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포트 정권 붕괴(1979) 후 30년 만에 프놈펜교외에서 자국민을 학살했던 전간부들을 재판하는 특별법정이 처음 열렸다. 개정 첫날(2/17), 이례적으로 잠간 소낙비가 내렸다. 지금은 건기이다. 30년 묻어 두었던 고혼(故魂)들의 눈물들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했다. 기소된 5명중 최초의 심리는 툴 슬렝(Toul Sleng) 수용소 전 소장 캉.게그.예아브(66세)였다. 그는 캄보디아인에게 더치(Duch)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캄보디아 데일리지(2/25)에 두 번째 인물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그녀는 폴포트파 정권의 사회부 장관을 역임했던 옌.치릿(76세)이었다. 폴포트의 처 포나리(83세, 사망)의 여동생이었으며 부수상,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옌.사리(Ieng Sary)의 처(妻)이다. 옌 사리 부부는 훈센정부에 귀순하여 수상의 비호를 받으며, 태국 국경의 루비광산을 불하받아 호사를 누려왔던 사람들이다. 그는 얼굴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으며, 자기들을 기소한 자들은 제7지옥의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저주까지 퍼부었다. 폴 포트의 처제(妻弟)로 막강의 권력을 누렸던 그녀의 얼굴엔 전혀 죄책감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오늘의 본문은 요한일서 1:8~9이다. 8절에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절에"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sins)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 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지식은 갖고 있었으나 사랑의 계명을 불순종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이른바 영지주의 이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에 대한 비판의 말씀이 요한일서이다. 더치(Duch)이외에 현재 기소된 폴포트派 전간부들은 폴 포트 정권 시절(1975-1979)에 툴 슬렝 감옥에서 14,000명을 처형한 범죄를 부인 하고 있다.
2.누가 집단학살의 책임을 질 것인가?
<S-21>은 투올 슬렝 교도소의 암호인듯하다. 기소된 5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당시 정권의 제2인자로 알려진 누온 체아(전당부서기82세), 키우 삼판(전국가간부회의장,77세),옌 사리(전 외무장관,83세),옌 치릿(전사회부장관,76세) 그리고 더치(교도소장,66세)이다.<폴>정권붕괴 30년이 지나는 동안 최고 책임자였던 폴 포트는 1998년에 사망했다. 캄보디아 비극의 장본인이었던 그는 장막에 가리워진 비밀을 영원히 무덤 속에 묻어버렸다. 국군참모장 다 모크(강경파)는 잔인, 공포의 심벌이었으나 2006년에 사망했고, 누온 체아(Nuon Chea)는 투올 슬렝 교도소 수감자들의 죽음과 관련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다른 책임자들도 허약해져 폴 포트정권의 죄는 무덤 속에 묻힐 위험이 있다. 폴 포트는 "민중을 죽이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고 투쟁하기위하여 태어났다고 했으며,투올 슬렝 교도소는 베트남인이 만든 박물관"이라고 발뺌했다. 제2인자 누온 체아 와 큐.삼판은 훈센정부에 귀순하고 소리(sorry)! 소리(sorry)!를 연발 할 뿐 책임을 회피했다. 동포 대량학살의 책임자가 묘연해지려는 때에 99년 5월에 더치는 "누온 체아가 최고 책임자"라고 고발을 했다. 그는 1979년 1월이래 잠적했다가 1999년에 체포되었다. S-21수감자들에게 지옥의 염라대왕 같은 공포의 대상인 더치의 소식은 <캄>데일리誌에 최근 자세히 보도 되었다.
더치는 폴 포트 혁명의 중추 중의 막내였다. 그들은 거의 캄보디아 부르죠아(有産엘리트집단),시스왓트 고교 졸(당시 최고명문),불란서 유학, 전직교사출신이었다. 폴 포트혁명의 주체세력들은 부르조아 출신이었다. 폴 포트 혁명이 얼마나 허구의 혁명이었던 것임을 이로써 알 수 있다. 더치도 시스왓 고교, 수학교사, 5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폴 포트혁명의 열혈당원이었다. 그는 한때 "종교는 나라를 파괴시키며, 종교는 인민의 흡혈귀와 같다"고 했다.
종교개혁의 원산지 독일에서 나치스학살이 자행되었고, 살생금기의 불교국가 캄보디아에서 집권4년 동안 140만의 동족을 학살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교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당시 700만명 인구 중 5명의 1명이 죽음을 당했다. 이 학살극의 중심에 S-21소장 더치(Duch)가 서 있었다. 그는 조직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살인집단의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론놀 혁명(친미정권) 이후의 내전 시대에 수도북부해방구의 공안 책임자였다. 14,000 명의 목숨이 공포의 수용소에서 사라졌다. 저들은 사회주의 조국건설의 꿈을 안고 귀국한 젊은이들을 수용소에서 죽였다. 자파내의 반동분자들을 색출해낸다는 명분 아래 수많은 당의 인재들이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 까지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며 죽게 하리라(마태10:21)","그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마태24"10)". 라는 상황이 S-21교도소에서 일어났다. 프놈펜의 여행자들은 관광 필수 코스로 뚜올 쓸렝 수용소를 방문하는데 끔찍한 일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 의 인상을 남기고 지나가는 듯하다. 캄보디아의 오늘을 이해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치의 상부 책임자들이 있지만 2월17일 심리(審理)에 더치가 첫 인물로 채택되었다. 그들은 생존본능에 의하여 허위 진술을 했으며,과잉 고백을 했으나 생존자는 4명에서 14명에 불고했다고 한다.
