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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그물망 요한복음 13장 4-5절
발도르프의 대림절 맞이에 의하면 대림절의 첫째주가 무기물에 대한 축복이라면 둘째, 셋째, 넷째주는 모두 유기물, 생명에 대한 축복입니다. 둘째주는 식물, 셋째주인 오늘은 동물, 그리고 다음 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과 평화의 기운을 축복하는 그런 대림절기로 드립니다.
무기물은 밸런스였다면 유기생명체를 생각했을 때는 떠오르는 것은 연결성입니다. 모든 생명들은 서로 연결되어 살아갑니다. 아침에 뜨는 태양은 1억 5천만 키로 밖에 있지만 매일 매순간 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태양이 저와 연결되어 있지 못하면 몸에 비타민 D를 공급할 수가 없습니다. 몸에는 우리 몸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도 있지만 위험한 바이러스를 막아주는 몸에 이로운 바이러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살아갑니다.
심지어 무인도에서 혼자 지내도 식물이 없고 물고기가 없고 먹거리가 없으면 우리는 삶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로빈슨 클로우즈가 섬에 너무나 혼자서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결코 혼자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생명체들 먹이가 되어주기도 했지만 벗이 되어 주기도 하고 친구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제가 동물을 키우지 않은 이유는 상처가 너무 커서입니다. 딸 어렸을 때 햄스터가 있었는데 이놈이 자식을 낳았는데 그때 제 손에서 낳았어요. 그래서 그런지 그 큐리라는 아이가 얼마나 이쁜 짓을 많이 하는지 제 손에서 너무 잘 놀았어요. 그런데 크면서 이놈이 집을 나갔어요. 고양이에게 잡혀 먹혔을 거예요. 그때 상처가 얼마나 큰지 다시는 동물 안 키워요. 그 정도로 정이 들었고 그 존재가 주는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물이 사람 이상으로 관계의 벗이 되어 주기도 합니다. 위로와 힘을 주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많은 존재들과 연결되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먹이사슬이 서로를 잡아먹는 거로 이해했는데 나이 들어, 농사도 짓고 살아가다보니 생명의 연결고리는 죽고 죽이는 먹이사슬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먹이가 되어 서로를 살리는 생명의 그물망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 연결성은 관계성을 넘어서 가치적이기도 합니다. 이번 내란을 지켜보면서30분만 늦춰졌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저 명령을 거부했던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를 많이 생각합니다. 정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시와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수방사의 한 대령이 계엄군 헬기의 국회진입을 30분 이상 늦췄습니다. 출동목적을 이야기하지 않아 진입을 거절합니다. 거듭되는 지시를 막아낸 국정원직원도 있었습니다. 전쟁은 안된다며 북의 직접타격을 지시했던 것을 막아낸 합참의장도 있었습니다. 투입된 계엄군이 실탄을 장전하지 않고 총을 뒤로하면서 시민에게 밀리는, 비적극적 임무수행도 한몫했습니다. 선관위를 점령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다 폭행을 당하고 어쩔 수 없이 출동하는 척 했다가 편의점에서 라면만 먹고 돌아온 군지휘자도 있었습니다. 테러범도 단칼에 때려잡을 수 있는 특수 훈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력하게 시민들에게 밀렸던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상식적 사고를 하면서 내려진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 이들 덕에 계엄으로 권력을 쥐려했던 이들의 카테고리는 연결성이 하나씩 끊어지고 오히려 상식적 판단을 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려했던 사람들의 연결고리가 오히려 살아나면서 사태는 빠르게 진압될 수 있었습니다. 전 국민의 1/3은 보았을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 그리고 수없이 많은 희생이 따랐던 역사적 경험, 그리고 다양한 현장에 있었던 민주 시민들의 지성적 상식적 사고 이런 것들의 보이지 않는 연결성이 이 나라를 살렸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연결성도 있습니다. 아내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인도네시야에서 쓰나미가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섬들이 물에 잠겨 사라지고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다 쓸어갔을 때 아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인도네시야 희생자들을 위해 인터네셔널 학생들이 예배를 주관했다고 합니다. 너무나 참담한 일이어서 각 나라에서 학생들이 나와서 자기 나라말로 기도를 했답니다. 당연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죠. 그런데 신비한 일은 그들이 하는 말이 그들이 드리는 기도가 무슨 기도인지를 다 알아듣겠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여기 저기서 훌쩍 훌쩍 하면서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겁니다, 단순한 연결성을 넘어 공감과 자비, 진실성으로 연결된 시공간에서는 서로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그 슬픔을 이겨나가는 힘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없습니다. 탄생이야기보다는 태초의 빛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영적이며 신비스러운 묘사로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영적인 복음서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존재를 신비스럽게 표현합니다. 