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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시민교육을 제안하며
삼호중학교 정종삼
1. 어쩌다 선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
‘어쩌다 선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일본의 코로노 신이치의 소설 ‘어쩌다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라는 제목처럼 현재 우리 학교에서는 학생이나 교사모두 어쩌다 이렇게들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교사인 입장에서 아이들은 수업 중에 통제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개성이 넘쳐나건, 남과는 다른 존재감을 지상과제로 생각하건 학생들은 교사의 통제 밖에서 두드러져 보이고자 한다. 이 때문에 교사들은 매일 매일 힘들게 수업을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버티고 있는 교사들은 자신의 옆에서 유능하게 학생들을 잘 잡는 ‘카리스마 넘치는 교사’를 부러워하며 그와 같은 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교사들은 아이들을 휘어잡는 강력한 눈빛과 아이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 언변으로 학생들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다루며 이를 위해 사용하는 기술들은 강력하고 멋져 보인다. 그런데 나도 그런 선생님처럼 카리스마 넘치게 아이들을 휘어잡아보자고 했다가 애들에게 화만 내고 관계만 서먹해 졌던 경험이 있다. 어찌보면 카리스마도 아무나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보다.
2. 카리스마 교사의 슬픈 자화상
그런데 카리스마 넘치게 학생들을 이끌어가는 교사는 바람직 교사의 모습일까? 교사의 권위는 카리스마에서 나와야 하는 것일까? 교사의 강력한 눈빛과 언변으로 학생들을 휘어잡는 교사는 스스로는 수업과 학급운영에 주체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학생들은 교사의 주도성에 이끌리어 따라가야 하는 주변인에 머무르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이 때 수업은 화려하고 학생은 참여적이다. 하지만 교사의 계획이 완벽하기 때문에 수업을 멋지게 이끌어가는 선생님은 보이지만, 주체적으로 자기 사유와 자기 탐구를 수업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 나가는 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학생들은 열심히 대답하고 활동에 따라가지만 교사의 지도와 활동을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주변부의 소외된 학습 노동자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사가 카리스마 있을 때 학생들은 수업에서 주변부로 밀려난다는 점도 문제이지만,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카리스마 있는 사람에게는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그렇지 않은 선생님에게는 폭력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교사가 학생을 제압하는 언변과 제스처로 학생들 통솔하고자 한다면 이로 인해 아이들은 강한 사람 앞에서는 위축되더라도 약자 앞에서는 그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괴물 같은 아이들로 길러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런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강한 사람에게는 순종적이고 약한 사람에게는 폭력적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만연해 지자 이제 우리사회를 진단하는 새로운 용어로 ‘갑질 문화’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교육은 (강한 자에게)겉으로는 착한 척 하지만 속은 선하지 않은 위선자(僞善者)를 길러내는 교육을 해온 것일지 모른다.
3. 민주시민교육이 필요하다.
이제 우리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무서워서 따르는 것이 아니며, 약해 보인다고 무시하지 않고 올바르기(rightness) 때문에 따르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누구한테도 침해 받아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며, 이러한 소중한 사람들과 더불어 가치 있는 것들을 만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의 지향점을 나는 ‘민주시민교육’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이렇게 본다면 ‘민주시민교육’은 교육이 지향해야할 본질 또는 철학적 지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와 더불어 우리는 모두 소중한 인권을 갖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시민으로 길러내고자 하는 민주시민교육이 최근 우리 교육계에 주목 받고 있다는 사실은 늦었지만 매우 기쁜 일이다.
4. 역량만으로 온전한가?
2015 교육과정과 더불어 최근까지 학교에서는 ‘역량중심교육’이 강조되어 왔다. 만일 우리 교육에서 강조하고 있는 역량의 증진이 더불어 살아가는 민주시민의 자질과 무관하게 각자도생을 위한 ‘역량’으로 또는 자신이 노력하여 성취해낸 ‘역량’은 오로지 나의 것이며 이로 인해 자신이 보상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적인 인간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장은주) 이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따라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할 ‘역량’이라는 개념도 ‘민주시민교육’이 지향하는 가치와 규범의 기반 위에서 재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5. 삶의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민주시민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민주주의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民主主義)’라는 말에 ‘주의(主義,~ism)’가 붙어 있어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떤 이념이나 신념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더불어 우리사회가 압축 근대화 이후 정치적 민주화와 절차적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기를 거쳐 오면서 민주주의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도달해야 하는 이상향의 세계처럼 여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일차적으로 이념이나 지향점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demos(민중)+kratia(지배), 즉 시민이 자기 삶을 스스로 규정하고 만들어나가며 통제할 수 있는 삶의 양식이며 문화여야 한다. 이 때문에 듀이는 그의 책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의 형태만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공동생활의 형식이요 경험을 전달하고 공유하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민주주의는 다른 시민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에서 상호 존중을 통한 합리적 의사결정을 만들어가는 삶의 방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사용되는 ‘민주주의’의 의미는 삶의 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칭하는 것으로 하고자 한다.
