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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참혹한 현실
읍내 초동리에 살았던 서사술이 삼성암으로부터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삼성암은 서봉 턱밑이다. 그곳마저 위태롭다면 우리 머리 위에서 곧 화가 미칠 터였다. 식솔들이 놀라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짐승 떼가 흩어지는 듯했다.
곁에 있던 채명서가 서둘러 말했다.
“이곳은 더는 지탱하기 어렵소. 저는 동화사 서쪽 불당으로 자리를 옮기겠소.”
나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누구든 당장의 안위를 먼저 도모할 수밖에 없는 판이었다. 그는 며칠 전 왜적과 교전한 경험도 있었다. 왜적의 실체를 알고 있는 무장이었다.
나는 고개에 올라 멀리 적진을 바라보았다. 연기와 먼지가 일어나는 곳마다 왜적의 수가 불어나 보였다.
뒤에서 일하는 사람이 다가왔다.
“주인어른, 해안 창고에서 콩 한 섬을 얻어왔나이다.”
그때 서경익이 동화사에서 돌아왔다.
“경성에서 적을 막아낼 좋은 계책이 나왔다 하오.”
숙부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한순간이었으나 침울하던 기운이 조금 밝아졌다. 나 또한 마음속에서 미약한 불씨가 되살아났다.
이튿날, 읍내 쪽을 바라보니 연기와 불이 다시 일어났다. 사람들이 손 들어 가리키며 말을 주고받았다.
“저기 보게, 남산리 쪽이야.”
“집들이 줄지어 있던 곳인데, 이제는 초석만 남았겠군.”
“기억 속에 있던 모습만 간직하세.”
전쟁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칼이 세상을 평정했다. 가장 확실한 평정은 죽음이었다. 죽음은 쏘거나 벨 필요도 없었다.
칼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서로 뒤채이며 저절로 무너졌다. 마음 놓고 우는 길고 깊은 울음은 끝이 없었다.
일 보는 사람을 읍성 인근의 내 집으로 내려 보냈다. 이튿날 저녁, 그는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품에서 서책 스무 권 남짓을 꺼냈다.
“그나마 불길이 덮치지 않은 곳에서 겨우 건져낸 것들이나이다.”
그의 목소리는 모기만 했다. 얼굴빛에는 두려움과 허탈이 엉겨 있었다. 집은 이미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했다. 천여 권에 이르던 시서詩書가 연못에 내던져져, 잿더미와 함께 사라졌다. 손끝이 떨렸다. 불길이 내 서재의 문짝을 태우고, 장서를 따라 번져가며 글자 하나하나를 삼켜버리는 광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평생을 걸어 쌓은 시간이 한낱 연기로 흩어졌다. 몸이 허물어지는 듯했다. 그 책들은 내 삶의 연륜이었다. 세월의 기록이었으며, 나의 피와 온기가 깃든 벗들이었다.
세상이 무너질 때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 앞에서 철저히 무력했다. 창끝보다도, 불보다도 더한 것은 인간의 무능함이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밤이 깊도록 등잔불 앞에 앉아 있었다. 살아남은 책 몇 권을 펼쳤다. 그을음 냄새 속에서, 내 손끝은 재처럼 허물어졌다.
임연이 찾아와 산중에 거처할 만한 곳을 물색했다. 부인리의 위쪽, 수태골의 서쪽이었다. 골짜기는 산자락이 빙빙 감아 도는 모양이라, 바람길조차 닿기 어려웠다. 길은 험하고 외따로 있어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었다. 왜적의 눈길을 피하기에 그만한 곳도 다시 없었다.
그 숨음은 또한 곧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 숨어야 했다. 다행이라 여겨지는 내 마음이 애처로웠다.
저녁 무렵. 동화사 주변에 피난민들이 모여 웅성거렸다. 얼굴마다 피로와 공포가 묻어 있었다.
“하빈에서 왜적들이 또다시 날뛴다 하오. 그 발길 닿는 곳마다 울부짖음이 멎질 않는다네요.”
말하는 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유진장 박경술 댁도 무사치 못하다 들었소.”
“두 따님이 그만 낙동강에 몸을 던졌다 하오.”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니!”
“유진장 일가는 멀리 달아날 형편이 아니었다 하오.”
“집안 살림에 노약자까지 거느리고 어찌 험한 길을 나서겠소.”
젊은 사내가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산기슭에다 은신처를 마련했다더이다. 땅을 깊이 파고 나무판을 얹은 뒤 흙과 풀을 덮었소. 언뜻 보아서는 밭둑처럼 보이게 했다 하오.”
