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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사는 莊子
- 고형렬 의 시세계
신진숙
장자는 도시로 가 시인이 되었다.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무용(無用)하고 무익(無益)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그는 낙오한다. 스스로의 영혼을 아무런 가책 없이 다른 상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과감함이 그에게는 없다. 그는 인(人)과 비인(非人)을 나누지 않았으나, 상품으로 비약함으로써 스스로의 영혼을 사물화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러한 자신의 내면을 발견함으로써 존재했다. 그야말로 시인이 된 장자는 도시의 허(虛), 빈 곳이었다.
마침내 그는 미끄러진다, 세계로부터. 도시의 유리벽들이 매순간 그 자신의 쓸모없음을 비추었다. 하여 그는 무위(無爲)한 채 도시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수많은 상(像)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상은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음을 깨닫는다. 옳음과 그름, 행과 불행, 꿈과 현실, 물(物)과 아(我), 생(生)과 사(死). 그러나 그 모든 구별은 결국 인간의 것이면서 인간을 불행하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 인간이 아닌 존재 혹은 인간 세상 바깥, 저 우주(자연)에서 본다면 모든 상은 하나의 본체에서 시작된다. 인위적인 모든 상은 부자연스럽고 부자유하다. 유용하지만 무용하고 무용하지만 유용한 삶이 있지 않은가. 모든 구분을 넘어서는 자연의 참진리, 의미 가운데 존재하는 허(虛), 중허(中虛)를 볼 수 없다면 인간은 인간이 만든 모든 합리성의 감옥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허는 인간의 모든 말과 윤리가 다시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래서일까. 도시에서 장자는 말 대신 시를 품었다. 시는 도시의 허(虛)를 비출 것이었다. 시는 감각이라는 실재, 가령 유리체를 지닌 눈에서 시작되지만 눈에 맺힌 상 자체를 벗어나는 기묘한 힘을 지녔으므로. 시는 감각이면서 감각이 아니며, 의미이면서 의미가 아닌 말을 쓴다. 시의 목적은 하나의 이미지 혹은 의미가 될 수 없다. 시는 어떤 것을 추구하기보다 있음과 없음을 모두 비추는 ‘참된 흐름’을 추구한다. 이제 장자는 언어를 통해 삶의 더 깊은 심연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도시든 시골이든 중요할까. 통찰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허로써 세상을 다시 쓰는/읽는 것이다.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바로 이 기묘한 굴곡이 시인 고형렬이 우리에게 존재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는 최근 그의 시집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에서도 마찬가지다.
무용(無用)과 무용(無用)
시는 도시다. 시인이 만든 언어의 공간 속에 사람들이 들어와 한숨짓거나 노래한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모호한 표정으로 떠돌아다닌다. 그때마다 시인이 의도하지 않은 길들이 만들어진다. 시인이 지은 것은 언어의 집일지라도, 사람들이 걷고 있는 것은 분명 거리였다. 의식과 무의식이 교호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분리가 되지 않은 채 흐르는 공간. 그곳에서 사람들은 다른 꿈을 꾸고 다른 생각을 한다. 그들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왜 우리는 그토록 유용한 삶을 꿈꾸었던 것인가. 우리가 꿈꾸었던 도시에서 살고 있으나 왜 상처 받는가. 왜 우리는 타인의 죽음마저 돌볼 수도 없게 되었는가. 시가 지은 이 도시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도시 아래 가라앉아 볼 수 없던 도시였다. 도시의 모든 효율적 교환체계를 거부한 새로운 도시가, 시인의 손끝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자 모든 말들이 합선(合線)이 된 듯 혼란에 빠진다. 그것은 마치 거울처럼 마주한 두 도시 이야기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고형렬 시인에게 삶은 그처럼 두 겹이다. 가령 유리에 비친 사람과 유리 바깥에 서 있는 몸 사이에는 닮은 점이 있다. 그러나 같지 않다.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와 나로서 존재하는 나 사이에 비슷하지만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이 둘은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두 개의 꽃이다. 생과 사가 삶이라는 본체의 두 양태이듯. 중요한 것은 생의 어떤 모습도 참 모습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보이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기준이 될 수 없다. 또 어느 하나가 허상이고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진리는 언제나 이미 두 겹 또는 겹의 겹으로 존재한다. 사물과 존재의 허를 보는 것은 참 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유리로 이루어진 도시와 유리가 아닌 상상의 도시, 그리고 실재로 살아가고 있는 유리벽 속 인간의 도시. 이 모든 도시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허(虛)는 그 모든 도시의 근원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도시가 매설한 것, 도시가 상실한 것, 원래의 자연, 무위함으로써 유위하며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우주의 이치를 향해 나아가라고. 그것이 시인이 “무익생(無益生)”(「빠져나오지 못하는 인간의 거울」)이면서도 세계에 대한 깊은 성찰에 도달하는 이유이다.
