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어버린 시계
위상진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빈 잉크통을 들고
잉크 충전 가게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프린터 수리 센터를 찾아갔다
문이 닫혀있다
고양이는 내 방문을 열심히 긁다가
문 앞에 오줌을 싸버렸다
닫힌 문들에 대한 기억은
본능에 각인 된 두려움일까?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자신의 그림자를
미래에 경매한 사람은
알 수 없는 가격이 매겨질 것이다
또 변덕 같은 비밀이 만들어지리라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셔터가 내려진 문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고 싶다
물감은 주목 받지 못한 표현주의자의
얼룩처럼 흘러내릴 것이다
문을 닫은 그들은 문을 빠져나간 걸까?
바깥에 의해 갇혀버린 걸까?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고
빈 잉크통만 어둠과 상관없이 남아 있다
초승달
고양이가 엄지발가락을
깨물어 너를 깨운다
끈적한 침을 발가락에 묻히고
지독한 근시로
너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불 위에 떨어져 있는
검자주색 핏물이 든 발톱
고양이는 발톱 안에 혈관이 있어
무라노 섬에서
그가 보낸 초승달 모양
목걸이가 도착했다
밤하늘을 오려낸
오색
금빛
별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고양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발톱 모양의
목걸이를 건드려본다
무라노 섬에 유배된
유리공의 손길은
너의 목에서 흔들리고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 있다
초현실주의
아무래도 코가 비뚤게 됐나봐
이 돌파리 의사!
다시 수술을 해 달라 해야지
거울 속의 여자는
분필 같은 코뼈를 바로 잡고 있다
한 밤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누군가를 닮고 싶은 이들은
눈 코 입을 바꿔버렸다
창백한 얼굴은
어긋나지 않으려고
어긋나고 있다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사랑하고 헤어진 연인은
욕설을 퍼붓는다
참 멋진 놈이었는데, 나쁜 놈!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펴지지 않았다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시차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 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까?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위상진 약력
*1993년 『시문학』등단
*시집 『햇살로 실뜨기』『그믐달 마돈나』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카페 게시글
하지연 시인의 방
초심으로 돌아갑시다 (700) // 손미의 위상진 론: 고체의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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