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블레즈 파스칼, 김화영 역, 선한청지기
<팡세>는 프랑스어로 ‘생각’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 프랑스의 학자인 파스칼의 글을 모아 엮은 책을 가리킨다. 파스칼은 대체로 짤막한 단편적인 글들을 메모 형식으로 남겼는데, 그의 사후에 유족들이 이것들을 묶어 <종교 및 기타 주제에 대한 파스칼 씨의 팡세>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 형식으로 보아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수고에 수록된 1천여 개의 글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해서 출간하기도 했다. 본래 미완성의 원고본의 형태로 남아있었지만, 그 원고의 형식이나 체계로 보아 파스칼이 죽지 않았다면 현재의 단편적인 형식이 아닌 정리된 에세이 형식으로 완성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국내에 출간된 <팡세>의 어떤 번역보다도 파스칼의 의도를 충실하게 담아내고자’ 다양한 프랑스어 판본을 활용했고, 전체 2권으로 출간될 원고들 가운데 ‘파스칼이 직접 분류한 원고 묶음 27개’를 1권으로 먼저 번역하여 출간했음을 밝히고 있다. ‘분류된 단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파스칼 자신이 해당 내용들을 자신이 분류한 소제목들에 배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어서 출간될 2권에는 미처 특정 항목에 분류되지 못한 글들을 번역하여 수록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번에 출간된 1권을 읽어본 바, 전체적인 내용은 기독교에 대한 교리를 자신의 관점에서 정리한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고 여겨졌다. 번역자 역시 처음 <팡세>를 접했을 때는 ‘종교적 색채가 강한 단장들은 건너뛰고 인간에 대한 비극적 전망을 다루고 있는 부분만을 주로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시 원문을 접하면서 정밀하게 탐색한 결과 파스칼이 남긴 글들은 대체로 기독교 이념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강했으며, 번역자는 그것을 일컬어 ‘호교론’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호교(護敎)’라는 표현은 특정 종교의 이론을 옹호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파스칼의 <팡세>에는 일부 다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고 하겠다.
번역자는 이 책의 독자들에게 ‘진지하고 무거운 내용과 세속적이고 가벼운 내용이 교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을 인내심을 가지고 통과하길 바란다’는 당부를 제시하고 있다. 파스칼이나 그의 저서인 <팡세>를 읽기 전부터,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는 격언이 담긴 책으로만 알고 있었다. 번역자 역시 그 구절의 의미를 ‘해제’에서 상당한 분량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었고, 나 역시 그 내용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된 것인지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전후의 구절을 포함하여 제시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이 갈대를 얻기 위해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는 없다. 한 웅큼의 물안개, 한 방울의 물로도 충분히 그것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갈대를 꺾는다고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우주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거기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모든 가치는 생각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 생각으로 우리의 가치를 세워야지, 우리가 차지할 수 없는 시공간으로 세워서는 안 된다.
그러니 올바르게 생각하도록 노력하자. 바로 이것이 도덕의 원리이다.
인간은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갈대처럼 나약한 존재이지만, 생각하는 능력이 있기에 우주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파스칼의 이 글을 ‘인간을 아는 것에서 하느님을 아는 것으로’라는 부제가 달린 ‘묶음 15. 이행’에 수록하고 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옹호하는 종교적 이념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저 하나의 글로 읽었을 때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파스칼의 구상과 분류의 기준을 통해서 그것이 종교를 옹호하는 설명으로 파악될 수 있다고 하겠다. 파스칼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독자들은 이 책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분명하다고 하겠다. 이미 ‘분류된 단장’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 나로서는 <팡세>를 번역자가 강조하는 ‘호교론’의 차원이 아닌 에세이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한다.(차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