이에 시인은 두 도시의 무용을 마주 보게 한다. 모든 것이 화려하지만 지혜를 주지 않는 자본의 유용한 무용과 무능하지만 삶 자체를 주는 시의 무용한 유용이 그것이다. 하나는 삶의 힘을 지녔으나 근본적으로 무기력하다. 소모적이고 반복될 뿐 어떤 차원의 변화도 가져올 기미가 없다. 진화할 수 없는 유리 도시. 다른 하나는 이 유리 도시에서 쓸모없는 것으로 각인된 영역. 그러나 이 무용한 존재들 속에서 참 나가 발견된다. 아픔 속에서 다른 무엇인가가 돋아난다. 기이한 진화가 시작되려 한다. 이렇듯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른 상상, 다른 언어다. 그러나 시인은 이 두 개의 언어를 다르다 말하지 않는다. 이 또한 하나의 본체에서 시작된 삶의 두 양태이므로. 유리 도시의 삶은 역설적으로 시의 삶을 “진화”시킬 것이다.
그 어떤 울음의 음악도 차단된 마천루의 가을
비늘만한 뒷날개를 움직이는 흑갈색 남자
15층 수직면, 꼭꼭 닫힌 사각형의 유리창들
수십만 개의 소형 타일이 붙은 공포의 벽
그 커튼 밖은 87층 높이의 허공
깎아지는 유리창 가까이 누군가 날아올라와
사라진 벽의 비계에 붙어 있는 달 건너편
지구의 심야
너는 똥구멍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살아나, 나는 최초의 꿈을꾸고 있는 한 인간
또한 최초의 고통을 통과하고 있는 시간
세 쌍의 다리를 미끄러뜨리는
유리벽은 서정을 진화시킨다
아직도 하늘엔 두려움이 남아 있다
파랗게 빙장(氷葬)시킬 도시 상공 속에서 그는
피뢰침 끝을 앙당그려 잡았지만 미끄러진 손바닥
이제부터 흑갈색의 한 남자가
하늘 바닥에 붙어 도시를 향해 울기 시작한다
- 「벋정다리 귀꾸라미의 유리창-추살(秋殺)은 서정을 진화시킨다」
시인이 보고 있는 허공 역시 두 겹이다. 물리적으로 만들어진 높이들 속의 허공, 그곳엔 삶이 자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빙장”될 것처럼 춥다. 그러나 이 모든 허공들 속의 진정한 허(虛). 그것은 허공마저 하나의 허라는 것을 보여주는 허(虛)다. 허공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마천루의 유리창들이 만들어낸 환시이다. 어찌 보면 허공은 애초부터 있었다. 다만 87층이라는 높이가 생기면서 그곳이 공포의 장소로 변했을 뿐. 벽을 만들지 않았다면 허공 또한 공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높이로 인해 두려움을 알게 된다. 두려움과 상실의 근원은 대부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마천루가 만들어낸 환시가 진짜가 아니듯 우리가 느끼는 공포 또한 진짜가 아니다. 진정한 앎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허를 깨닫는 데 있다. 마천루 속에서도 귀뚜라미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귀뚜라미의 눈으로 본다면, 87층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87층의 높이가 주는 두려움은 오로지 인간의 감각 속에만 실재한다. 그러므로 “곤충의 눈”이 인간의 눈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 없다.(「어두워지는 지하도」) 미물은 없다. 미물을 구분하는 인간의 마음이 있을 뿐. 이 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소음과 울음
시인이 가장 어둡고, 가장 가난한 버려진 존재들로부터 허(虛)의 사유를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감출 수 없는 가난은 도시의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들리지 않는다. 도시는 가난한 이들이 “대곡”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도시의 유리벽은 모든 소리들이 튕겨져 미끄러진다. 세상은 거울 속에 매장된 이미지들처럼, 눈에 보여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도시는 귀가 없는 거울과 같다. 