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11. 월요일>
꽃은 피었다 지고, 그 자리에는 열매가 토실토실 익어간다.
본격적인 장마와 여름이 오기 전에 일상과는 다른 곳에서 삶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
훌쩍 제주로 떠났다. 세 가족이 여행할 때, 온전히 행복하다.
아침 7시에 집에서 출발해서 완도에 도착해서 오후 3시에 자동차를 선적하고 배를 탔다. 3시간 만에 제주에 간다는 고속 카페리호가 사고 나서 ‘레드 펄’이라는 작은 배를 탔더니 시설이 열악했다. 의자는 없고 모두 큰 방에 사람들로 빼곡했다. 노예선이나 포로수용선을 생각나게 하는 배다. 추자도에 한 번 손님을 내려주고, 제주에 도착하니 4시간 반이나 걸렸다. 재승이는 흔들거리는 배에서 불안해하더니 다행히 1시간 뒤에 진정 되어서 아빠 옆에 팔베개하고 누웠다. 여행도 인생처럼 도처에 암초와 꽃밭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제주여객선터미날은 제주 공항과 가깝고, 남편이 인터넷으로 예약한 숙소 ‘오슬로호텔’도 그 인근이다.
우리 자동차를 타고 제주시를 질주하니 감개무량하다. 순식간에 숙소에 도착했다.
때맞춰 빗님이 내렸다. 호텔 바로 앞에 제주 밤바다가 고요히 드러누웠고, 둥근 수은등이 곳곳에 박힌 정갈하고 작고 예쁜 숙소를 보는 순간, 가슴 속 깊이 숨은 노스탤지어가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가슴이 시리다. 나는 무엇인가? 너는 무엇인가? 우리의 이 여행의 종착점은?
목욕을 하고 밥을 해서 아이스박스에 준비해온 반찬으로 식사했다. 여행 중 한 두 끼 밥을 해먹는 것은 참으로 편리하다. 무엇보다 재승이가 좋아한다. 재승이는 코펠 밑바닥에 생긴 누룽지에 물을 부어서 끓인 누룽지죽을 좋아한다.
<2018. 6. 12. 화요일>
간밤에 재승이도, 나도 잠을 통 자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어쩌랴. 여행자의 운명은 길을 나서서 걷고 또 걷는 것이니. 호텔에서 가벼운 부페를 먹었다. 1인당 일만 원. 재승이는 간밤에 다리를 심하게 긁어서 침대보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프론트에서 괜찮다는 것을 남편은 기어이 세탁비로 일만 원을 냈다. 무거운 몸으로 유월의 햇살이 쏟아지는 제주를 걸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프다. 살아있는 동안 건강해야한다. 피곤하고 아프니 얼굴 근육은 더욱 뭉쳐서 말하기가 어렵다.
첫 번째 여행지, ‘용두암’에 도착했다. 근처에서 한라봉 6개를 일만 원에 샀다.
애월바다를 거쳐 서귀포로 내려갔다. ‘추사 유배지’에 도착했다. 몇 년 전에 본 유배지 앞에 추사 기념관을 새로 지었다. 모습은 세한도에 나오는 초가집 모양이다. 9년간 이곳에서 살면서 추사는 그의 시서화 작품을 완성한다. 타고난 천재성의 자질에 더해진 그의 처절한 고독과 집념과 열정이 절절히 느껴진다.
올해 2월, 일본 나오시마에 지추미술관을 지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우리나라에 지었다는 ‘본태박불관’으로 향했다. 먼저 ‘방주 교회’가 나온다. 교회 주변을 얕은 물로 두른 방주 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방주를 연상시킨다.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이타미 준’의 작품이다. 금속같이 단단한 지붕이 햇빛을 반사해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다.
방주 교회를 조금 지나면 본태박물관이 나온다. 노출 콘크리트와 독특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안도의 작품이다. 박물관 안에는 우리나라 고유의 찬란한 수공예품이 많이 전시되어있다. 곳곳에 예술품이 설치되어있고…….
본태박물관 식당에서 우동과 비빔면으로 점을 찍고는 태평양에서 운영하는 오설록 기념관과 차밭을 둘러보았다.
오후 3시 조금 넘어 ‘서귀포칼호텔 스위트 룸’으로 들어왔다.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호사이다. 정상가가 55만원이라는데 할인해서 25만5천원이란다. 아침 부페로 일인당 2만원이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을 질렀다. 객실은 들은 바대로 호사스러웠지만, 창 너머 펼쳐지는 광활한 잔디밭과 야자수와 연못, 정자는 상상 이상의 파라다이스이다. 파라다이스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곳이구나 하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너른 잔디밭이 원래는 국공유지로 올레길 이었는데 한진그룹 이명희씨가 출입을 통제했단다. 제주도민들이 원상태로 돌려달라고 민원을 냈다고 한다. 남은 반찬으로 저녁밥을 지어먹고, 바깥으로 나가 잔디밭을 걸었다. 그리고는 천지연폭포를 감상했다.
<2018. 6. 13. 수요일>
숙면을 취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칼호텔 식당에서 거하게 부페를 먹었다.
객실로 돌아오자 남편이 심장이 울렁이며 머리까지 아프단다. 누우면 괜찮다가 일어서면 머리가 어지럽다기에 바로 서귀포의료원 응급실로 갔다. 곧 정상으로 남편이 돌아왔지만 의사가 소화불량이면 그럴 수 있다면서 소화제를 처방해줬다.
