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箕子世家
許 穆
箕子는 殷之宗室也라 封於箕하고 子爵이라 故曰 箕子라 或曰 名胥餘라 爲殷太師라
기자는 殷나라 宗室이다. 箕에 봉해지고 작위가 子이기 때문에 箕子라고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이름은 胥餘이다.”하였다. 은나라 태사(太師)를 지냈다.
帝乙에 有嫡子受하니 資辯捷疾하여 好勇力이라 其庶兄微子啓는 恪愼克孝라 箕子ㅣ 勸帝乙曰 啓ㅣ 賢且長이니 可立爲嗣라하되 帝乙不聽하고 卒立受라
殷王 帝乙에게 嫡子 受가 있었는데, 변론을 잘하고 민첩하며 勇力이 출중하였다. 한편, 수의 庶兄인 微子 啓는 조심하고 삼가며 효행이 뛰어났다. 기자가 제을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계는 어진 데다 또 장자이니, 그를 세워 후사로 삼을 만합니다.”라고 하였으나, 제을이 듣지 않고 마침내 受를 세웠다.
受ㅣ 立爲君하니 號爲紂라 思以威服天下하여 能百戰百克이라 伐有蘇氏하여 取妲己以歸한데 所言皆從이라
수가 즉위하여 임금이 되니, 호를 주(紂)라고 하였다. 위엄으로 천하를 복종시킬 것을 생각하여 능히 백번을 싸워 백번을 이겼다. 有蘇氏를 정벌하여 달기(妲己)라는 여자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그 여자의 말이면 모두 따랐다.
* 호위주(號爲紂): 《사기》 권3 〈은본기(殷本紀)〉에 “천하 사람들이 주라고 하였다.〔天下謂之紂〕” 하였는데, 《시법(諡法)》에 “의로운 이를 해치고 선한 이를 억압하는 것을 주라고 한다.〔殘義損善曰紂〕” 하였다.
* 달기(妲己): 중국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비(妃). 유소(有蘇)의 딸. 주왕은 달기를 몹시 사랑하여 대개 그의 말이라면 들어주고, 주지 육림(酒池肉林) 속에서 밤이 새도록 마시며 극도로 음탕한 짓을 했다고 전해진다. 뒤에 주(周)의 무왕에게 피살되었다. 금모 구미(金毛九尾)의 여우의 화신(化身)이라 하며, 남자를 호리는 요염한 계집을 달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初에 紂ㅣ 始爲象著하니 箕子嘆曰 彼爲象著하니 必不羹藜藿하며 盛以土簋라 遠方珍怪輿馬로 宮室之漸이 自此作矣라하다
초기에 주가 처음 상아 젓가락을 만들자, 기자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이 상아 젓가락을 만들었으니, 필시 나물로 국을 해 먹지 않을 것이며 질그릇에 담아 먹지도 않을 것이다. 먼 지역에서 오는 진기하고 괴이한 물건, 수레와 말, 궁실이 점점 더해지는 것이 이 젓가락에서 시작되겠구나.” 하였다.
紂ㅣ 厚賦稅하여 宮室臺榭陂池侈服이라 爲長夜之飮이라가 懼以失日하여 問左右나 皆不知也라 乃使問箕子하니 箕子私嘆曰 爲天下主而一國皆失日하니 天下其危矣라 一國이 皆不知而我獨知之하니 吾其危矣라하고 辭以醉而不知라
주가 세금을 많이 거두어 궁실을 짓고 누각을 세우며, 못을 파고 의복을 사치스럽게 하였다. 밤새 술을 마시고 놀다가 날짜를 잊은 것이 두려워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모두 알지 못하였다. 이에 사람을 보내 기자에게 물으니, 기자가 혼자 탄식하기를, “천하의 주인이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날짜를 잊도록 하였으니 천하가 위태롭겠구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하는데 나만 알고 있으니 내가 위태롭겠구나.” 하고, 취해서 알지 못한다고 핑계하였다.