소리를 담을 마음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평하고 미끄럽다. 우리는 보이는 모든 시각적인 것들에 사로잡혀 울음을 듣지 못한다. 도시는 굉음과 소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이미지의 공간이며,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유지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도시적 삶에서 누군가의 슬픔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한 존재의 울음을 담을 수 있기 위해서는 마음의 “요조(凹彫)”(「알아들을 수가 없는 울음소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시의 거울은 울퉁불퉁하다. 도시의 울음 때문이다. 울음에 반응하는 청각은 평평할 수 없다. 아주 작은 것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고요한 마음이 시(詩)다.
그러므로 고형렬 시인은 허(虛)를 이야기하기 위해 아주 단순하게도 울음소리에 집중한다. 허에 대한 인식은 바로 이 거울 이미지의 뒷면, 도시의 소음 속에 각인된 진짜 소리, 그 캄캄한 누군가의 울음을 듣는 것이다. 마음은 움푹한 요면(凹面)이 되고 시는 풍경의 귀가 된다.
바람이 불면 빌딩들이 운다
빌딩 벽을 타고 오른 사각의 도면들이 전율한다
사변과 모서리를 지키고 껴안기 위해
그 아래 황사가 유사(類似) 태평천하처럼 떠 있다
먼지가 된 모래들이 깨어지는 소리가 바각댄다
거대한 빔과 철근을 움켜쥔 모래알들이
양회 속에서 죽음으로 버티는 고층 빌딩의 내진(耐震)
흔들, 흔들
노래를 부르고, 외로운 육체들은 각자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늙어가고 있다
한땐 생사도 일대사가 아니다, 일상의 예외일 뿐
장님의 문명 한가운데 고통은 요조(凹彫)된다
바람이 불면 청맹과니 하늘에 빌딩이 흔들리고
직하 88층 아래 인도에서
그는 시간보다 빠른 기억과 빛 속에 갇힌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
도시에서, 아니 지구에서, 땅속에서, 철골에서
먼 기억으로부터 울리고 있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 2013년 1월 10일 새벽 4시 12분」
마음이 없다면 도시는 묵음(默音)의 세계와 같다. 도시의 소음은 모든 소리가 뒤섞여 있으나 어떤 소리도 음악이나 말이 되지는 않는다. 거대한 소음 속에서 사람들은 마음의 귀를 상실해간다. 문명이 진화할수록 마음은 퇴화한다. 시인이 발견한 것은 바로 이 도시의 마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속 도시의 울음. “새벽 4시 12분”에 문득 발견되는. 아무도 모르게 도시 속 도시가 울고 있음을 깨닫는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그”가 “그의 나”(「December 2013」)의 울음을 들으며 존재하듯, 도시는 도시의 울음과 함께 존재한다.
시인은 이 도시의 울음을 지구의 울음으로 이해한다. 이 도시의 울음이 도시를 넘어 지구의 “먼 기억”에 닿아 있다고 말한다. 도시가 우는 것을 자연이 우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이 거대한 땅의 울음을 인간은 분별해낼 수 없다. 도시인이 된 지구인들은 이미 너무도 둔감해지고 말았다. 인간은 인간의 소리마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무한한 시간으로부터 건너오는 지구의 울음을 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시는, 너무나 미세하여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모래의 소리를 듣는다. 공간의 평면 속에 시간의 심연을 각인한다. “먼지가 된 모래들이 깨어지는” 시간, 지구의 “전율”을 도시의 “도면” 위에 새겨 넣는 것이다.
