序)
1. 무신정변의 배경
가. 문치주의에 입각한 문신의 사회적 열세(문・무관 차별 대우)
고려는 문치주의를 취하여 무신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고 승진에도 한계가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였다. 군사령관직도 무신 대신 문신(강감찬, 윤관, 김부식 등)이 맡았고 무신은 천대받고 문신에게 사역당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불만은 마침내 태평호문의 왕 의종 때 무신정변을 초래하게 되었다.
Ⅱ. 무신정변
1. 의종(毅宗)의 실정
태평호문(太平好文)의 왕 의종은 태평대・환희대・미성대 등을 짓고 환락을 즐겼고 호종하는 무신들은 호위병에 불과할 정도로 비참했다. 또 일찍이 정중부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워졌고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은 문신 한뢰(韓賴)에게 뺨을 맞았다.
2. 군인들의 불평
전시과에 규정된 군인전도 지급받지 못하거나 관리들의 녹봉을 위하여 빼앗기기도 하였고 전쟁뿐만 아니라 평시에는 천역에도 동원되었다.
3. 무신정변
의종 24년 1170년 국왕이 보현원에 갔을 때 호위하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반란(무신정변, 경인의 난)을 일으켜 김돈중・한뢰 등 수많은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고 그 아우 익양공 명종(明)을 즉위시켰다.
4. 반무신의 난
명종 3년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과 의종을 복위하기 위해서 거사했으나 실패했고 명종 1년 1174년에는 서경 유수 병부상서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Ⅲ. 무인간 정권쟁탈
1. 무장
정권을 잡은 무인들은 고위직에서 하위직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독차지 하고 사유지를 확대하며 경제적 재부를 차지하고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재부를 바탕으로 무장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교체를 하였다.
2.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 제거
처음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가 공동 통치하다가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아 득세를 부리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되었다.
3. 정중부와 경대승
이의방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정중부는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살해되고 경대승은 신변안전을 위해서 100명으로 도방을 지키게 했으나 압박을 받아 발병하여 죽었다.
4. 이의민(李義旼)
경대승이 죽은 후 이의민이 경주에서 상격하여 정권을 독차지 하고 횡포를 부리다가 명종 26년 1196년 최충헌(崔忠獻)・최충수(崔忠粹)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5. 최충헌의 집권
가. 최충헌의 등장
최충헌은 조위총의 반란때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의민을 제거한 후 박진재(朴晋材), 아우 최충수를 제거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국왕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일생동안 두 왕 19대 명종과 21대 희종을 폐하고 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 및 23대 고종 4왕을 옹립하였다.
나. 최씨정권의 지배기구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후 무인정권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최충헌은 1206년 국왕으로부터 진주를 식읍과 더불어 진강후(晋康侯)라는 봉함을 받고 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를 세웠다. 최충헌은 정권장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개혁책인 봉사10조를 제시했다. 최충헌 다음에 최우(崔瑀, 崔怡), 최항(崔沆), 최의(崔竩) 순으로 집권하였다.
봉사10조
1. 새 궁궐로 옮길 것.
2. 관리의 수를 줄이고 녹봉을 적당히 할 것.
3.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빼앗은 토지는 돌려줄 것
4. 선량한 관리를 임명하고 세금을 적당히 할 것.
5. 공물 진상을 금하고 안찰사의 임무를 명확히 할 것.
6.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고리대업을 금할 것
7. 탐관오리를 징벌하되 잘한 자는 상을 줄 것.
8. 관리의 사치를 금할 것.
9. 비보 사찰 이외에는 모두 없애고 함부로 절을 세우는 것을 금할 것.
10. 신하의 간언을 용납하고 바른말 하는 관리를 등용할 것
통치기구
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 | 무신정권 중심기구, 진강후(晋康侯) |
교정도감(敎定都監) | 교정별감(敎定別監). 반대세력 수색 및 비위사실 감찰 |
정방(政房) | 정색승선(政色承宣). 최우때 설치한 동지작인 인사행동기구 |
서방(書房) | 문인들의 숙위기간 |
도방(都房) | 경대승이 만든 사병집단으로 최씨정권에서 확대 |
삼별초(三別抄)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
무신정권(1170~1270)
시기 | 연대 | 인물 | 내용 | 중심기구 |
제1기(성립기, 1170~1196) | 1170~1179 |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이 1171년 이고(李高)를 죽이고, 이의방(李義方)은 1174년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됨 | 중방(重房) |
1179~1183 | 경대승(慶大升) | 김자격, 견룡(牽龍), 허승(許升), 김경린과 함께 정중부(鄭仲夫) 부자와 송유인(宋有仁) 참수. 병사 | 도방(都房) |
1183~1196 | 이의민(李義旼) | 조위총(趙位寵)의 난(1174년) 때 공훈. 의종(毅宗) 살해. | 중방(重房) |
제2기(확립기, 1196~1258) | 1196~1219 | 최충헌(崔忠獻) | 이의민(李義旼) 살해 | 교정도감(敎定都監. 1209~ |
1219~1249 | 최우(崔瑀)→최이(崔怡) | 1219년 추밀원부사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 1225년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도방을 확장. 몽골의 침공 소식에 1232년 강화천도(江華遷都). 1243년 국자감을 수축했으며 사재를 동원해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 |
1249~1257 | 崔沆 | 전전긍지(殿前承旨)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등의 가노(家奴)에게 관직을 별장(別將) 제수. 집권하자 김경손(金慶孫)장군, 지이부사 상장군(知吏部事上將軍) 주숙(周肅, 본면 周永賚), 최우(崔瑀)의 계실이었던 대씨부인 참살 |
(1257~1258 | 최의(崔竩) | 이공주 낭장(郎將) 임명 |
제3기(쇠퇴기, 1258~1270) | 1258~1268 | 류경(柳璥)과 김인준(金仁俊)→김준(金俊) | 김준(金俊, 가노출신 김윤성의 아들).고종45년 3월(1258년)에 동생 김승준, 아들 김대재(金大才, 최영백 사위)・김용재・김식재과 大司成 柳璥. 神義軍都領別將 朴希實. 樞密院使 崔昷, 이연소. 將軍 朴松庇.都領別將 林衍과 함께 崔竩 참수하고 崔良伯 제거.무오정변(戊午政變) |
1268~1270 | 임연(林衍) | 원종이 임연(林衍), 강윤소(康允紹), 환관 최은(崔壄)・김경(金鏡)을 시켜 金俊 살해. 무진정변(戊辰政變).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하면서 대몽항쟁을 준비하다가 근심과 울분으로 사망 |
1270~1270 | 임유무(林惟茂) |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에게 살해당하고 어머니 이씨와 형제들은 모두 원나라로 압송 |
Ⅳ. 결어
무신정변이 일어나서 다시 왕권이 왕의 손으로 넘어가기까지 딱 100년간 무인들이 사실상 국가를 통치하는 하극상으로 이른바 실력의 시대였고 누구라도 실력만 있으며 성공할 수 있다는 사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무신정권은 하층민을 무마하기 위해 부곡, 향, 소의 주민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고 많은 노비들이 자유를 얻게 되었는이들이 대몽항쟁에서 주도적으로 나섰고 양천간의 혼인도 이루어져 양천제도가 무너졌는데 조선시대의 신분제도의 계편의 계기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