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檀君世家
許 穆
上古九夷之初에 有桓因氏한데 桓因이 生神市라 始敎生民之治하니 民歸之라
上古의 九夷가 살던 시절 초기에 桓因氏가 있었는데, 환인이 神市를 낳았다. 신시가 처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가르치니, 백성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 구이(九夷): 동방에 위치한 9종의 민족을 말한다. 구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국역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에서는 《후한서(後漢書)》 및 《논어정의(論語正義)》의 설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신라 승려 안홍(安弘)의 설을 소개하고, 구이의 명칭에 대한 시대적 고찰을 통해 《후한서》의 설을 근거 있는 것으로 보았다. 《후한서》 〈동이전(東夷傳)〉에 수록된 구이는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이다.
* 신시(神市):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태백산(太白山) 정상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고 하였으니, 이 사람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시는 환웅이 처음 건설한 도시인데 여기에서는 환웅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태백산을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다.
神市ㅣ 生檀君하니 居檀樹下하고 號曰 檀君이라 始有國號하여 曰 朝鮮이라하니 朝鮮者는 東表日出之名이라 或曰 鮮은 汕也라 其國有汕水라 故曰 朝鮮이라 都平壤하니 陶唐氏立二十五年이라
신시가 檀君을 낳으니, 단군이 神檀樹 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호를 단군이라고 하였으며 처음으로 國號를 두어 朝鮮이라고 하였으니, 조선이란 동쪽 끝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혹은 말하기를 “鮮은 산(汕)이다. 그 나라에 汕水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平壤에 도읍하니, 陶唐氏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는 때이다.
* 산수(汕水): 《사기》 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의 주에 “조선에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가 있는데, 세 강이 합하여 열수가 되었다.” 하였는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서 “열수는 지금의 이른바 한수(漢水)이니, 이러고 보면 산수(汕水)와 습수(濕水)는 남강과 북강 두 강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다. 옛사람이 나누어 지적해 놓지 않아 근거할 만한 문적은 없지만, 북강의 물은 모두 뭇 산의 골짜기에서 나오니 이것이 산수이고, 남강의 물은 모두 원습지(原隰地)에서 나오니 이것이 습수이다. 글자의 의미가 명확하여 서로 혼동되지 않거니와, 직접 답사해 보면 전연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단정 지어 춘천(春川)과 낭천(狼川)의 물을 산수로 여긴다.” 하였다. 《국역 다산시문집 제22권 잡평》
* 평양(平壤): 《삼국유사》 〈고조선〉에는 평양성(平壤城)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서경(西京)’이라고 주가 달려 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 상(京都上)〉에는 “서경은 지대가 평탄하고 넓어 이름을 평양이라고 하였으며, 나라가 생길 때부터 이미 물에 임해 성을 높이 쌓았으니,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질 때 이미 있었다.” 하였다.
* 도당씨(陶唐氏): 요(堯) 임금의 호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 〈오제(五帝)〉의 주에 “요 임금이 처음에 당후(唐侯)였다가 나중에 천자가 되어 도(陶)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호를 도당씨라 한다.” 하였다.
檀君氏ㅣ 生夫婁라 或曰 解夫婁母는 非西岬女也라하다 禹ㅣ 平水土하고 會諸侯於塗山에 夫婁ㅣ 朝禹於塗山氏라
단군씨가 夫婁를 낳았다. 혹은 말하기를, “解夫婁의 어머니는 비서갑의 딸이다.”하였다. 禹임금이 水土를 평정하고 塗山에서 제후들을 회합할 때에 부루가 도산씨에서 우에게 조회하였다.
* 비서갑녀(非西岬女): 《삼국유사》 〈기이 제1 고구려〉에 〈단군기(檀君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단군이 서하의 하백의 딸과 친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하였다.〔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라고 하였고, 《동사강목》,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다른 자료에서는 대부분 ‘비서갑하백지녀(非西岬河伯之女)’라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비서갑은 지명으로 서하의 이칭인 듯하다. 서하가 어디를 말하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한국문집총간 249집에 수록된 《자저(自著)》 권1 〈광한부(廣韓賦)〉에 “서갑의 아름다운 여자를 배필로 맞이하고〔配西岬之佚女〕”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그 주에 “서갑은 지금의 영암(靈巖)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비서갑을 하백의 이칭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지명으로 볼 경우 ‘여(女)’ 자를 〈광한부〉에서처럼 ‘여자’로 해석해야 하는데, 다른 자료에 대부분 ‘하백의 딸’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後에 檀君氏ㅣ 徙居唐藏이라 至商武丁八年하여 檀君氏歿이라 松壤西에 有檀君塚이라(松壤은 今江東縣이라) 或曰 檀君이 入阿斯達이라하되 不言其所終이라 泰伯․阿斯達에 皆有檀君祠라
후에 단군씨가 거처를 唐藏으로 옮겼다. 商나라 武丁 8년에 이르러 단군씨가 죽었다. 松壤 서쪽에 단군의 무덤이 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이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태백산과 아사달산에 모두 단군의 사당이 있다.