紂ㅣ 殘虐百姓하여 爲炮烙之刑하고 炙炙諫輔하니 天下叛之라
주왕이 백성을 잔학하게 다스려 포락형(炮烙刑)을 행하고 간언하고 보필하는 신하에게 지지고 뜸 뜨는 형을 시행하니, 천하가 그를 배반하였다.
* 포락지형(炮烙之刑):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사용한 혹형(酷刑)의 하나로 《고열녀전(古列女傳)》 권7 〈은주달기(殷紂妲己)〉에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아래에 숯불을 피워 놓은 다음 죄 지은 자로 하여금 기둥 위를 걷게 하였는데, 번번이 숯불 속으로 떨어지니 달기가 웃었다. 이 형벌의 이름을 포락형이라고 한다.” 하였다.
* 자자(炙炙): 지지고 뜸뜨는 刑.
周德日盛하니 微子ㅣ 謀於箕子․比干曰 商今其淪喪이 若涉大川에 其無津涯니 將若之何오
주(周)나라의 덕이 날로 왕성해지자 미자가 기자와 비간(比干)에게 상의하여 말하기를, “상나라가 지금 망국의 길로 빠져드는 것이 마치 큰 내를 건너는데 닿을 나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箕子曰 商其淪喪이라도 我不爲臣僕이라 告王子出迪이라 我言刻子니 不出이면 不免殷之祀絶矣라 自靖人自獻于先王이니 我不顧行遯이라
기자가 말하기를, “상나라가 망하더라도 나는 남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다. 告하노니 왕자는 떠나가라. 내가 했던 말이 그대를 해칠 것이니, 떠나지 않으면 은나라의 종사가 끊어지게 될 것이다. 각자 할 도리에 편안히 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자기의 뜻을 선왕에게 바칠 것이니, 나는 떠나가 은둔할 생각은 아예 없다.” 하였다.
* 아언각자(我言刻子): 기자(箕子)가 예전에 제을(帝乙)에게 미자(微子)가 장형(長兄)이면서도 어질다 하여 후계자로 세우도록 권고했는데, 제을이 이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주(紂)를 세웠으므로 주가 반드시 미자를 시기해 해칠 것이라는 말이다.
微子는 抱祭器而逃라 箕子諫紂나 紂不聽하니 或曰 可以去矣라 箕子曰 不可하다 爲人臣하여 諫不聽而去면 是彰其君之惡而自悅於民也니 吾不忍爲也라하고 乃被髮佯狂爲奴라
미자는 제기(祭器)를 싸 들고 도피하였다. 기자가 주에게 간하였으나 주가 듣지 않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떠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기자가 말하기를, “옳지 않다. 신하가 되어 간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고 떠난다면 이것은 임금의 악을 드러내 스스로 백성의 환심을 사는 것이니,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노예가 되었다.
紂囚之하니 鼓琴以自傷한데 後人謂之箕子操라 比干이 諫而不去하니 紂殺之라
주가 옥에 가두자 거문고를 뜯으며 혼자 슬퍼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곡조를 가리켜 〈箕子操〉라고 하였다. 비간이 諫爭하면서 떠나지 않으니, 주가 그를 죽였다.
周武王이 旣平殷亂하고 釋箕子之囚하고 就箕子而問之曰 殷亡何也오 箕子不答하니 武王曰 惟天陰騭下民하여 相協其居하니 我不知彝倫攸敍라하다
周나라 武王이 어지러운 은나라를 평정하고 나서 옥에 갇힌 箕子를 풀어 주고, 기자에게 나아가 묻기를, “은나라는 무엇 때문에 망했습니까?” 하였는데, 기자가 답을 하지 않으니, 무왕이 말하기를, “오직 하늘이 은밀하게 아래 백성을 안정시켜 거처하는 것을 도와 화합하게 하셨으니, 나는 백성의 본성과 윤리를 어떻게 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 하였다.
