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무신정권
가. 무신정변의 배경
⑴ 문치주의에 입각한 문신의 사회적 열세(문・무관 차별 대우)
고려는 문치주의를 취하여 무신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하위에 있고 승진에도 한계가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열세였다. 군사령관직도 무신 대신 문신(강감찬, 윤관, 김부식 등)이 맡았고 무신은 천대받고 문신에게 사역당하는존재였다.
⑵ 의종(毅宗)의 실정
태평호문(太平好文)의 왕 의종은 태평대・환희대・미성대 등을 짓고 환락을 즐겼고 호종하는 무신들은 호위병에 불과할 정도로 비참했다. 또 일찍이 정중부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워졌고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은 문신 한뢰(韓賴)에게 뺨을 맞았다.
⑶ 군인들의 불평
전시과에 규정된 군인전도 지급받지 못하거나 관리들의 녹봉을 위하여 빼앗기기도 하였고 전쟁뿐만 아니라 평시에는 천역에도 동원되었다.
나. 의종 24년 170년 1170년 국왕이 보현원에 갔을 때 호위하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반란(무신정변, 경인의 난)을 일으켜 김돈중・한뢰 등 수많은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고 그 아우 익양공 명종(明)을 즉위시켰다.
⑷ 반무신의 난
명종 3년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金甫當)이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 및 장순석(張純錫)과 의종을 복위하기 위해서 거사했으나 실패했고 명종 1년 1174년에는 서경 유수 병부상서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에 반항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나. 무인간 정권쟁탈
⑴ 무장
정권을 잡은 무인들은 고위직에서 하위직에 이르기까지 관직을 독차지 하고 사유지를 확대하며 경제적 재부를 차지하고 정치적 지위와 경제적 재부를 바탕으로 무장을 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교체를 하였다.
⑵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 제거
처음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가 공동 통치하다가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아 득세를 부리다가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되었다.
⑶ 정중부와 경대승
이의방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정중부는 청년장군 경대승(慶大升)에 의해 살해되고 경대승은 신변안전을 위해서 100명으로 도방을 지키게 했으나 압박을 받아 발병하여 죽었다.
⑷ 이의민(李義旼)
경대승이 죽은 후 이의민이 경주에서 상격하여 정권을 독차지 하고 횡포를 부리다가 명종 26년 1196년 최충헌(崔忠獻)・최충수(崔忠粹)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다. 최충헌의 집권
최충헌은 조위총의 반란때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이의민을 제거한 후 박진재(朴晋材), 아우 최충수를 제거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고 국왕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일생동안 두 왕 19대 명종과 21대 희종을 폐하고 20대 신종, 21대 희종, 22대 강종 및 23대 고종 4왕을 옹립하였다.
라. 최씨정권의 지배기구
⑴ 최충헌
최충헌이 정권을 잡은 후 무인정권은 정치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최충헌은 1206년 국왕으로부터 진주를 식읍과 더불어 진강후(晋康侯)라는 봉함을 받고 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를 세웠다. 최충헌은 정권장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개혁책인 봉사10조를 제시했다. 최충헌 다음에 최우(崔瑀, 崔怡), 최항(崔沆), 최의(崔竩) 순으로 집권였다.
봉사10조
1. 새 궁궐로 옮길 것.
2. 관리의 수를 줄이고 녹봉을 적당히 할 것.
3.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빼앗은 토지는 돌려줄 것
4. 선량한 관리를 임명하고 세금을 적당히 할 것.
5. 공물 진상을 금하고 안찰사의 임무를 명확히 할 것.
6. 승려의 왕궁 출입과 고리대업을 금할 것
7. 탐관오리를 징벌하되 잘한 자는 상을 줄 것.
8. 관리의 사치를 금할 것.
9. 비보 사찰 이외에는 모두 없애고 함부로 절을 세우는 것을 금할 것.