6. 민주주의의 반대말
민주주의는 공동의 지배 즉, 공동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관리해 나가는 체제인 만큼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가 설정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다른 정치 체제와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갖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결정하고 추진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공동의 문제는 남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한다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이러한 공동의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고 누군가에게 자신의 결정을 위임함으로써 소수가 결정해 버리는 체제가 만들어 질 수 있다. 이처럼 소수가 다수의 의사를 결정하게 될 때 이러한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와 반대의 정치체제가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 반대 개념은 ‘소수지배 또는 독재’이다.
7. 성숙한 민주시민이란
민주주의가 작동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과 더불어 공동체의 문제를 정의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고 함께 실천해 나가는 주체적 시민을 전제로 해야 한다. 만약 민주적인 삶의 양식을 터득한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다수의 바보들이 결정하는 중우정치(衆愚政治)로 흘러가거나 순진한 시민들을 이용하는 직업 정치인의 농간에 국가는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게 하는 유능한 민주시민이 지속적으로 사회에 충원되어야 유지될 수 있는 체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민주시민교육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과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독일의 정치가이자 정치학자인 테오도어 에센부르크는 “누구도 독재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시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 성숙한 시민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일은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성숙한 시민이란 어떤 사람일까? 나는 여기에서 김광규의 시 ‘생각과 사이’를 통해 성숙한 시민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생각과 사이 /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시인은 각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사이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위치와 처지에 함몰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처지와 상황 그 사이에서 사유할 때 우리는 더불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함께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담임업무를 하는 교사와 업무전담팀을 하는 선생님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어려움만을 토로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내가 힘드니 당신이 좀 더 일을 가져가라고 서로 떠미는 이야기를 한다. 왜 서로가 힘든지 상대의 입장과 처지에서 생각하기 위한 노력, 그리고 어떻게 하면 교육적으로 필요한 일과 줄여나가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에 대한 공동 숙의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무실 내에 업무갈등의 해결은 어려워질 것이다.
결국 성숙한 시민이란 상대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이 고려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더욱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고려할 수 있는 사람이 나의 가족에 머물러 있다면 이를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라고 부른다. 가족은 소중하다. 하지만 그 소중함이 내 가족, 내 자식에게만 머물러 있다면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더불어 내가 속한 공동체, 지역만 또는 국가만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같은 의미로 한계가 있다. 성숙한 민주시민은 얼마나 많은 인간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계인권선언’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8. 독일에서 배우는 민주시민교육의 방향
성숙한 민주시민을 어떻게 길러내야 할지는 우리나라만의 과제는 아니다. 실질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세계의 많은 나라들 또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 오고 있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분단 상황에서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심각했던 독일은 이러한 이념적 대립을 넘어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학교 안에서 교육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만들어 냈다. 이 합의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
이 합의는 아이들과 정치적인 사안을 교육적으로 다루는데 있어 최소한 지켜 져야할 약속으로 다음 세 가지 합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첫째, ‘강압 금지’에 대한 합의이다. 이는 ‘올바른 견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과 학습자들을 논리적으로 제압한다거나 그들의 자립적인 판단 능력을 방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논쟁성 원칙’이다. 학문과 정치에서 다투는 쟁점들은 학교의 수업에서도 논쟁적으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셋째, ‘학습자 이해관계 인지 원칙’이다. 이는 학습자 중심 원칙으로 학생들은 정치 상황과 자신의 이익 상태를 분석할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보이텔스바흐 합의는 교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화의 위험을 차단하고 학생과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사안에 대해 정답을 정해 놓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해 볼 수 있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정확하게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9. 수업에서 논쟁이 필요한 이유
민주주의는 다원성을 생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그러한 의견들이 경쟁하는 정치적 공론장을 생명으로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서 의견의 대립과 충돌은 당연하며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다. 만약 공론의 과정 없이 소수가 결정해 버리거나 여론몰이로 대중의 의견을 흐리게 한다면 민주주의의 대의는 흔들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특성이 학교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제 민주시민교육을 하고자 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의견과 주장에 대해 자유로운 논의에 따른 결정과 실천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결국 민주시민교육에 있어서 토론과 논쟁은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적인 숙의 방식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동기는 비판적 논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공동체의 민주주의 학습 과정은 구성원들 간의 비판과 논쟁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판과 논쟁을 통해 비로소 민주주의는 행위나 제도를 넘어 과정이자 문화가 된다. 주장과 반박, 논증과 설득, 경쟁과 쟁투, 대안과 타협, 조정과 합의, 유보와 미결 등이야말로 민주주의 정치 과정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사상의 자유와 견해의 다양성을 보장하기에 헌정 질서와 사회 체제의 결함 및 문제에 대한 비판도 용인된다. 정치 체제와 규범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지향은 허용될 뿐만 아니라 때로 권장된다.”