* 당장(唐藏): 《삼국유사》에는 장당경(藏唐京)으로 되어 있다. 《국역 성호사설》 제15권 〈화령(和寧)〉에 “당장경(唐莊京)은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에 있다.” 하였다.
* 상무정팔년(商武丁八年): 상나라는 중국 탕(湯) 임금이 세운 나라로 은(殷)이라고도 한다. 무정은 쇠퇴해 가던 상나라를 다시 부흥시킨 왕으로 후에 고종(高宗)으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이때는 중국 연표에 의하면 기원전 13세기에 해당된다.
* 아사달(阿斯達): 《국역 성호사설》 제26권 〈삼성사(三聖祠)〉에 “아사(阿斯)는 우리말로 구(九)이고, 달(達)은 우리말로 월(月)이니,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이 이것이다.” 하였다. 구월산 역시 황해도 문화현에 있다.
夫婁ㅣ 立爲北扶餘라 夫婁ㅣ 禱於鯤淵하여 得金蛙한데 以貌類金蛙하여 命口金蛙라 夫婁之世에 商亡하니 箕子ㅣ 至朝鮮이라 後에 周德衰하니 孔子ㅣ 欲居九夷라
부루가 즉위하여 北扶餘를 세웠다. 부루가 鯤淵에 기도하여 金蛙를 얻었는데, 그 모습이 금개구리와 비슷하여 이름을 금와라고 한 것이다. 부루의 시대에 商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 그 후에 周나라의 덕이 衰退하니, 공자가 구이에 살고 싶어 하였다.
夫婁卒하고 金蛙嗣하여 徙迦葉原하고 爲東扶餘라 金蛙末에 秦幷天下하니 秦亡人이 入東界爲秦韓하고 漢高后時에 衛滿이 據朝鮮하니 朝鮮侯準南奔하여 至金馬爲馬韓이라
부루가 죽고 금와가 뒤를 이어 가섭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東扶餘를 세웠다. 금와 말에 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동쪽 경계로 들어와 秦韓을 세웠고, 漢나라 高后 때에 衛滿이 조선을 점거하자 朝鮮侯 箕準이 남쪽으로 달아나 金馬에 이르러서 馬韓을 세웠다.
* 가섭원(迦葉原): 하서량(河西良)이라고도 한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5집 정법집 제3권 경세유표 권3 〈군현분예(郡縣分隷)〉에 “가섭은 하서(河西)의 소리가 전이된 것이니,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하였다.
* 한고후시(漢高后時): 고후는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이다. 한 고조(漢高祖)의 비로 혜제(惠帝)를 낳았다. 혜제가 죽고 태자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고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하였는데, 이 시기를 말한다. 《漢書 卷3 高后本紀》
* 금마(金馬): 전라도 익산(益山)의 옛 이름이다.
孝武時에 略薉貊하여 薉君南閭降하니 初置滄海郡이라가 用丞相弘計하여 罷之라
漢나라 孝武帝 때에 薉貊을 공략하여 예맥의 군왕 남려가 항복하자, 처음에 滄海郡을 설치하였다가 승상 公孫弘의 계책을 써서 혁파하였다.
* 승상홍계(丞相弘計): 공손홍이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있을 때에 “중국을 피폐하게 하여 쓸모없는 땅을 받든다.”라는 이유로 창해군의 혁파를 주장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58 公孫弘傳》
金蛙ㅣ 傳帶素라 帶素ㅣ 恃其強大하고 與句麗爭攻伐이라가 卒爲所擊殺하고 其弟曷思(曷思는 非王名이라 都曷思에 號曰 曷思라)代立이라 至孫都頭降句麗하니 東扶餘亡이라
금와가 帶素에게 傳位하였다. 대소가 강대함을 믿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끝내 격살당하고, 동생 曷思(갈사는 왕의 이름이 아니다.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호를 갈사라고 하였다.)가 대신 즉위하였다. 손자 都頭에 이르러 고구려에 항복하니, 동부여가 망하였다.