그렇다. 소음의 세계는 전율이 사라진 세계다. 전율은 말하자면 느낌의 세계다. 느낌은 사물의 겉모습을 뚫고 나아가는 마음의 갑작스러운 ‘힘’이다. 그러므로 도시가 잃어버린 것은 미래의 환희가 아니라 삶의 느낌 자체이다. 우리는 슬픈 사람들이 “언제 저 발코니에 도착”하는지 알지 못한다.(「이 도시의 모든 아파트는」)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타자의 울음을 느낄 수 없는 맹목의 세계에 진입했다.
그러므로 장자는 모든 것 속에 허(虛)를 보았다. 시인이 된 장자 역시 허를 본다. 허가 아니었다면, 소음 속에서 타자의 울음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도시의 유리-거울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만을 비추는 유리벽에서는 나 이외의 어떤 존재도 기거할 수 없다. 우리는 타자의 거울을 통해 세계를 다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허(虛)는, 도시로 간 장자가 시를 하나의 윤리적 물음으로 변환하는 근거이다.
지구와 이승
허(虛)의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빈 곳이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어떤 곳이 아니라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유한성의 공간이다. 보이는 모든 것의 세계는 시간에 의해 소멸해갈 것이다. 아무리 강고해 보여도 도시는 매순간 파멸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수많은 누군가의 묻혀진 “울음”이 이를 증명해 주지 않는가. 다만 소음이 너무나 커서 듣지 못할 뿐이다. 울음이 너무나 고요하고 거대해서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 “인아(人我)”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우주는 느낄 수 없는 공간이다.
삶을 느낀다는 것은 지구 밖에서 지구를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보다 더 높은 위치는 없다. “네가 죽은 옥상보다/ 더 높은 옥상에 올라가면 너의 죽음이 보일까/ 98층 이상은 그에게 없다/ 그 이상의 고도도 상상도 약속도// 그 시는 98층을 올라가지 못한다”(「98층의 시」). 자연을 인간을 위한 토대 또는 배경으로 이해했던 것처럼 인간은 지구를 우주의 높이에서 관찰할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다. 구체적인 한 인간의 슬픔에 도달하지 못한다. 보지 못한다. 모든 것을 보고도 모든 것을 보지 못한 것과 같은 맹목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지구를 “이승”이라 부른다. 그것은 공간의 높이가 아닌 사후의 관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보는 것이다. 저승의 반대편에서 본다면 이승은 생의 공간이자 죽음 이후 혹은 죽음 이전의 공간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생전을 넘어 “미생전(未生前)”의 세계를 이어져 있다. 나의 삶은 어머니 혹은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 삶, 나라는 존재의 기미도 보이지 않던 미생전의 삶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미 다 가고 없는 사람들로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르는 죽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꿈이란 게 있을까
돌아오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대신하는 것인가
그들이 돌아오면 우리는 돌아가야 하는 대체 존재들일까
물이 지나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모른 채
나는 그들과 정말 저 양평군 지평면 그 언저리에서 사는 것일까
저 지평 언저리 역시 하나의 꿈이라면
저 하늘과 별과 산과 집들이 아직은 깨어날 수 없는 꿈이라면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미생전 어느 날이라면
-「미생전(未生前) 경험의 시」
그렇기에 아지 오직 않은 미생전의 삶은 반드시 인간의 형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인(人) 또는 비인(非人)을 구분할 수 없다. 또 우리가 먼 과거의 미생전, 태어나지도 않은 먼 기억에서 왔다면, 우리는 더 먼 후대의 누군가의 미생전이 될 것이다. “대체 존재”다. 시인이 말하는 허의 윤리가 보다 구체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시간으로부터 유전된 삶이다. 나라는 존재는 “저 하늘과 별과 산과 집들이 아직은 깨어날 수 없는 꿈”과 같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꿈이 될 수 있는가. 고형렬 시인이 모색하는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우를 것이다.
