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체의 회화
손미
Ⅰ
사람은 액체다. 70%의 물로 구성되어있다는 과학적인 근거도 그렇거니와 작은 새 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보면 몸속의 물이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기분 좋은 칭찬 한마디에 날아갈 듯 가벼워지기도 하고 사나운 말 한마디에 몸서리를 치기도 한다.
감정은 물을 틀에 붓는 것처럼 변한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불안과 공포까지 틀에 따라 우리는 다른 감정을 안고 산다. 이렇게 요동치는 액체가 되어 날마다 다른 결정을 보이면서 우리는 살아간다. 특히 시인은 더욱 다양한 감정의 지배 아래 그 어떤 불순물이 첨가되지 않은 가장 맑은 액체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 물컹한 액체가 부르는 고체의 노래 다섯 편이 있다. 위상진 시인의 「묻어버린 시계」외 4편을 보면 화자의 “복수심처럼 굳은” 테두리를 목격할 수 있다. 화자는 자꾸만 부서지는 손톱으로 굳게 닫혀 있던 뚜껑을 열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딱딱한 마음이 들어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순간, 시인은 고체의 회화 展을 열고 독자를 초대한다.
박스를 열자
유화 물감은 복수심처럼
굳어 있었다
파레트 위에서
나이프 끝에서
그 방에 들어찬
익사체 같은 액자들
그림 속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의 질문과 대답들 사이
반복되는 푸른 망점들 사이
새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몽유병에 걸린 듯
사원을 지나가는 메아리가
기억 속으로 되돌아 왔다
내가 그린 푸른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림을 그리던
손의 리듬은 어떻게 다르게
방향을 잡았을까?
태엽을 풀어 흙속에
묻어버린 시계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답장을 쓰지 못하고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 위상진 「묻어버린 시계」 전문
그림 속에서 발견한 “굳어버린 눈빛은 나의 눈빛을 거부”한다. 감정을 잃은 미라의 상태. 살과 피를 잃은 대상은 어쩌면 죽은 것일지 모르지만 시인은 대상을 장례(葬禮)하지 않고 몸을 뒤져 심장을 찾는다.
그러나 굳은 대상을 끌어안고 속삭이는 것은 “세들이 벽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딱딱할 뿐이다. 결국 깨지는 건 벽이 아니라 새의 살점이겠지만 대상이 아니라 화자 자신이 붉고 뜨겁게 열릴 테지만 화자는 몸을 사리지 않는다.
한때 생생하고 말캉하게 살아있었던 그것. 박제된 동물처럼 형체는 그대로지만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대상을 화자는 바라보고 기다린다.
그럼에도 화자는 대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시간의 잘못이라 정의한다. 물감이 굳는 것도 마음이 굳는 것도 시간 탓이다. 화자는 태엽을 풀어 시계를 묻어보지만 이런 눈가림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마음을 만류할 수 없다. “말할 수 없지만 말하지 않은 시간의 순서”를 땅 밑에 두고 화자는 다시 뚜껑을 열고 굳은 물감을 발견하고 그 “굳어버린 물감에 테레핀을 붓는다” 굳은 마음이 용해되길 기다리며.
Ⅱ
엊그제 화가 두 사람이 사라져 버렸다
신문은 그들의 웃는 얼굴을
검은 네모 칸에 담아두었다
…중략…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 사람들
망상의 끝에서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 「빈 잉크통을 들고」 부분
화가 두 사람이 실종됐거나 죽었지만 신문에서조차 그들은 “검은 네모 칸에” 갇혀 있다. 죽은 사람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이 상황에서도 화자는 입구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죽어서도 네모 안에 갇혀야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고체 되기를 거부한다. 어떻게 지켜온 마음인데 “장의사는 폐업을 선언”한다. 사람들은 “마음의 셔터를 내리고 개점휴업에 들어간다” 화자는 그런 세상을 향해 “물감풍선을 집어던지”며 왜 벌써 포기하느냐. 왜 머무르지 않느냐며 소리치고 싶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화자는 빈 잉크통 같은 빈 우물 속으로 두레를 집어넣는 것이다. 공허와 어둠만 길어 올리겠지만 아직 화자는 굳지 않았기 때문에 이 운동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우린 너무 멀리 가까이 있어
그믐달을 지난 초승달처럼
목걸이는 너에게
예약되어 있었던 걸까?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든다
…중략…
별 모양의 고양이 오줌에서
달의 발톱이 돋아나는 소리
창가에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있다
- 「초승달」부분
그는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부동이 없다. 벽, 굳은 물감, 굳은 식빵처럼 요동도 없이 딱딱하기만 하다. 그의 마음은 잘라내도 아프지 않은 손톱이거나 “그의 숨결은 유리 목걸이에 스며”들어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고체이다.