考其年代하면 在莽之世라 桓因神市之世는 無所攷요 檀君之治는 自陶唐氏(堯임금)二十五年으로 歷虞夏氏(虞나라의 舜임금과 夏나라의 禹임금)하여 至商武丁八年히 千四十八年이요 解夫婁之後로 至曷思亡於莽之世히 亦千年이라 亦有餘種하여 通於晉이라
이때의 연대를 상고해 보면 漢나라 王莽의 시대에 해당한다. 환인과 신시의 시대는 고찰할 데가 없고, 단군의 치세는 도당씨 25년부터 虞나라 순임금과 夏나라 우임금을 거쳐 商나라 武丁8년에 이르기까지 1048년이고, 해부루 이후부터 갈사가 망한 王莽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1000년이다. 그러고도 후손이 있어 晉나라와 통하였다.
* 갈사국(曷思國): 기원 초엽 고구려 주변에 있었던 소국. 고구려가 22년(대무신왕 5)에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대소를 죽였을 때 대소왕의 아우가 신하 100여 명과 함께 압록곡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해두왕을 밀어낸 다음 갈사국을 세웠다. 갈사국이라는 명칭은 그 수도가 갈사수라는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 후 갈사국 왕은 이웃한 고구려의 왕과 혼인관계를 맺고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서 존재했는데 68년(태조 16)에 왕 도두가 고구려에 항복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고구려에서는 투항한 도두에게 우대라는 관직을 주어 고구려에 포섭했다.
金蛙ㅣ 悅優浡水之女한데(優浡은 澤名이라 在泰伯山南이라) 感日影照身하여 生朱蒙이라 朱蒙少子曰 溫祚라 檀君氏之後에 有解夫婁하고 解夫婁之後에 有金蛙하고 金蛙之後에 有朱蒙․溫祚하여 爲句麗․百濟之祖하니 皆本於檀君氏라
금와가 優浡水(우발은 늪〔澤〕 이름이다. 태백산 남쪽에 있다.)의 여자를 사랑하였는데, 우발수의 여자가 몸을 비추는 해그림자에 감응되어 朱蒙을 낳았다. 주몽의 작은아들은 온조溫祚이다. 단군씨의 후손에 解夫婁가 있고, 해부루의 후손에 金蛙가 있고, 금와의 후손에 朱蒙과 溫祚가 있어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가 되었으니, 모두 단군씨에게 뿌리를 둔 것이다.
扶餘는 在玄菟北千餘里라 南與鮮卑接하고 北至弱水하여 地方二千里하고 有城邑宮室이라 土宜五種하고 其人好勇強이라 有會同揖讓之禮하여 類中國하며 出使者는 衣錦罽하고 以金銀으로 飾其腰라
부여는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여 리 지점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鮮卑와 접경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弱水까지 이르러 면적이 사방 2000리이고, 城邑과 宮室이 형성되어 있었다. 토지는 오곡에 알맞고, 사람들은 용맹하고 강한 것을 좋아하였다. 會同하고 揖讓하는 禮가 있어 중국과 비슷하며, 사신이 되어 나가는 자는 금계로 만든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허리띠를 장식하였다.
* 금계(錦罽): 비단과 모직, 또는 이것으로 만든 옷.
其法에 殺人者는 死하고 沒入其家하며 盜는 一責十二하고 男女淫과 婦人妬者는 皆殺之라
그 법에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 다음 집을 몰수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경우에는 훔친 물건의 12배를 갚도록 하고, 남녀가 간음하거나 부인이 질투한 경우에는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 일책십이(一責十二): 훔친 물건의 12배를 갚도록 함.
有軍事면 殺牛以祭天하고 用其蹄하여 占吉凶하되 蹄解者凶하고 合者吉이라 死而葬하되 有槨無棺하며 殉用生人하고 居喪에 男女皆衣純白이라
전쟁이 일어나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를 올리고, 그 소의 발굽을 사용하여 길흉을 점치되, 발굽이 떨어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게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되, 외곽(外槨)만 쓰고 내관(內棺)은 쓰지 않았으며, 순장(殉葬)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쓰고, 거상(居喪) 중에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었다.