따라서 지구는 단지 거기 확고하게 존재하는 물리적 땅이 아니라 삶이 유전하는 공간이다. 즉, 이승이다.
저녁 하늘에 희미한 라이트 하나
빛은 나의 온몸에 오렌지빛을 퍼뜨린다
오렌지빛을 사랑하게 된 까닭이다
복잡하지만 너무나 단순한 도시의 역사
죽은 친구에게
달리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달 건너편이라고 생략할까
일상의 삶들은 이 시각,
빌딩과 사람과 교통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인다
멀리 아니 가까이 암병동 유리창 안쪽
희미한 라이트가 죽어가는 눈을 만진다
그 반대쪽 마음은
만물을 마중하는 그릇의 바닥보다 희다
반쪽을 어둠에 둔 지구의 모든 시간은
귀를 만지며,
으슬으슬 검은 거울 속으로 입산하다
오렌지빛으로 한동안 남아 있다, 간다
- 「태양 마중」
지구는 언제나 자신의 반쪽을 어둠 속에 남겨둔다. 땅은 하나지만 서로 상반되는 “반대쪽 마음”을 지닌다. 삶과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생의 한쪽에 태양이 뜬다면 다른 쪽엔 암병동처럼 어둔 밤이 있을 것이다. 빌딩과 사람을 오렌지빛으로 물들이는 빛의 반대편에는 죽어가는 이의 또 다른 생이 있다. 한쪽에 빛이 비추는 동인 다른 한쪽은 “만물을 마중하는 그릇”이 된다. 하여 모든 것은 “있다, 간다”. 영원히 부재하거나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없다. 우주의 이치가 그렇다.
따라서 삶에 대한 우리의 자세 역시 달라져야 한다.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므로 삶이 찬란하다. 죽음은 삶을 마중하고 삶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삶이 될 수 있다.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공간으로의 이동이라고 말해야 한다. 저승에서 본다면 지구는 이승이 아닌가. 누군가의 또 다른 생이 시작되고 멈추고 또 시작하는 무한한 순환의 흐름이 존재하는 곳. 그러므로 지구와 이승을 다른 것, 다른 차원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승은 곧 이 지구이다. 도시의 도시가 존재하듯, ‘나의 그 그의 나’가 있듯, 지구의 이승이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허(虛)가 아니면 볼 수 없다. 어떤 생도 완전하지 않다. 어떤 죽음도 완전할 수 없듯이. 생은 사의 다른 이름이며, 사는 생의 본질이다. “서로 스며 생이 되고/ 서로 스며 죽음이” 된다.(「풀과 물고기」) 그 점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든 것의 거울이며, 서로를 비춤으로써 반성하는 상호관계성 속에 놓여 있다.
도시에 사는 장자가 도시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즉, 지구 위에서 도시의 바깥을 찾는 것은 허(虛)하다. 허의 시각에서 본다면 도시와 도시 밖이라는 구분마저 무의미하다. 인(人)과 비인(非人), 물과 마음, 무용(無用)과 유용(有用) 사이의 모든 구분이 허(虛)하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참 모습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외계”를 상상한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시로부터 초월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지구 위에서, 그 속에서 시의 윤리, 타자의 윤리를 찾아야 한다. 지구 바깥에서, 지구보다 더 높은 곳에서 지구를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 바로 그 위에 문명에 대한 반성이, 시(詩)가 있다. 그것은 고형렬 시인이 이해한 허(虛)의 윤리이자 시의 윤리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물음이 생겨난다. 아마도 그것은 시인의 물임이기도 할 것이다. 장자가 될 수 없는 우리에게, 무익생의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그것은 초탈의 기미가 아닌가. 시가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삶은 시를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신진숙 2005년 유심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 현재 경희대 국제지역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