“그 속에서 온 가족이 몸을 숨겼는가 보군.”
“들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소. 이토록 참혹한 세상이 또 어디 있겠소.”
박 유진장 일가족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습기가 가득 차고 빛조차 닿지 않는 답답한 공간이었다. 서로의 숨소리조차 억누르며 버텨야 했으리라.
“기침도 참아라. 소리 하나가 화를 불러올 수 있다.”
“차라리 들키는 편이 더 나을지도…”
며느리의 떨리는 목소리에 시어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쉿, 그런 말 마라.”
그러나 이 비밀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바깥에서 철렁거리는 창검소리를 듣자,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땅 위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연기가 구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참혹한 최후는 곧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전해졌다. 누구도 감히 그 죽음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모두의 가슴속에는 두려움과 슬픔이 동시에 남았다.
그것은 단순히 한 집안의 몰락 이상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 할 난세에, 밀고로 인해 한 집안이 송두리째 꺾여나간 장면이었다. 왜적의 칼날이 백성의 살만 베어간 것이 아니었다. 인간 사이의 믿음과 희망마저도 무너뜨리고 있었다.
박 유진장의 두 첩은 끌려갔다. 쇠사슬에 묶이지 않았으되, 살아서 몸이 욕보임을 당해야 했다. 그 사건은 곧 이 고을의 굴욕이었다.
고을마다 폐허가 되었다. 피를 부른 현장에 기적처럼 실체가 있었다. 그 실체만은 적의 칼에 베여지지 않았다. 적이 아무리 날뛰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조선의 혼이었다.
문왕은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문文은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文王既沒,文不在茲乎.
비가 하루 종일 암자 처마를 두드리고 있었다. 산중의 비는 유난히 묵직했다. 마치 하늘이 그간의 모든 근심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듯했다.
그런 날, 동생 서사막이 부인리에서 찾아왔다. 젖은 옷자락을 쥐어짜며 숨을 고르는 그의 모습은 평소 그가 가진 침착함과는 달랐다.
“형님, 부인리도 더는 편안치 않사옵니다.”
그를 정각암의 작은 방으로 들였다. 젖은 나무 냄새가 가득했다. 우리는 모로 앉아 한동안 말없이 빗소리를 들었다. 이런 침묵은 피난 이후 우리 형제 사이에 자주 있던 일이었다.
왜적의 척후가 들락거린 마을, 도망치다 실종된 이웃, 군색해진 사람들, 곳곳에서 피난 가마가 서둘러 짐을 꾸리던 모습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과장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고을 전체가 텅 비게 될 것이옵니다. 누구는 산으로 들었고, 누구는 밤에 몰래 빠져나갔다고 하던데. 이 고을에 붙을 기둥이 이젠 하나도 안 남을 것이오.”
서사막은 품에서 젖은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부인리와 주변 촌락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장정 수, 보급할 수 있는 곡식과 의복의 분량이 적혀 있었다.
“형님이 결심하신다면, 이 사람들을 모으겠소. 부인리 쪽 보급도 제가 맡겠나이다.”
비는 점점 더 굵어졌다. 암자 마룻바닥에 습기가 스며들었다.
나는 그가 가져온 종이를 펼쳐 놓고, 한 줄 한 줄 살폈다. 병력이 많다고 할 수 없는 숫자. 지금 우리의 처지에서는 귀한 힘이었다.
대화는 집안 어른들과 어린 조카들의 처지로 흘렀다.
“형님, 어머니께서 더는 산길을 탈 기력이 없으십니다. 여기 정각암이라면… 당분간은 괜찮겠지요?”
나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안전’이란 말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내가 짊어진 자리의 무게가 더욱 또렷해졌다.
“아우, 이 전란은 하루이틀에 그치지 않네. 나는 의병을 모을 것이다. 대구의 어른들도 이미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
“형님이 서신을 내리면 제가 곧바로 움직이겠소. 사람을 모으고, 곡식을 조달하고, 형님께 필요한 연락도 모두 맡겠소.”
형제가 나눈 이 짧은 만남은 단순한 가족의 재회가 아니었다.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긴 싸움의 첫 장을 여는 행위였다.
그날 밤, 나는 암자 뜰에 나서 비를 맞으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비는 전란의 먼지를 씻기에 부족했다. 내 마음의 결단을 약하게 만들기에는 더더욱 모자랐다.
동화사에 통문이 차례차례 도착했다. 강원감사의 관내에는 적의 기세가 이미 쇠잔하였다고 한다. 군사들이 오래도록 왜적 진영을 공격했으므로 피곤할 것이라는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정교한 무기와 활쏘기에 능한 군사들이 계속 차례대로 달려와 싸웠다. 마침내 적의 기세는 꺾였다. 군사들이 의기를 떨쳤다고 한다.
