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향기
그의 세례명을 지을 때다. 내가 추천한 라파엘이 누구냐고 묻기에 병을 낫게 해 주는 천사라고 하며 자연스레 토빗서에 나오는 라파엘 천사 이야기를 해 주었다. 환우들인지라 치유의 천사 라파엘이란 세례명을 좋아하더군.
그가 말했다. “천사가 어디 있는데요?” 그리고 내게 “천사를 보긴 했냐?”고 물었다. 참 난처한 질문이었지만 내가 누군가. 가브리엘 천사 이야기로 풀어갔다. 마침 옆 자리에 입원한 젊은 수사님이 성모수태고지를 그린 이콘을 꺼내는 게 아닌가. 수사님이 읽던 책갈피에서 꺼낸 이콘을 가지고 설명하려는데 땀이 흘렀어. 맹자 엄마 앞에서 이삿짐 싸는 격이랄까, 감히 수사님 앞에서. 그 그림은 신기했어. 소박한 옷차림의 성모님에 비해 구원자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날개가 유달리 오색영롱했어. “보세요. 이 천사가 가브리엘 천사예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천사님이 바로 가브리엘이거든요. 참 저녁에 묵주기도 할 때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하는 기도문이 바로 이 장면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아~ 그랬구나 하더니 이번에는 라파엘라 자매가 감탄한다. “천사 날개가 너무 예뻐요!” 내가 대답할 방법이 있을까. 쩔쩔매는 나를 딱하게 여겼는지 수사님이 얼른 받아 준다. “이때 성모님 나이가 열다섯이었을 거예요. 그 어린 소녀한테 천사가 와서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알리는 축복의 말에 마리아, 어린 소녀가 마냥 기쁘기만 했을까요? 덜컥 겁이 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어린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이루지소서’하고 순명하셨답니다. 여기 천사를 바라보는 마리아를 보세요. 엄청난 하느님의 신비를 들으며 성모님의 눈에 눈물이 맺힌 걸.” 라파엘 내외도 마리아 간병인도 주위에 둘러서서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 아마도 천사가 예수님 탄생을 알리는 장면에 나오는 목자가 이러지 않았을까.
수사님의 말은 이어진다. “기쁜 소식을 가져온 천사의 말을 들은 마리아는 눈물을 흘리면서 가만히 가브리엘 천사를 바라봅니다. 마리아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통해 바라본 가브리엘 천사의 날개가 오색찬란하게 빛났을 거예요.”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구세주 탄생의 신비가 우리 눈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언제 들어도 예수님 탄생에 얽힌 성모님과 천사의 이야기는 우리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성모님의 수태고지 장면에 나오는 가브리엘 천사의 날개가 황홀하게 그 날개를 활짝 펼친다. 얼마나 적절한 설명인가 말이다. 성모님이 순명하는 순간을 그린 이콘 만큼 예수님의 육화 사건을 신비롭게 알려주는 게 어디 있을라고. 라파엘하고 난 한참이나 그 이콘에 머물러 있었다. 수사님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하느님 신비를 엿보게 되다니 이건 교리봉사를 하는 날 예쁘다고 주신 선물임에 틀림없다. 암 분명 축복이고말고.
순발력하면 내가 아닌가 말이다. 이때다 하고 “내가 천사를 보았다”고 했거든. 내가 봉사하는 성령기도회에서 있었던 일화를 꺼내면서 거기에서 천사를 보았다고 했어. 기도회에서는 회원들이 가지고 온 지향을 모아서 기도하는 순서가 있다고 했어. 물론 최 라파엘 형제가 빨리 완치되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했더니 참 좋아하더군. 어느 날 이런 지향의 기도가 올라왔더라고. “갑상선암에 걸렸으나 돈이 없어서 수술을 받지 못하는 딱한 이웃이 있어 기도 올립니다.” 이 자리에 나온 회원이 암에 걸린 이웃을 위해서 중재기도를 청한 거였다. 우리 기도회에서는 회원들이 올린 지향을 가지고 공동으로 중재기도를 청하지만 그것을 프린트해서 봉사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집에서 다음 주까지 내내 기도하도록. 그 지향이 딱했지만 하루 수십여 명이 올리는 기도 지향이기에 그 자리에서 중재기도를 올리고는 잊어버렸다. 그 다음날 내게 전화가 왔어. 돈이 없어 수술 받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암 환우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고 했어. 전화를 한 자매는 평소에 기도회에 나오고 싶지만 바빠서 나올 수 없었는데 그날따라 기도회에 어렵게 왔대요. 집에 돌아와서 기도하는데 그 지향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더라고. 아무래도 자신한테 내린 주님의 분부인 거 같아서 꼭 그 자매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며칠이 지났나, 암 환우가 전화를 했어. 내게 전활 했던 자매님이 수술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거야. 며느리도 암에 걸린 기막힌 상태였는데 우리 고부가 함께 수술을 받게 되었다는 거다. 그리고는 이런 도움을 주셔서 고맙다고 내게 인사를 했다. 너무너무 기뻤다. 하지만 내가 한 게 뭐가 있는가 말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중요한 관청이나 단체에는 기자실이 있지 않던가. 그곳에는 기자가 주재하며 그곳에 일어난 사건을 기사로 써서 세상에 알리고 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도 세상 중요한 곳에 기자를 보내서 딱한 이웃이나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처한 일을 보고하도록 하시지 않았을까? 기자의 보고를 들은 하느님께서 그때그때 알맞은 도움의 손길을 펼쳐 주시지 않으시겠냐고. 분명 우리 기도회는 하느님이 눈여겨보시는 중요한 곳임에 틀림없어 기자를 보내신 게지. 이걸 기도의 네트워크라고 하면 어떨까? 기도 네트워크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기자를 일러 세상은 천사라고 부른다고. 이래도 천사를 보지 못했다고?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날 지켜보고 도움이 필요한 순간을 주님한테 알리고 도움의 손길을 펼치지 않는가 말이다. 이래도 천사를 보지 못했다고? 이렇게 천사 이야길 했더니 라파엘 내외가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마리아 간병인은 거의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내가 사랑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천사를, 그들이 하는 일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좀 똑똑한가. 나도 놀라고 옆 침대의 수사님도 감탄하시더라고. 어깨를 으쓱했지. 라파엘내외도 수사님과 마리아 간병인까지 한참을 우린 말도 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 이게 현대식 기도 네트워크가 아닌가 말이다. 나도 라파엘도 우리 모두 하느님의 천사가 될 수 있는 걸. 라파엘라가 이르길 교리 선생님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낸 천사예요. 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제가 무슨.... 하다가 그 말이 맞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잘것없지만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을 순종하고 해낸다면 그게 천사가 아니고 뭐냔 말인가. 하지만 내가 다른 이에게 천사가 되기도 하지만 악마가 되기도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내 몸가짐을 조심해야겠지. 주님의 분부에 순명하고 최선을 다 하는 게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게 아니겠어.
그리고 며칠이 흘렀나 하루는 입원실에서 라파엘의 막내 동생 내외를 만났다. 형님이 다리를 자르는 끔직한 일이 벌어질 때 중동에 나가 있을 때여서 미처 오지 못하고 이제야 왔다고. 형님이 겪은 참담한 일을 듣고선 많이 안타까워했다. 라파엘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더군. 그러더니 ‘우리 교리 선생님한테 배워서 너도 세례 받고 성당 다니자’ 그러자 동생은 빙그레 웃으며 형님 분부인데 어련할까요. 막내 동생이 사는 곳을 물어서 그 본당에 연락을 줘서 세례를 받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지. 전교가 넝쿨째 들어오는 게 아니고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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