민주시민교육은 자기 이유를 근거로 하여 자기 판단과 자기 결정을 가능하게 하는 논쟁과 숙의 중심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 판단을 통해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자기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각각의 입장이 학생들의 논의 과정을 통해 검토되고 비판되고 개선책을 찾아내고 자신과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발견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배움을 경험한 학생들은 하나의 주의주장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도 대화가 가능한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꼴, 빠, 충’등이 사회적 이슈에 있어서 극단적인 자기주장만을 배설함으로써 민주적이고 생산적인 논의를 막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열린 논의를 만들어 가는 수업의 필요성은 더욱 중요해 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모든 주의와 주장이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근본가치인 자율과 인간존엄을 해치는 주의와 주장,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는 주의와 주장은 논의될 수 있지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의와 주장이 민주주의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0. 민주시민교육은 자치 역량을 실천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민주적인 제도와 절차 그리고 민주주의의 역사만을 습득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배움에서 있어 경험과 실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 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국 민주시민은 민주적인 삶의 양식을 경험해 봄으로써 민주적인 삶의 양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민주적 삶의 양식은 자기 삶에 주인으로서 결정하고 실행함으로써 길러지게 된다. 따라서 학생들은 학기 초에 학급에서부터 주인으로서 결정하고 실행하는 주체로서의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학기 초에 학급 구성원들과 더불어 학급의 비전을 협의를 통해 세운다. 그리고 이 비전을 이끌어갈 대표를 학급 선거를 통해 선출한다. 그리고 학급운영비를 학급 비전을 이루어가는 데 필요한 예산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학급회 후보들은 공약사항으로 학급운영비 사용계획을 발표하고 후보자간 토론회를 진행해 볼 수도 있다. 더불어 자신들이 뽑은 대표가 이러한 비전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함께 점검하고 개선점과 실천과제를 찾고 실천해 나가는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학생자치의 출발은 학급회여야 한다.
더불어 잘 짜인 학급회를 바탕으로 동 학년 학생들은 학년의 문제와 행사를 학년회를 통해 기획하고 실천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학년들이 직접 학년회 대표를 뽑아 보는 작은 학생회 선거를 기획해 보는 것도 제안해 본다. 민주적인 학년회가 자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면 학년도 하나의 작은 학교로 독립성과 자치역량을 갖춘 ‘작은 학교(small school)’의 특성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학급회, 학년회를 통해 모여진 자치역량은 최종적으로 전체 학생회를 통해 표현되고 구현되어야 한다. 전체 학생회는 학급회부터 올라온 학교 안의 의제를 수렴하여 의결하고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 더불어 전체 학생회를 통해 전체 학생들이 참여하는 행사와 그들의 문제를 논의하고 함께 진행하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학생들은 학급회, 학년회, 전체 학생회를 통해 자치 역량을 경험함으로써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과 자질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을 믿고 기회를 주면 그 만큼 주면 그만큼 학생들은 성장해 나간다. 학생들이 성장하는 것은 ‘실천적 지혜’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란 실제로 자기 기획에 의해 실행해 봄으로써 그 안에서 필요한 지식과 가치와 태도 그리고 방법을 통합적으로 습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11. 교사가 먼저 민주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
무엇을 경험한 사람이 그것을 가르치는 것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의 질은 매우 다를 것이다. 경험하지 못하고 가르칠 때 그 가르침은 피상적이어서 학생들이 공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삶과 연결되어 이해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교사가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가르칠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적 삶의 태도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 그리고 실천성을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학교를 하나의 민주적인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한다면 교사부터 민주적 삶을 실천해 나가야 한다.