10. 신하의 간언을 용납하고 바른말 하는 관리를 등용할 것
⑵ 통치기구
흥녕부(興寧府. 晋康府, 晋陽府) | 무신정권 중심기구, 진강후(晋康侯) |
교정도감(敎定都監) | 교정별감(敎定別監). 반대세력 수색 및 비위사실 감찰 |
정방(政房) | 정색승선(政色承宣). 최우때 설치한 동지작인 인사행동기구 |
서방(書房) | 문인들의 숙위기간 |
도방(都房) | 경대승이 만든 사병집단으로 최씨정권에서 확대 |
삼별초(三別抄)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
무신정권(1170~1270)
시기 | 연대 | 인물 | 내용 | 중심기구 |
제1기(성립기, 1170~1196) | 1170~1179 |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정중부(鄭仲夫) | 이의방(李義方)이 1171년 이고(李高)를 죽이고, 이의방(李義方)은 1174년 정중부(鄭仲夫)의 아들 정균(鄭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에 살해됨 | 중방(重房) |
1179~1183 | 경대승(慶大升) | 김자격, 견룡(牽龍), 허승(許升), 김경린과 함께 정중부(鄭仲夫) 부자와 송유인(宋有仁) 참수. 병사 | 도방(都房) | |
1183~1196 | 이의민(李義旼) | 조위총(趙位寵)의 난(1174년) 때 공훈. 의종(毅宗) 살해. | 중방(重房) | |
제2기(확립기, 1196~1258) | 1196~1219 | 최충헌(崔忠獻) | 이의민(李義旼) 살해 | 교정도감(敎定都監. 1209~ |
1219~1249 | 최우(崔瑀)→최이(崔怡) | 1219년 추밀원부사로 아버지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 1225년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도방을 확장. 몽골의 침공 소식에 1232년 강화천도(江華遷都). 1243년 국자감을 수축했으며 사재를 동원해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 | ||
1249~1257 | 최항(崔沆) | 전전긍지(殿前承旨) 이공주(李公柱), 최양백(崔良伯), 김준(金俊) 등의 가노(家奴)에게 관직을 별장(別將) 제수. 집권하자 김경손(金慶孫)장군, 지이부사 상장군(知吏部事上將軍) 주숙(周肅, 본면 周永賚), 최우(崔瑀)의 계실이었던 대씨부인 참살 | ||
(1257~1258 | 최의(崔竩) | 이공주 낭장(郎將) 임명 | ||
제3기(쇠퇴기, 1258~1270) | 1258~1268 | 류경(柳璥)과 김인준(金仁俊)→김준(金俊) | 김준(金俊, 가노출신 김윤성의 아들).고종45년 3월(1258년)에 동생 김승준, 아들 김대재(金大才, 최영백 사위)・김용재・김식재과 大司成 柳璥. 神義軍都領別將 朴希實. 樞密院使 崔昷, 이연소. 將軍 朴松庇.都領別將 林衍과 함께 崔竩 참수하고 崔良伯 제거.무오정변(戊午政變) | |
1268~1270 | 임연(林衍) | 원종이 임연(林衍), 강윤소(康允紹), 환관 최은(崔壄)・김경(金鏡)을 시켜 金俊 살해. 무진정변(戊辰政變). 원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를 거부하면서 대몽항쟁을 준비하다가 근심과 울분으로 사망 | ||
1270~1270 | 임유무(林惟茂) | 원종이 이분성(李汾成)을 보내 해 회유당한 근위대 삼별초와 어사중승(御史中承) 홍문계(洪文系((임연의 사위 임유무의 매형)), 문하성직사(門下省直事) 송송례(宋松禮) 등에게 살해당하고 어머니 이씨와 형제들은 모두 원나라로 압송 |
Ⅳ. 고려 후기의 정치변동
1. 원의 내정간섭
가. 부마체제의 성립
원 나라는 필요에 의하여 고려국왕을 교체하고 고려 국왕은 원나라의 부마국(鮒馬國)으로서 국왕은 세자로 있는 동안 독로화(독로화, tuluge)로서 북경에 머물러 있다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고 왕이 된 뒤에도 북경에 자주 드나들며 개경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으며 원제국 안에서 예우와 통제를 받았다.
충렬왕 | 충선왕 |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숙왕 | 충혜왕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
1274~1298 | 1298~1298 | 1298~1308 | 1308~1313 | 1313~1330 | 1330~1332 | 1332~1339 | 1339~1344 | 1344~1348 | 1349~1351 | 1351~1374 |
나. 왕실과 관제의 격하
고려의 왕실용어와 관제를 격하시켰다.