어쩌면 화자는 너무 가까이에 있어 무뎌지고 무거워진 대상을 굳은 대상으로 선정해 놓고 관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도망갈 자세로 “창가에서 너는 굳어버린 식빵처럼 앉아있”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으리라.
한 밤 중 쇼윈도의 마네킹은
어긋나버린 몸통으로
거울을 왜곡하고 있다
…중략…
게임에 중독된 아이들은
죽은 햄스터에 넣을 밧데리를 사러 갔다
CC TV 속 아이들은
성급하게 어른들을
모방했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가상세계와 현실이 뒤섞인 채
사람들의 얼굴은 해면처럼 녹아내렸다
어른들은 자기 안의
아이조차 달랠 줄을 몰랐다
무성한 비밀이 꿈 같이 흘러 다닐 때
우산살처럼 부러진 말들은
화면 속에서 오래도록 퍼지지 않았다
- 「초현실주의」부분
「초현실주의」에서 화자는 다른 시선을 부여한다. 화자가 애타게 바라보고 있던 딱딱한 대상은 어쩌면 “딱딱한 식빵”이 아닌 “마네킹” 같은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른다. 화자의 속에서 굳어버린 아이 같은 내 자신, 그래서 모두가 문을 닫고 폐업을 하고 굳어버리는 이 상황에서도 나는 굳지 않고 끝없이 온기를 유지하려 애쓴 것이다.
가짜와 진짜가 뒤섞인 채 의식은 굳어가고 생각도 굳어가고 진실이 어느 것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화자는 왜곡되지 않은 진짜를 바라보고자 눈을 부릅뜬다. 인터넷 속 공간과 CCTV의 공간, 한번 걸리진 이곳에서 가짜들은 더욱 강하게 방류된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가식들 속에, 나의 가짜 말들도 떠다니고 있다.
이쯤에서 화자에겐 뾰족하고 독한 마음이 필요해 보인다. 이 고체들을, 이 가식들을 부숴버릴 단단한 이빨 말이다.
Ⅲ
거기는 흐리고 게으른 비가
내리는 나라
해가 나면 너는 공원으로 간다
고 말했지
너의 낮은 나의 밤이야
네가 두고 간 고양이가 나의 발끝에서
잠을 자고 있다
여기는 네가 없는 영하의 나라
손가락 끝이 잘린 장갑이
수화기를 들고 있다
8시간의 사치를 가로질러
두 개의 엇갈리는 태양은 안부를 묻는다
길들여진 말의 그림자가
수화기에서 잘게 쪼개질 때
털을 핥다가 반쯤 혀를 내민
고양이는 내 무릎 위에서 멀고 먼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양이의 귀는
한쪽으로 쏠려있고
말해지지 않은
약속은 유예된 새벽을 건져 올렸다
더 기다리는 사람과
늘 기다리는 사람의
거리는 누가 잴 수 있을가?
청색을 모아들인
플루토의 별들이 일렬로 줄을 선다
바다의 심연에서 떠오르는
예언자의 칼처럼
- 「무릎 위의 고양이처럼」 전문
그래, 이제 단칼이 필요하다. 화자의 결단이 필요할 때다. 이 고체들을 부숴버릴 것인가. 형틀에 부어도 모양을 바꾸지 않는 이 고집들이 그녀 안에서 어느덧 단단해지고 있다. 껍질을 딱딱하게 하는 것은 방어한다는 것이다. “예언자의 칼”로 화자는 이 방어자들을 깨부술지 더 단단한 모양으로 깎을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다음 모양이 궁금하다. 화자는 이 고체들과 다른 이야기를 만들며 계속해서 흥미로운 노래를 불러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계속해서 고체의 회화를 그려나갈 것이고 회화는 굳고 녹으며 독자를 대면할 것이다. 그녀의 전시회엔 테레핀 냄새가 진동하고 한쪽 벽에선 그 고집스런 회화를 뚫고 나가려는 머리 터진 새들도 보이겠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 그녀에겐 굳어버린 유리에 진심을 부으며 고체의 회화가 뚝뚝, 떨어지길 기다릴 고집이 있으니 말이다.
손미
2009년 『문학사상』시 부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