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의 꿈
나목들이 처참한 겨울나기를 하고 있다.
앙상한 가지에 홍시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버지는 지금 홍시다. 홍시에 아버지의 마른 얼굴이 자꾸만 겹쳐 어른거린다.
어느 날, 아버지는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수술만 하면 통증이 없어질 것이라는 말에 척추수술을 했는데 청천하늘에 날벼락처럼 앉을 수도 없는 하반신 마비가 되고 만 것이다.
병원 생활이 벌써 일 년째다. 참담한 하반신 마비, 예고 없이 찾아든 현실에 아버지는 한동안 망연하더니 서서히 허물어져 갔다.
올케를 통해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어눌한 발음에 목소리는 힘이 없다. 사는 게 바쁘다고 병실에 왔다가 얼굴만 보이고 가는 자식들. 그런 자식들이 무에 그리 보고 싶은지 참고 기다리기만 하는 못난(?) 아버지. 오빠나 남동생에겐 내색도 안하던 분이 나한테만은 웬일인지 보고 싶다 하신다. 고명딸이란 아버지에게 그런 존재이던가. 아버지의 그리움을 헤아리지 못한 불효가 가슴이 아리다
죽을 드시고 깊은 잠에 빠져 아버진 지푸라기처럼 까부라져 있었다.
병은 날마다 깊어지고 약 분량과 잠자는 시간만 늘어난다. 간병사가 딸기를 입에 물려가며 몇 번 건드려도 미동도 없다. 앙상한 다리가 감나무의 가지처럼 가늘다. 태아마냥 구부리고 있다.
밤과 낮을 바꾸어 사는 아버지. 두 시간 가까이, 잠을 깨워보려고 팔이며 다리며 머리를 만져보아도 ‘응응’ 대답뿐이다.
“아버지, 저희들만 가서 죄송해요.”
“어,서, 가.”
아버질 병실에 놔두고 우리들 남매는 다시 현실로 귀가해야 한다. 아버지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아버지를 버려두고 가는 것 같다. 아버진 한참동안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다. 아버진, 집으로 같이 가자는 말을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꿈은 의사였다.
할머니 말씀에 아버진 전교에서 일, 이등을 하셨다 한다. 할머니가 극구 말리는 바람에 만주의대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할머니 때문에 청운의 꿈을 접었다는 아버지. 효자였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묵묵히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향학열을 접고 삼촌과 조카를 일류대학에 보냈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낮에는 직장에 가시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했다. 아버지의 진정한 행복은 공부를 많이 해서 자기 뜻을 펼치는 것이란다. 힘든 줄도 모르고 공부를 하던 아버지는 대학 졸업을 목전에 두고 그만두어야 했다.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 때문에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 때 우리 오남매는 모두 학생이었다. 아버진 우리를 많이 가르치고 싶어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다 당신 탓이려니 자탄하시던 아버지.
아버진 대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등지다시피 서울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가 이것저것, 어떻게 하셨는지 아버진 간신히 집에다가 시계수정공장을 차렸다. 사각사각 유리를 재단하던 아버지 소리가 내 귀에 아직도 들리는 것 같다. 아버진 돋보기를 밀어 올리며 새벽마다 힘든 일을 했다.
밥하는 아이까지 여섯 명을 다 출가 시킨 그 세월이 무려 십여 년, 옛날만은 못하지만 아버진 다시 안정된 삶을 찾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아버진 늘 그대로였다. 아침이면 신문으로 시작해서 온종일 삼국지나 바둑에 관한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서당에서 공부하는 사람 같았다.
우리 오남매는 아직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사촌오라버니가 아버지의 시름을 덜어드렸다. 아들이 미국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내가 늦은 나이에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하고 에세이 문학의 완료추천을 받았을 때, ‘진작 그 길을 갔어야 했다’ 며 당신의 꿈처럼 반겨주던 아버지.
여든 여섯의 노령에 중병을 앓는 분이 아직도 공부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마냥 지난날들을 되돌아보고만 있다.
마른 눈물이 설핏 비치는 아버지에게 나는 속으로 말한다.
아버지, 저희들 잘 키우셨어요. 아버지의 꿈은 이루어질 거예요.
2010년 1월
첫댓글 저의 아버님은 고명딸인 저에게 참 각별하셨답니다. 영정 앞에서 이 글을 읽어드렸습니다.
아버지의 꿈은 이미 이루어지셨습니다.. 고운 삶을 사는 심주희님을 길러내신 아버님은 참 훌륭하신 분입니다..아버님의 명복을 빕니다.
박경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생전에 보여드렸으면 조금 덜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래도 내려다 보시며 흐뭇하셨겠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혜연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이 글을 올리는 마음 어떠할까요..............에세이문학 봄호에서 글을 읽고 가슴이 아렸더랬습니다. 심주희님, 팟팅~
김경애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에서 우리들의 삶이 사랑속에서 이루어졌슴을 느낍니다 살아생전 자신을 희생하여 가족 잘되기를 마다 않으셨던 어르신의 모습이 글속에서 한편의 스틸사진마냥 떠오르네요--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김형구 선생님.^^
에세이 286쪽에 올라 있었어요. 읽으면서 감동 받았다는 마씀을 비로소 드립니다.
준빠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