또 다른 통문에는 더 과장된 전황이 실려 있었다. 정예로 뽑힌 군마가 요로에 잠복해 있었다. 퇴각하던 왜적의 후미를 기습하여 단숨에 섬멸했다. 문장은 기세 좋게 이어졌다. ‘신인神人의 분노가 이제야 씻기었다.’
나는 그 문구를 오래 바라보았다. 신인의 분노라니. 하늘이 직접 칼을 들어 우리의 울분을 대신 갚아준 듯한 말투였다. 전란의 참혹함 속에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라도 들으면서, 흔들리는 마음을 꽉 붙들고 싶었던 것일까. 통문 한 장의 붓결이 현실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또 그 안에 얼마나 많은 허기가 숨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적을 섬멸했는지, 아니면 퇴각하는 왜적 몇 명을 따라잡은 일에 승전이란 이름을 씌운 것인지, 그 진위를 누구도 단정할 수 없었다. 그 또한 그들 나름의 생존이리라.
청송부의 전통에는 왜적이 모두 주륙되고 낙동강에서는 외선이 분탕되었다고 했다.
“왜적이 파계사까지 왔다 한다!”
“그럼, 여기도 금세 들이닥치겠구나.”
숙부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식솔들은 부득이 더 깊은 골짜기로 몸을 옮겼다. 나무 그늘이 겹겹이 드리워져 햇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이었다. 바람 스치는 소리마저 왜적의 발소리 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곤 했다.
밤이 깊어 가자 불안한 소문은 차츰 가라앉았다. 뒤에서 어떤 사람이 다가와 속삭였다.
“적이 물러갔다 합니다.”
그제야 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골짜기 위로 달빛이 희미하게 흘렀다. 숙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괜찮은 거겠지?”
“언제 도로 들이닥칠는지 알 길이 없사옵니다. 지금은 그저 숨 돌릴 한때를 얻었을 뿐이옵지요.”
달빛 아래 고요는 결코 평안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왜적의 살기와 마주하고 있다. 대적해 보지도 않은 왜적을 향해 내 무딘 상상의 칼을 겨눴다. 내 칼을 받아야 할 왜적은 내게 너무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 존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몸을 노리는 독충들이었다. 내, 이것들을 의로써 베리라. 의로움을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見義不爲,無勇也.
첩의 병세는 날로 깊어져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숨은 붙어 있어도 속기速氣가 다할 것이네.”
숙부가 말했다. 나는 더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가마를 준비하라. 불운암으로 옮긴다.”
비가 세차게 내린 산길이었다. 흙탕물이 발목을 감고 내려갔다. 바람은 젖은 솔잎 사이로 날을 세웠다.
“부디 잠시만 견디시오. 곧 부인사 언저리에 닿을 것이오.”
나는 말없이 직접 가마채를 잡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가마의 흔들림이 전해졌다. 첩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고통의 떨림과 뒤섞였다. 산새 한 마리 울지 않았다. 그날의 산은 숨어드는 사람들의 기척을 모두 삼킨 듯했다.
뒤따르던 숙부가 말했다.
“서두르자꾸나. 왜적이 들판을 휩쓸었다는 말이 있어. 언제 산등성이까지 번질지 알 수 없지.”
하늘은 어둑한데, 산길은 끝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비명도, 통곡도, 모든 소리가 멀어진 듯한 고요 속에서 우리는 한 줄기 희미한 숨구멍을 찾아 산을 헤매고 있었다.
낯선 사내가 집 앞을 지나가다 문득 나를 찾았다. 이름을 고등지, 서울 사람이라 했다. 만 리를 달려온 소식통이나 다름없었다.
“한양에서 바로 내려온 것이오?”
그가 지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먼 길을 걸어온 자의 어깨는 먼지로 희어 있었다. 신 발굽은 거의 닳았다.
“왜적이 성을 점거한 지 이미 오래라…,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소. 대궐이 비워지고, 왕상께서는….”
“그대가 본 것을 모두 말해주시오.”
그는 조정이 피란하고, 길 위에 널린 백성들의 울부짖음, 한양 관원의 동요, 산처럼 쌓인 패전의 소문을 전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지도에서만 보던 전란의 그림을 무참한 실상으로 바꿔놓았다.
나는 즉시 그를 데리고 동화사로 갔다. 고등지가 가진 정보는 나 하나만 알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부사께 전해야 할 국가의 급전急電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