살짝 흐린 날, 사려니숲길을 걸었다. ‘사려니’란 제주말로 ‘신성한 곳’이란 뜻이다. 총 길이 15km, 입구는 두 군데이다. 비자림으로 들어가는 곳과 붉은오름 쪽이다. 붉은 오름 쪽을 택해서 조금 걸었다. 붉은오름으로 들어가는 국도길 양변으로 끝없이 산수국이 가로수 아래 피어있다. 사려니 입구에 주차하고 걸어가니 또 산수국이 양변으로 천지삐깔이다. 달희님이 말한 대로 원 없이 산수국을 보고 보았다. 산수국 빛깔은 신비한 청보랏빛, 마법과 순정의 빛깔이고 모양이다. 산수국 필 때, 절묘하게 제주에 왔구나~ 이렇게 행운과 불운이 아무도 모르게 길섶마다 숨겨져 있다. 사려니 숲길 입구에 귤과 핫도그로 점심을 먹었다.
남편의 제안으로 ‘제주4.3평화공원’에 갔다. 그릇 모양의 장대한 기념관과 너른 평화공원을 보는 순간, 그 날의 울부짖음과 피냄새가 훅 덮쳐온다. 기념관은 그대로 우리 근현대사 비극의 역사 공부장이다. 제목만 읽어도 온전히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방대하다. 분명한 것은 이 제주 4.3은 우리 역사의 처절한 비극이다. 좌우로 나뉘어져 이념의 극단적 호불호로 무장한 사람들의 아수라장이다. 제주 도민 1/10, 3만 명이 희생되었다. 도대체 빨갱이면 어떻고, 우익이면 어떻다는 말인가? 평화공원은 수많은 사람들의 혼백을 추도하기 위해서 잘 다듬었다. 둥근 연못 위에 큰 동그라미가 인상적이다. 결국은 모든 대립은 사라지고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는 평화, 남편은 몇 번이나 평화공원에 잘 왔다고 말한다. 나도 그렇다. 제주를 더 잘 이해하고 깊이 사랑할 것 같다.
‘정방폭포’를 보았다. 정방폭포는 제주 3대 폭포에 들어가며, 유일하게 바다로 바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이다. 정방폭포 바로 옆에 ‘서불전시관’에 들렀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서불을 제주로 보내서 이곳 서귀포를 거쳐 갔다고 이곳 지명이 서귀포이다.
갈치조림으로 이른 저녁을 먹었다.
제주시에 있는 ‘리젠트 마린 호텔’로 가면서 ‘감귤박물관’에 잠시 들렀다.
목욕을 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제주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이다. 등대가 여러 개 보인다. 빨강, 초록의 불빛이 번갈아 반짝인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김밥천국에 들러서 우동과 라면을 먹었다.
<2018. 6. 14. 목요일>
호텔 부페 먹는 대신에 호텔 근처에서 고등어조림으로 아침을 먹었다. 재승이는 부페보다 이런 한식을 더 잘 먹는다. 11시 반부터 여객선터미날에서 선적을 해야 한다. 어디로 갈까?
호텔에서 40km 떨어진 제주시 한경면 ‘생각하는 정원’으로 향했다. 이곳은 농부 성범영이 1968년부터 1만 2천 평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수많은 생각과 집념의 결실로 맺은 세계적인, 가장 제주적인 정원이다. 창조와 예술, 심오한 사상과 철학이 융합된 한 사람의 꿈과 열정으로 아름다운 정원으로 태어났다. 정원 내 가게에서 성범영의 자선적 책을 구입해서 직접 싸인도 받았다.
다시 제주시로 돌아왔다. 여객선터미널 제4부두에서 선적하고 터미널 이층에서 점심을 먹었다. 먹어본 음식 중 최악이다. 밑반찬, 라면, 순부두찌개, 돈가스가 모두 맛이 없고 싱싱하지 않았다. 식당 주인들의 영악함이라니.
일찍 ‘산타마리노’에 들어가서 입구 쪽 방에 자리를 잡았다. 올 때보다 배도 훨씬 크고 뱃삯도 선적비도 두 배 이상이고, 각종 편의 시설이 즐비하다. 바다는 역조현상으로 시간이 더 걸려서 오후 1시 40분에 출발해서 7시가 되어서 자동차를 빼서 목포시로 나왔다. 집에 돌아오니 자정이다.
고양이 래미도, 공부할 것도, 꽃밭도 채마밭도 까마득히 잊었다.
임사 상태에서 다시 부활한 듯, 모든 것이 새롭다. 꽃으로 가득한 우리집은 칼 호텔보다 더욱 근사하고 멋있다. 편안한 삶을 위한다면 여행은 전혀 편안하지 않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문득 깨닫는 소소한 진실들, 불편하고 힘든 것을 통해서 삶에 대한 자신감과 소중함,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은 여행이 주는 놀라운 선물!
※<여행 경비>
교통비
완도에서 제주행 뱃삯; 23,000원, 차량선적비; 75,000원
제주에서 목포행 뱃삯; 66,100원, 차량 선적비; 140,000원
총계; 304,100원
호텔숙박비
오슬로 호텔; 70,000원
칼호텔 스위트룸; 270,000원
리젠트 마린 호텔; 93,333원
기타 경비 등,
여행 경비 총계는 1,30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