⑴ 관제의 격하
고려 전기(2성6부) | 충렬왕 원년(1부 4사)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 첨의부(僉議부) |
상서성(尙書省) | |
도병마사(都兵馬使) |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
중추원(中樞院)→추밀원(樞密院) | 밀직사(密直司) |
어사대(御史臺) | 감찰사(監察司) |
한림원(翰林院 | 문한서(文翰署) |
이부(吏部) | 전리사(典理司) |
호부(戶部) | 판도사(版圖司) |
예부(禮部) | 폐지(전리사에 통폐합) |
병부(兵部) | 군부사(軍簿司) |
형부(刑部) | 전법사(典法司) |
공부(工部) | 폐지 |
국자감(國子監) | 국학(國學) |
⑵ 왕실 용어 격하
원 간섭기 이전 | 원간섭기 |
조(祖), 종(宗) | 충~왕(忠~王) |
짐(朕) | 고(孤) |
폐하(陛下) | 전하(殿下) |
태자(太子) | 세자(世子) |
다. 정동행성의 설치(충렬왕 6년 1280년~1356년)
원은 일본 원정에 고려를 동원하기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폐지와 설치를 거듭하다가 충렬왕 11년 이후 계속 유지했다. 정동행성의 장관인 좌승상(左丞相)에는 고겨 국왕이 임명되었고 정동행성은 형식적인 기구였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통해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라. 영토상실
⑴ 쌍썽총관부(雙城摠管府, 1258~1358년)
고종 45년 1258년 조휘(趙暉), 탁청(卓靑)이 도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을 살해하고 몽골에 투항하면서 설치되었다가 공민왕 5년 1358년 무력으로 회복하였다.
⑵ 동녕부(東寧府, 1270~1290년)
원종 11년 1270년 최탄(崔坦), 한신(韓愼), 이정령(李廷齡), 계문비(桂文庇), 현효철(玄孝哲)등이 임연(林衍)이 왕을 쫓아내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을 때에 이를 토벌하다는 구실로 원나라에 투행했다가 충렬왕 16년 1290년에 회복하였다.
⑶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1273~1301)
원종 15년 1273년 삼별초난을 진압한후 설치하였다가 충렬왕 27년 1301년에 회복하였다.
마. 인적 물적 수탈
⑴ 인적 수탈
공녀(처녀, 寡婦處女推考別監[과부처녀추고별감]), 내시(환관) 등을 요구했다.
⑵ 물적 수탈
금, 은, 포백, 자기, 호피, 인삼, 해동청(海東靑, 매, 鷹坊[응방]) 등의 물품을 수탈했다.
바. 원 문화의 영향
⑴ 몽고풍과 고려양의 유행
변발, 호복, 조혼, 족두리, 연지 등의 몽고풍속이 고려에서 유행하였고 원에서는 고려쌈 등이 유행하였다.
⑵ 자주성 손상
⑶ 문물의 전래
원을 통하여 성리학, 화약, 서양문물이 전래되었다.
역대 국왕들의 왕권강화를 위한 신진세력 및 정권소외세력 등용
1. 고려 光宗의 과거합격자들의 활동
2. 고려 忠宣王 즉위년(충령왕원년, 1298) 사림원(詞林院) 신진학자들의 개혁운동
3. 고려 忠穆王 3년(1347년) 整治都監의 개혁운동
4. 고려 恭愍王 신진사대부의 정계진출
5. 조선 成宗 士林勢力의 등용
6. 조선 中宗 趙光祖의 등용
7. 조선 正祖 남인계열의 등용
8. 조선 高宗 大院君의 四色登用
2. 공민왕(恭愍王, 1351~1374)의 자주성 회복운동
가. 시기
14세기 중엽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적극적인 반원활동이 가능했다.
나. 반원정책
⑴ 몽골식의 폐지
몽골식 변발(辮髮)을 풀고 호복(胡服)을 벗었다.
⑵ 부원세력의 숙청
기철, 기륜, 기삼만, 기주 등 부원세력을 처형하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폐지했다.
⑶ 관제복구
원 간섭으로 격하된 관제를 복구했다.
⑷ 영토회복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회복하였으며 요동지방을 세 차례 공격하였다.
⑸ 친명정책 추진
종래의 친원정책을 버리고 친명정책을 추진하였다.
다. 내정개혁
⑴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 약화와 재정수입 기반 확보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수입의 기반을 확대하려 했다.