其地에 出善馬․貂豽․美珠하여 其國殷富라 其王印文曰 獩王之印이라하니 其國ㅣ 古獩貊之域이라
그 지역에서는 좋은 말, 담비 가죽, 표범 가죽, 아름다운 구슬이 생산되었고, 나라가 풍요롭고 부유하였다. 국왕의 인장은 獩王之印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 나라가 옛 예맥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晉武帝時(266~290年)에 通貢中國이라 太康六年에 爲慕容廆所襲破하여 其王依慮는 自殺하고 其子弟는 走保沃沮라 帝ㅣ 以東夷校尉鮮于嬰不救로 責免嬰하고 以何龕代之라 後年에 其嗣立王依羅가 詣龕乞援하니 帝遣督郵賈沈하여 擊破廆衆에 依羅得復國이라
晉武帝 때에 중국과 교통하여 공물을 바쳤다. 太康 6년에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왕 依慮는 자살하고 그 자제들이 옥저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였다. 진 무제가 東夷校尉 鮮于嬰이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우영을 파면하고 하감으로 대신하였다. 다음 해에 뒤를 이어 즉위한 왕 依羅가 하감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하니, 진 무제가 督郵 賈沈을 파견하여 모용외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이에 의라가 나라를 수복할 수 있었다.
* 태강육년(太康六年): 태강은 진 무제(晉武帝)의 연호로, 6년은 서기 285년이고, 신라(新羅) 유례왕(儒禮王) 2년에 해당한다.
* 독우(督郵): 본래는 중국 한(漢)나라 때에 각 지방 군수를 보좌하던 이속(吏屬)으로 군마다 2∼5명 정도 배치되어 지방의 풍속과 법률 위반 사항 등을 조사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었는데, 지방의 일반 향리들을 두루 일컬을 때에도 쓰임.
後廆侵掠扷餘人口하여 賣於中國한데 帝ㅣ 詔發官物하여 贖還하고 下司冀二州하여 禁市라
이 뒤로도 모용외가 침략하여 부여 사람들을 약탈해 중국에 팔아넘겼는데, 진 무제가 조서를 내려 관가의 재물을 풀어서 몸값을 물고 돌려보내 주었으며, 司州와 冀州에 영을 내려 인신매매를 금지하였다.
肅愼氏는 一名挹婁라 在不咸山北한데 東濱大海하고 西接寇漫汗하며 北至弱水라 居深山之地하여 車馬不通이라 夏則巢居하고 冬則宂處라 父子ㅣ 世爲君長이라
肅愼氏는 일명 挹婁라고도 한다. 不咸山 북쪽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大海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寇漫汗과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약수까지 이르렀다.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어서 수레나 말을 타고서는 다닐 수 없었다. 여름에는 나무 위에 움막을 짓고 살았으며 겨울에는 굴속에서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君長이 되었다.
* 숙신씨 일명읍루(肅愼氏 一名挹婁): 《국역 다산시문집》 제14권 〈강역고의 권단에 제함〉에 “우(虞), 하(夏), 은(殷), 주(周) 때에는 ‘숙신’이라고 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邑婁)’, 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 송(宋)나라 때는 ‘여진(女眞)’, 지금은 ‘오랄영고탑(烏喇寧古塔)’이라고 한다.” 하였다.
* 불함산(不咸山): 백두산(白頭山)의 옛 이름이다. 《국역 다산시문집》 제13권 〈백두산을 유람하러 가는 진택 신공 광하를 전송하는 서〉에 “백두산은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한 불함산이고, 지지(地志)에서 말한 장백산(長白山)이다.” 하였고, 《국역 동사강목》 부록 하권 〈개마대산고(蓋馬大山考)〉에 “개마대산이 백두산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조위(曹魏) 시대에는 불함산으로 일컬었다.” 하였다.
無文字하여 以言語約束이라 無牛羊하여 畜猪하여 食肉衣皮하며 織毛爲布라 有𨚷常하니 中國에 有聖王代立則生한데 其皮可衣라
문자가 없어서 말로 약속하였다. 소와 양은 없었고, 돼지를 길러 고기를 먹고 가죽은 옷으로 입었으며 털은 짜서 베를 만들었다. 각상(𨚷常)이라는 나무가 있으니, 중국에 聖王이 대를 이어서 즉위하면 나는 나무로, 그 껍질로는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 각상(𨚷常): 숙신씨 지역에 나는 나무 이름이다.
