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사람 시므온 누가복음 2장 25-34절
이제 교회력은 다시 새해를 맞습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삶을 중심으로 시작되는데 그 처음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이 총 4주인데 4주 동안 첫 주는 아기 예수의 오심을 알리는 예언자의 초, 희망의 초입니다. 둘째 주는 마리아와 요셉의 여정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초, 사랑의 초, 셋째 주는 아기예수의 오심을 기뻐하는 양치기의 초, 기쁨의 초, 그리고 마지막은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의 초, 평화의 초를 켭니다.
한편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을 크게 4개로 구성하는데 광물, 식물, 동물,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의미에서 첫째 주는 그 초를 켜고 광물 즉 마구간이나 주변의 돌, 수정, 뼈, 조개 껍질 등을 놓고, 두 번째 주일에는 식물들이니 이끼, 솔방울, 가지, 짚, 말린 꽃, 씨앗 등을 더하고, 세 번째 주일에는 동물들이니 소, 양, 나귀, 새 등을 더하고, 마지막 주 일요일에는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양치기, 동방박사 등 사람의 형상을 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마굿간에 다른 생명들을 놓지 않고 마굿간만 준비해 놓았습니다. 어쨌든 대림절 기간에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면서 온 생명이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희망의 초를 켜고 온 세상의 광물을 축복합니다. 존재하나 숨쉬지 않는 모든 존재들을 산소, 탄소, 수소, 질소, 소금, 간장, 설탕 모든 무기물들은 죽어있는 것 같으나 살아있고 모든 생명을 살리는 살림의 원천입니다. 미네랄, 비타민 이런 성분들은 살아있는 존재인가요 죽어있는 존재인가요 우리는 그 모든 존재들을 통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우주의 모든 거룩한 영이 이 존재들을 축복해 주시길 원합니다.
이 모든 무기물들이 보이지 않게 말하는 삶의 진실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생명이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게 알맞은 균형감을 잃지 않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질소도 너무 많으면 바다를 산성화시킵니다. 그러나 적당한 질소는 생명의 성장을 풍요롭게 합니다. 지구에 이산화탄소가 없다면 온실효과가 없어 지구는 너무 추워 생명체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소위 기후변화라 일컬어져 세계가 난리를 치고 있는 이유는 탄소가 너무 많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보온밥통처럼 뜨거워지다는 것입니다.
음식도 소금을 너무 많이 넣으면 짜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금을 너무 안 넣으면 싱겁고, 당뇨환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간을 안하니까 음식이 맛이 없어서 안들어가는 거예요. 사람도 적당히 염분이 채워져야 하는데 그 염분이 너무 적으면 염증이 너무 많이 생기고 치료가 되지 않아 건강에 치명적인 어려움이 옵니다. 모든 무기물이 전하는 메시지는 과하게도 빈하게도 말고 저마다에게 적절하고 알맞게 섭취하며 삶을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이란 사람은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며 평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누가는 이 사람을 설명하는데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이 단어를 썼을 때는 누가의 신학이 들어가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누가 썼느냐입니다. 윤석열이 말하는 정의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정의는 단어는 같지만 의미는 정 반대일 수 있습니다.
누가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자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 돌아온 탕자의 비유, 나인성의 과부 이야기, 삭개오 이야기, 나병환자 이야기도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누가는 복음서의 어느 기자들보다 가난한 이들, 여인들, 이방인들, 종들, 과부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가 의롭다 경건하다는 단어를 썼을 때는 이들과 관련이 많습니다.
나병환자 이야기 : 비록 깊은 병을 앓고 살아가고 있지만 감사를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이야기 : 이방인에, 여인 즉 사회적 천대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입고 살아가는 의로운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삭개오 이야기 : 여러 가지 이유로 무시받고 손가락질 받지만 자기 변화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 시대의 권위적이고 지배적이고 통제적인 시대의 아버지 상을 깨고 한없이 부드럽고 유하며 자비롭고 인내하는 마치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누가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의를 입고 살아가는 의로운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시므온은 평생 이러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이러한 삶을 위해 애쓰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은 어쩌면 매일 매일 자기 안에서 그런 자기의 모습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2년 전부터 제가 함께 친구하고 있는 지구별 교회 친구들 모임에 최근에 개척한 목사님 한분이 계십니다. 저희 교회에도 한번 오셨던 분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떠나기 바로 전 주일에 오셔서 인사하셨던 분입니다. 이분이 뉴스앤조이에서 일하시다가 중형교회에 초빙을 받아서 10여년 목회를 하신 분입니다. 60년 가까이 된 교회는 늘 긴장감의 연속이었습니다. 교회 장로님들은 늘 옆에 교회와 비교하면서 교회가 더 커지고 더 큰 교회를 건축하기만을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겨우겨우 교회 건축을 했는데 건축이 끝나니 건축 자체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그곳을 채워야한다는 압박감만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한 목회가 이게 아닌데.... 해야할 설교를 하지 못했고 듣기 좋고 설교, 성장을 시켜야만 하는 설교에 삶이 지옥같았다고 합니다. 재신임을 두 번이나 통과하면서 자신과 가족들이 전교인 앞에서 발가벗겨지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는 것 봐서, 목사가 목이 곧아져서 안되겠다는 등 험한 말들이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당회를 마치고 나면 “자신은 쓰레기만도 못한 존재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목회를 그만둡니다. 그때는 그런 대우를 받아가면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소명에 충실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럴수록 자신이 더 망가지는 걸 그대로 둘 수 없엇다고 합니다.
교회를 사임하고 2년을 칩거합니다. 목사님 개척하면 저도 함께 하겠다고 하는 교인들이 교회를 새롭게 찾아갈 때까지 기다린 겁니다. 그렇게 함께 나와도 결국 자신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순간 그 교인들이 떨어져 나갈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부천 마을의 산기슭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목회 인생에서 <가장 초라하게 한쪽 구석으로 내쳐져 있던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는 시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2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픔과 상처를 돌봐주고 힘들었던 시간을 공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걸려냅니다. 가장 가난했던 자기 자신 곁에서 그 자신을 돌봐주며 연대하며 새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첫 예배를 드리는 첫날 교회 앞에 대형 현수막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분들을 추모하는>을 걸었습니다. 그분은 비로소 고백합니다. 사람이 적어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그리고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이시간이 가장 기쁘고 보람되고 즐겁다고.
누가의 관점에서 보면 마치 소외받고 가난한 여인들과 약자를 돌보았던 누가의 이야기처럼 자기 자신의 가난함을 돌보는 그런 의로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목사님이십니다. 발도르프에서 대림절 첫째주 희망의 초를 켜면서 희망은 가장 원형적인 종교성, 감사와 사랑,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기 위해 더 넓은 지대를 향해 나가는 사람들안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광물들에게서 보여지는 속성처럼 삶에 있어서 너무 많거나 적어 즉 한쪽으로 치우쳐 원형적인 종교성을 잃어가고 있을 때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모든 과정 안에 담긴 희망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원형적 종교성으로 끊임없는 생명의 밸런스를 찾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든 분들에게 그리스도의 희망의 빛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