⑵ 신돈 등용과 개혁
승려인 신돈(辛旽, 遍照, ~1371)을 국사로 삼고 진평후, 판서문관사(음양관)에 봉하고 삼중대광령도첨의(三重大匡領都僉議)란 직을 제수하여 국가 정치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공민왕 15년 1366년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주인에게 반환하거나 해방하여 주었다.
⑶ 권문세족의 숙청과 한미한 자의 등용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수산 (李壽山), 찬성사(贊成事) 송경(宋卿), 밀직(密直) 한공의(韓公義), 정당(政堂) 원송수(元松壽)등 권문세족을 축출하고 한미(寒微)한 자를 등용하였다.
⑷ 정방(政房) 폐지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했다.
⑸ 성균관 재정비와 사대부 육성
왕 16년 1367년 성균관을 재정비하고 신진사대부를 육성하였다.
라. 개혁의 실패
권문세력의 반발로 신돈이 1371년 제거되고 공민왕이 최만생등에게 살해되면서 개혁은 중단되었다.
3.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가 권문세족(權門勢族)
⑴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대두한 가문
원의 환관으로 파견되어 고려에 돌아와 권력을 잡은 이숙, 방신우, 원에 세자를 수행한 측근들이다.
⑵ 권문세족의 범위
기존의 문벌귀족, 원왕실과 결혼한 가문(기철(奇轍), 권겸(權謙), 노책(盧頙)), 역인(조인규(趙仁規), 류청신(柳淸臣)), 응방(鷹坊) 출신(윤수(尹秀), 원경(元卿), 이정(李貞), 박의(朴義)) 원나라에 입조하는 국왕을 수행하는 공신, 원공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겁령구(怯令口, 인후(仁侯). 장순룡(張舜龍)), 원으로부터 군사직 만호(萬戶)를 얻어 출세한 경우 등이 포함되었었다.
⑶ 토지 침탈을 토한 농장경영과 부 축적
녹봉보다는 불법적인 토지 침탈을 통해 농장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나.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
⑴ 신진사대부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는 학자적 관료로서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지방의 향리 출신과 중앙의 이직자(吏職者)가 많았다.
⑵ 지방의 중소지주로서 성장했다.
⑶ 학문적 소양을 쌓아 과거(科擧)를 통해 관직으로 진출했다.
⑷ 고려 후기 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조선왕조의 건국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4. 고려의 멸망
가. 국제정세의 변화
⑴ 왜구와 홍건적의 창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간의 대립 상황속에서 왜구와 홍건적이 창궐했다. 이것은 원명교체기에 따른 영향이다.
홍건적의 격퇴
1359년 제1차 홍건적 격퇴 서경(이방경, 이승훈)
1361년 제2차 홍건적 격퇴 화주(정세운, 이성계)
왜구의 격퇴
우왕 2년 1376년 崔瑩 홍산대첩
우왕 6년 1380년 8월 崔茂宣 진포대첩
우왕 6년 1380년 9월 李成桂 황산대첩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 격파
우왕 9년 1383년 鄭地 관음포대첩
창왕 1년 1389년 朴葳 쓰시마(對馬島)정벌
세종 1년 1419년 李從茂 쓰시마(對馬島)정벌
⑵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
명나라가 요동지방에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고해 오자 최영(崔瑩) 등은 분개하여 요동지방을 수복하려 했다.
⑶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우왕 14년 1388년 최영을 8도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 좌군도통사로 하여 출병했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 4불가론
이성계는 우왕(禑王)과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자, 다음과 같은 4가지 근거(四不可)를 들며 반대하였다.
첫째, 이소역대 (以少逆大)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 소역대(以小逆大)
둘째, 하월발병(夏月發兵)
여름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夏月發兵)
셋째, 거국원정 왜승기허(擧國遠征 倭乘其虛)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다. (擧國遠征, 倭乘其虛)
넷째,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질역(時方暑雨 弩弓解膠 大軍疾疫)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다.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나. 이성계의 집권
⑴ 실권 장악
1388년 위화도 회군이후 신진사대부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⑵ 과전법 시행
전제개혁을 추진하여 공양왕 3년 1391년 과전법(科田法)이 공포되어 권문세력은 타격을 받고 신진관료들은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⑶ 신진사대부의 분화
산진사대부는 온건파(정몽주, 길재 등)와 역성혁명파(이성계, 정도전 등)로 분화하였다. 역성혁명파는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1392년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