그는 태초부터 있었던 빛이요 우리는 살리는 생명의 빵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요, 양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목자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은유적으로 고백합니다. 이건 어둠 속에 있는 분들에게는 빛이요, 영적이든 육적이든 배고픈 사람에게는 생명의 양식이요 길을 잃고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자비로운 목자요 이런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특별한 존재다라는 의미의 다양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이 이야기하는 예수가 어떤이에게는 빛이고, 어떤이에게는 생명의 빵이고, 어떤 이에게는 목자인 그 이유의 핵심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예기하는 영성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자기를 낮추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극적인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상대의 발을 닦는다는 것은 상대 앞에서 물리적으로 무릎꿇고 나를 낮춘다는 표현입니다. 더더욱 발은 당시 유대인 노예조차도 주인의 발을 씻기는 일은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을 정말 씻겨야할 때는 이방인 노예를 시킬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일을 예수님께서 상징적으로 모두가 보고 있는 자리에서 행하시면서 우리가 서로 발을 닦아주는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더럽기도하고 고약하기도 하고 냄새나기도 한 그러나 그 안에는 온간 트라우마와 상처와 아픔, 살아온 세월의 슬픔의 깊이까지 담겨져 왜곡되기도하고 모나기도 한 그것까지도 만져주고 모듬어주고 닦아주는 그런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 그렇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을 준비하면서 구매했던 것 중의 하나가 멀티어댑터입니다. 나라마다 콘센트가 조금씩 달라서 아예 멀티로 샀어요.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쓸 수 있게 하는 멀티예요. 그랬더니 아주 편해요. 어디를 가도 그거 하나만 있으면 안심이 됩니다. 저는 관계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람관계도 둘이 서로 만나잖아요. 둘 중에 하나가 유연성과 멀티기능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관계도 연결됩니다. 내가 고착화되고 유연성이 없고 내 틀이 강해도 상대가 유연하고 멀티풀하면 연결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아무리 모가 나고 유연성이 없고 틀이 강해도 또 내가 유연하고 멀티풀하면 그 관계도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연결이 안되는 경우 대부분은 상대도 유연성없이 고착화되어 있지만 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사람과 연결되어 살아갈 수는 없지요. 그런데 정작 삶을 살아가다보면 연결성이 끊어지면 질수록 삶의 질이 나락으로 치닫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그럴 때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우라는 의미입니다. 상대가 110만을 고집해도 내가 스스로 멀티풀해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 문제의 원인을 알고 고민의 깊이를 알고 함께 연대하면서 일을 풀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가장 문제는 서로가 자기 고집만을 내세우면서 끝까지 평행선을 달리는 거예요. 각자가 서로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정말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고 고민하고 아파하는지 진짜 이야기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정말 한 나라의 대통령을 이렇게 두 번씩이나 탄핵을 시켜야하는 현실이 기가막힙니다. 어떻게 나라의 지도자가 당선인시절부터 지금까지 오직하나 “이재명을 죽이는 일” 일밖에 관심이 없습니다. 340볼트 하나 만들어놓고는 그걸 온갖 곳에 다 꽂으려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싹 다 망가져 버립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야당의 이야기도 듣고 소상공인들의 이야기도 듣고 서민들의 이야기도 듣고 들어야죠. 끝까지 자기 신념에 갇혀서 세상의 조롱거리만 되는 현실이 너무나 아픕니다.
인도 아힘사의 비폭력 삶의 원리 중의 하나! 우리가 비폭력으로 함께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정말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이야기를 내려놓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때때로 내 이야기 내 생각, 내 철학, 내 신념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결하며 그들과 더불어 진정한 평화와 상생의 삶을 열어가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리는 일이 중요하지 내 이야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연결해서 살려가는데 가장 중요한 방해꾼이 내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시대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은 <내가 전부라고 부여잡고 살아온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낮춰 상대의 삶을, 가족의 삶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을, 국민의 삶을 고난과 슬픔에 처해있는 서민들의 삶을 내 안으로 초대하는 겁니다. 내 신념을 강요하는 태도가 아니라 타자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리면서 그것을 삶의 중심에 놓고 진정성있게 머리를 맡대며 해결해 나가는 길입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연결과 상생을 위한 비움과 초대의 영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대림절기에 이러한 영성에 깊어지시는 귀한 절기 이루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