민주주의를 삶의 양식으로서 접근할 때 교사에게 학교는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공간이어야 한다. 소수 관리자나 부장들이 일방적으로 학교 운영방안을 결정하는 공간이어서는 안 된다. 학교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면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일반교사들과 관리자들이 함께 논의하고 의결하는 공식 기구와 방식이 법적으로 보호되어야 한다. 최근 교육부에서 학생과 학부모회의 법적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교사회의 법적 기구화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의 3주체에 교사가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학교의 민주주의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반영하고 있지 못한 처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교사와 학교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안에 대해 함께 의논하고 같이 해결방안을 찾아가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회의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실제로 회의가 너무 많을 수도 있지만 회의가 효율적이지 않게 운영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 더불어 논의 과정이 너무 딱딱해서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기에 불편한 회의 구조일 수도 있다. 따라서 회의구조를 다양한 토론・토의 기법을 적용하여 진행해 볼 것을 제안한다. 월드카페나 PMI 기법 등 다양한 토론기법을 적용해 본다면 즐겁게 토의 토론에 참여하고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사회에서 토의와 토론을 통해 도출된 결과에 대해서는 함께 학교교육과정 운영에 반영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육과정에 실질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고 운영 주체를 뽑고 협력체계를 조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자발적 협력에 의해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민주주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자발성을 담보하지 않으면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위한 자발성은 공동체가 자신에게 이타적이며 힘들 때 힘이 되어주고 배려해 준다는 느낌을 받을 때 생겨나는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은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협력을 제공할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인 공동체의 협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 교사 공동체는 매우 강한 래포를 일상에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래포 안에서 자발적인 협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디자인하고 실천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실천 방안으로는 다양한 방안이 있지만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방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디자인씽킹이란? 디자인(Design)+씽킹(Thinking)의 합성어로 사람이 경험하는 환경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현재 갖고 있는 문제를 개선함으로써 좀 더 나은 상태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진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행 아이디어를 협업을 통해 모으고, 직접 실행을 통해 환경을 변화시켜 나가는 사고의 태도(Mindset)라고 할 수 있다. 공감을 통해 현재 집단이나 조직 그리고 환경상의 문제를 발견 해결방안을 만들어 실천해 보고 안 되면 또 새로운 방안을 찾고 실천해 보는 과정을 통해 문제를 점차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실천적 지혜와 태도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처럼 교사들도 민주적인 삶을 실천해 보는 경험을 통해 민주적인 삶을 살아가는 교사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경험은 학생들의 민주시민교육의 자양분으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현재 우리 학교에 존재하는지에 관한 성찰이다. 수업은 많고 업무는 과하다. 선생님들이 서로 얼굴 볼 시간이 없다고 느낀다면 가장 먼저 선생님들이 서로 편안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 (Martha C. Nussbaum)은 역량의 개념을 “역량'은 한 사람이 타고난 능력과 재능인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기회의 집합을 의미한다.”고 이야기 한다. 즉 역량이란 개인의 내적 특성과 더불어 이러한 특성을 구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환경이 구비되어 있는 상태까지를 역량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교사에게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제공해 주는 역할은 교육부와 교육관계자들의 과제인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는 곳에서 하라고 하는 것은 폭력적이며 결국에는 불필요한 업무의 과중으로 인해 번아웃(Burn-out) 된 교사들의 허무적인 냉소만이 교직사회에 넘쳐날 것이다. 따라서 교육부와 교육청은 교사들의 업무를 어떻게 슬림화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급하게 해야 한다.
12. 선생을 하고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다.
웃는 얼굴로 수업에 들어가 반갑게 웃으면서 학생들과 인사를 하면 학생들도 밝은 마음으로 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인상 쓰고 있거나 업무에 찌든 무표정한 모습으로 수업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수업에 대한 기대감도 없이 무기력해진다.
선생님은 학교에서 행복해져야 하고 이러한 행복이 학생들에게 흘러들게 해야 한다. 선생님들에게 학교에서 하는 일들이 재미있고 자기를 성장시킨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나아가 학교는 저 경력 교사도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더라도 눈치 받지 않는 공간이어야 한다. 더불어 경력이 있는 교사들의 다양한 경험에서 만들어진 소중한 실천적 지혜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학교는 학생과 교육을 위한 다양한 실천들이 행복하게 만들어지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 안에서 학생들은 행복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자발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길러가게 될 것이다. 학교는 이러한 공간이어야 하며 이러한 공간을 민주시민교육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민주시민교육은 학교구성원들이 모두 행복해지는 교육이며 그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학교가 행복한 민주시민을 길러낼 수 있는 교육의 공간이 된다면 어쩌다 선생 같은 것을 하고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아닌 선생이어서 행복하다는 마음을 누구나 갖게 될 것이다. 행복이란 자발성과 자기 성장의 느낌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행복한 학교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