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성문협 이용섭 입니다.
2022년 <의성문학>36집에 실은 부족한 시편으로 안부 전해 올립니다.
찔레 / 이 용 섭
그대여
다시 5월입니다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맨발로 건너뛰던
발목 시린 징검다리 건너
양지바른 개울가 가시덤불 속에
수줍어 고개 숙이던 그대 닮은
찔레가 꽃을 피웠습니다
따사로운 햇살 구슬러
고운 향기 불러오던 푸른 5월을
핏빛으로 물들인 통곡의 그날처럼
가시덤불 헤치고 하얗게 울음 울던
찔레가 꽃을 피웠습니다
오지게 통통한 새순 잘라
달착지근한 눈 맞춤 나눠 씹으며
배고픔도 슬픔도 함께 잊었던 그대여
다섯 장 꽃잎 펼치고 노란 꽃술 속에
볼 붉은 그대 마음 같은 찔레가
하얗게 하얗게 꽃을 피웠습니다
빈 자리 / 이 용 섭
그가 떠나자 그의 여자도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올 때처럼 그렇게 쉽게
빈 손으로 돌아갔다
내가 인연 맺고 알아 왔던 세상이
날이 갈수록 자꾸 빈 자리가 생긴다
함정처럼 뻥 뻥 뚫린 구멍 집
기억의 빈집이 해마다 늘어나
허전하고 공허한 바람의 집이 되었다
그와 그 여자가 있던 자리
다른 어느 누가 있어 채워질 수 있는가
누가 그들의 빛깔과 향기와
무게를 대신할 수 있는가
아무도 모르는 뒷날
시간이 데리고 올 그날이 오면
내가 떠나고 내가 볼 수 없는
벌집처럼 뚫린 나의 빈자리를
누가 그 자리의 역사와 흔적들을
옛 이야기하듯 말해 줄 수 있을까
없어도 있는 사람 비어있어도 가득 찬 사람
안 보이는 사람들 빈 자리가 아프다
가슴에 묻은 집 /이 용 섭
일흔다섯 노쇠한 집을 헐었다
부모님 먼 길 가신 지 스무 해
이제 새로운 추억을 만들 수 없어
먹다 남은 찬밥처럼 밀쳐두었던
허기진 봉두난발蓬頭亂髮의 빈집을
조상弔喪하는 이 하나 없이
내 가슴에 깊이 묻었다
병든 짐승처럼 컹컹거리며
키 낮은 짐실이 자전거에 실려 오던
아버지의 슬픈 기침 소리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우물처럼
웅 웅 거리다 안으로 잦아들던
뼈아픈 어머니 잠꼬대와 신음소리가
중장비 기계음과 티끌과 먼지가
장자莊子의 나비와 함께 바람이 되어
어디론가 훨훨 먼 길 떠났다
길고양이와 잡초와 어둠의 집이
벌거벗은 알몸으로 누었다
시간을 건너오던 임자 잃은 웃음소리와
바랜 기억들이 오래 짐 지고 온
버거운 세월의 무게를 내려놓고
내 가슴에 새집 하나 다시 지었다
이팝나무꽃 / 이 용 섭
어머니
이팝나무꽃이 피었습니다
주린 배 졸라매고 보릿고개 넘던
배곯아 죽은 원귀들 밥 먹고
좋은 곳 가란 듯이
하얗게 하얗게 피었습니다
어머니
이팝나무꽃이 오지게도 피었습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하시던 말씀
야야 옛 말씀에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이라 했다
배곯는 사람에겐 먹는 것이 하늘이다
세상 어떤 저울로도 달 수 없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복스럽게 피었습니다
이 땅 조각조각 갈라진 민초民草들
찢기고 할퀸 상처 난 가슴
따뜻하게 싸매고 안아 주며
사람이 하늘이라는 마음으로
배고픈 서러움 달래 줄 고봉밥이
이 땅 곳곳마다 눈물 젖은 조화弔花처럼
푸지게도 피었습니다
죽은 말[言]을 위하여 / 이 용 섭
봄이 메아리로 울리는 창가에 앉아
겨우내 찌들고 녹슨 나의 말들을
따사로운 햇살에 말리고 있습니다
어둠과 추위 속에 허기진 눈망울로 서성거리며
안에서만 울먹이던 나의 말들이 몸 털고 일어나
새로운 얼굴의 풀 내음을 만나러 길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 막 지나가는 남행 열차의 꽁무니를 따라
무턱대고 따라나서는 내 마음도 함께 보냅니다
남녘 어느 벚꽃 그늘엔가 이름 모를 갯가 모래톱엔가
바람 부는 들판 모롱이를 돌아서는 구릿빛 장정壯丁들
날 선 팔뚝을 슬쩍 건드리고 시치미 떼고 길 떠나온
바람결에 묻어오는 그대 안부도 생각합니다
이제 그 푸른 바람과 햇살로 정갈하게 씻긴
그대 얼굴을 만나고 싶습니다 새봄처럼 다듬어진
신선한 이마를 짚어보며 혼자서 일구던 꽃밭에
내 수줍은 손길 얹어 보고 싶습니다
씨뿌리고 김매던 노동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밤마다 손바닥이 아리도록 길어 올린 나의 순수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아픔까지 만나고 싶습니다
화장한 얼굴 겉치레는 모두 버리고
비누 냄새 가시지 않은 물기 젖은 얼굴로
슬픔을 만나러 더 넓은 광장으로 가렵니다
내 안에서 맴돌다 쓰러진 나의 말들 불러 모아
살아가는 진실을 노래하렵니다
맥박 속에 꿈틀거리는 나만의 춤을
춤추기 위해 오늘도 먼 길 떠나렵니다
첫댓글 이용섭교장선생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좋은 詩 감사합니다. 선산읍 박태원드림
오지게 통통한 그놈이 볼 붉은 그대였군요.
일흔 다섯 노쇄한 집을 허물고나니 장자의 나비소리가 가슴팍으로 흘러듭니다.
아팝나무꽃이 피면 어머니가 내놓으셨던 고봉밥이 그리워집니다.
오랫만에 의성문협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자매결연으로 오래도록 작품을 나누었었지요
오래 헤어졌다 만난 형제처럼 반가운 마음입니다
올려주신 작품도 잘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에 머물다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