作瓦鬲한데 受四五升하며 以爲食이라 坐則箕踞라 無鹽鐵하며 燒木作灰하여 灌取汁食之라
瓦鬲을 만들었는데, 곡식 4, 5升을 담았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앉을 때는 다리를 뻗고 앉았다. 소금과 철이 없었으며,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든 다음 물을 부어 두었다가 그 즙을 취하여 먹었다.
* 와력(瓦鬲): 흙을 구워 만든 솥의 일종으로 음식을 끓이는 데에 쓴다.
男女皆編髮하고 作布襜尺餘하여 以掩前後라 夫貞女淫하며 貴牡賤老라 死則以死之日에 葬之中野한데 交木爲槨하고 殺猪積其上하여 以爲送死라
남녀 모두 編髮을 하였고, 1자가량 되는 布襜을 만들어 앞과 뒤를 가렸다. 부인은 정숙하고 미혼인 여자는 음란하였으며, 젊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 사람을 천시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그날로 들판 한가운데에 장사 지내되, 나무를 엇비슷이 세워 槨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 그 위에 쌓아 놓아 이로써 죽은 이를 보내는 예로 삼았다.
* 편발(編髮): 머리카락을 땋아 내려뜨린 것을 말한다.
* 포첨(布襜): 베로 만든 앞치마 따위를 말한다. 《진서》 권97 〈숙신씨열전〉에는 ‘이포작첨(以布作襜)’으로 되어 있다.
* 송사(送死): 죽은 이를 보내는 禮.
嗜凶悍하여 以無憂哀相尙하며 父母死者에 男子不哭이면 以爲壯士라 相盜者면 無多少히 皆殺之라
흉포하고 사나운 것을 좋아하여 근심과 슬픔이 없는 것을 서로 숭상하였으며, 부모의 죽음을 당하여 곡하지 않는 남자를 壯士로 여겼다. 도둑질한 자를 보면 훔친 물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모두 죽였다.
有石砮․皮骨之甲하고 檀弓은 三尺五寸이요 楛矢는 尺有咫라 其國東北出石砮는 其利入鐵한데 國人取之면 必先禱鬼神이라
石砮와 皮骨로 된 갑옷이 있었으며, 檀弓은 크기가 3자 5치이고 楛矢는 크기가 1자 조금 넘었다. 그 나라 동북쪽에서 생산되는 석노는 예리하기가 철을 뚫을 정도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석노를 가지게 되면 반드시 먼저 귀신에게 제사 지냈다.
周武王時에 貢楛矢․石砮하고 及周公旦輔成王하여 遣使入賀라 魏景元末에 貢楛矢․石砮․弓․甲․貂皮物하고 魏以錦罽․緜帛․傉鷄賜其王이라 晉武帝時에 復入貢하고 元帝時에 貢石砮하며 至成帝時하여 朝石晉曰 候牛馬ㅣ 西向眠者三年矣라 是以로 知大國所在云이라하다 <記言卷之三十二>
周나라 武王 때에 호시와 석노를 공물로 바쳤고, 周公 旦이 成王을 보필할 때에도 사신을 보내 入朝慶賀하였다. 魏나라 景元 말엽에 호시, 석노, 활, 갑옷, 담비 가죽 따위를 공물로 바쳤으며, 위나라에서는 금계, 면백, 녹계를 왕에게 하사하였다. 晉武帝 때에 다시 入貢하였고, 元帝 때에 석노를 공물로 바쳤으며, 成帝 때에 이르러 石晉에 조회하고 이르기를, “소와 말이 서쪽을 향해 자는 것을 3년 동안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국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하였다.
* 위경원말(魏景元末): 경원은 위(魏)나라 원제(元帝)의 연호로, 서기 260년에서 265년에 해당된다. 《진서(晉書)》 권97 〈숙신씨열전〉에는 이 앞에 주나라 성왕 이후로 1000여 년간 진(秦)나라, 한(漢)나라처럼 융성한 나라가 있었어도 중국과 통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 석진(石晉): 석경당(石敬塘)이 세운 오대(五代)의 후진(後晉). 후당(後唐) 명종(明宗)의 사위로서 거란의 도움을 받아 황제가 되었음. 유(幽)•계(薊) 등 16주(州)를 요(遼)에 주고 신사(臣事)하였음. 2대인 출제(出帝)가 즉위한 후 신사를 거부하다가 946년에 요나라에 멸망 당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