3.크리스챤이 된 더치(Duch)
1979~99년 종적을 감추었던 더치의 행적을 최근 <캄.데일리지>가 자세히 보도했다. 그는 1980년대 태국 국경 난민수용소에서 UN ,미(美)민간 단체의 봉사원으로 변신하였다. 1992년 지방교회에 참석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인 듯하다. 93-97년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고등학교 수학, 물리, 화학 그리고 불어교사를 하며 지냈다. 전도세미나에서 훈련도 받고 교사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도하기도 했으며, 자기 집에서 가정교회를 시작(1999년)하려다 체포되었다고 한다. 딸(32세)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자기의 죄를 딸에게도 고백했다고 한다. 그는 집단학살의 다른 용의자들과 달리 검사들에게 협조적이었다고 한다. 1996년 세례를 받고 전날의 공산주의 열혈 당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회심했다고 한다. 최근의 <캄.데일리지>는 바탐방 지역 교회연합회 회장(림파니목사)을 인터뷰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오늘의 본문(요일1:8~9)을 읽었다. 그는 지독한 심문, 고문, 처형의 경력자로서 예수께서 받은 고문과 처형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을 것이다. 혹자는 그의 회심의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하나 나는 그의 회심을 믿고 싶다. 킬링 필드(虐殺場,killing field)의 중심에 선 그가 세빙 필드(Saving field,구원의 자리)의 역군이 되길 빈다. 바탐방 지역의 교회가 그를 배후에서 도운 것 같다. 우리 선교사들 보다 더치의 증언이 동포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까? 3월30일의 공판이 다시 열린다. 그 날을 기도하며 기다린다. 언론은 그가 종신형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 나는 그가 풀려나길 기도한다. 폴 포트정권의 잔학행위의 진상을 캄보디아인에게와 세계 앞에 증언해야한다. 그의 진실의 고백을 통해서 유족들의 한의 일부라도 풀어 주어야한다. 풀려나지 못하면 감옥에서라도 그의 참회록을 남기기를 빈다. 폴 포트 시절의 진상을 그에게서 기대해본다. 그는 폴 포트주의로 돌아가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영국의 사진기자 던롭이 더치의 소재를 세계에 공개한 뒤 그는 체포 되었다. 더치는 그에게"당신이 여기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나의 장래는 예수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자 둔롭은 최근 방콕에서의 전화에서 그는 전 보다 더 신앙생활에 매진하고 있다고 전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자는 용서함을 받을 것이요. 전과를 인정하지 않고 혐의를 남에게 전가하는 전직 간부들과 얼마나 대조적인가?"재판에서 나의 혼은 사형에 처해도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혼은 예수의 것이기에.....(폴포트 혁명사, p192)"라고 했다.
폴 포트 혁명사를 최근 정독하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내 자신 속에 폴 포트의 죄성이 뿌리 깊이 내리고 있음을 보았다. 프놈펜에 1년 2개월을 살면서 이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여 많은 고통을 치렀다. 이 책을 통하여 오늘의 캄보디아를 더 이해하게 되었다. 유산계급의 엘리트들이 무산계급의 공산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이 허구의 혁명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구원은 멀고도 멀다. 일본 중세불교의 고승 신란(1173-1333)은 그의 명저 탄이초(歎異抄)에서 "왜 선인 보다도 악인인가?"라는 말을 남겼다. 아미타불의 이름 만 부르면 누구든지 극락왕생 한다는 이례적인 타력신앙을 그는 부르짖었다. 그의 사상은 로마서(以信稱義)를 방불케 한다. 그렇다 ! 나의 죄를 자각할수록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것이다. 악인 연쇄살인범 강호순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다. 그가 복음을 듣고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그도 구원을 받을 것인데...... KAL기 폭파범 김현희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은 의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
프놈펜 소망선교교회에서, 홍응표 목사( 2009.3.1주일)
참고자료
1.山田 寬著(야마다 히로시), 폴 포트 혁명사, 講談社 (日書)
2.The Cambodia Daily(2/17~3/1)
3.The Phnom Phen Post
4.밀톤 오스본著, 시하누크,岩波書店(日書)
첫댓글 목사님글 설교문 잘 읽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겠지만....킬링 필드(虐殺場,killing field)가 세빙 필드(Saving field,구원의 자리)로 바뀌는 역사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홍목사님 김동진선교사가 우리 토요클래식에 오셔서 저희독회에 참석하셨습니다. 한국에 오시면 목사님을 뵙고싶다고...전화번호 (010 2828 9161)까지 남기셨습니다. 우리 카페에 들리면 홍목사님과 연락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연락이되셨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