箕子ㅣ 乃陳洪範九疇하고 述天人之大法하고 敷言皇極之訓하니 凡三十有七章으로 載之周書라
기자가 이에 洪範九疇를 진술하고, 天理와 人事의 大法을 서술하고, 상제의 가르침인 皇極에 대해 부연 설명하였다. 모두 37장으로 《書經》 〈周書〉에 실려 있다.
箕子ㅣ 乃去之하여 至朝鮮한데 殷民從之者ㅣ 五千餘人으로 詩․書․禮․樂․巫․醫․卜․筮之流와 百工․技藝ㅣ 皆從焉이라 武王이 因以封之而不臣也라
그러고 나서야 기자가 떠나서 조선으로 왔는데, 은나라 백성으로서 따라온 사람이 5000여 인으로, 詩, 書, 禮, 樂 및 巫, 醫, 卜, 筮를 다루는 사람과 百工, 技藝가 모두 따라왔다. 무왕이 그대로 기자를 그곳에 봉해 주고 신하로 삼지 않았다.
都平壤하고 古有檀君朝鮮하여 謂之箕子朝鮮이라 始至에 言語不通하여 譯以通其志라 因敎之以禮義農蠶織作하고 畫爲經界하여 行助法이라
평양(平壤)에 도읍하고, 예전에 단군조선이 있었으므로 기자조선이라고 한다. 처음 왔을 때 언어가 통하지 않아 통역하여 그 뜻을 통하였다. 인하여 예의와 農桑과 길쌈을 가르치고, 농토를 구획하여 助法을 행하였다.
* 조법(助法): 은나라에서 시행했던 조세법으로 일종의 정전법(井田法)이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은나라 사람은 70묘에 조법을 시행하였다.” 하였고, 또 “조(助)는 빌린다〔藉〕는 뜻이다.” 하였는데, 백성의 힘을 빌려 공전(公田)을 경작한다는 말이다. 즉 630묘의 농토를 아홉 구역으로 구획하면 1구역당 70묘가 되는데, 8가구가 각각 한 구역씩 사전(私田)으로 소유하고 나머지 한 구역을 공전으로 삼아 8가구의 힘을 빌려 공전을 경작하게 하고 사전에서는 세금을 거두지 않는 제도이다.
立八條之約한데 相殺者는 償以命하고 相傷者는 償以穀하고 相盜者는 男沒爲奴하고 女沒爲婢로되 欲贖者는 人五十萬이라 雖免爲民이라도 俗猶羞之하여 嫁娶에 無所售라
8조의 규약을 세웠는데, 사람을 죽인 자는 목숨으로 갚게 하고, 사람을 다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남자는 몰수하여 노(奴)로 삼고 여자는 몰수하여 비(婢)로 삼되 속바치기를 원하면 1인당 50만을 내게 하였다. 그러나 노비를 면하고 평민이 된다 해도 그들 풍속에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혼인을 맺을 데가 없었다.
風俗無盜하여 門不夜扄하고 行旅野宿하며 婦人은 貞信不淫이라 器用俎豆하고 崇信禮讓하며 不尙兵鬪하니 傍國化之라
풍속에 도둑이 없어서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고 나그네는 들에서 노숙할 수 있었으며, 부인은 정숙하고 신의가 있어 음란하지 않았다. 그릇으로는 조(俎)와 두(豆)를 사용하고, 예를 지켜 겸양하는 사람을 존숭하고 믿으며, 전쟁하고 싸우는 것을 숭상하지 않으니, 이웃 나라들이 교화되었다.
* 기용조두(器用俎豆): 조(俎)와 두(豆)는 제사나 연향 때 음식을 담는 예기(禮器)로, 문물(文物)과 예의(禮義)가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箕子ㅣ 朝周에 過故殷墟한데 宮室毀壞하고 生禾黍라 箕子ㅣ 作麥秀之歌曰 麥秀漸漸兮여 禾黍油油로다 彼狡童兮여 不與我好兮로다
殷民聞之하고 皆流涕라 箕子之子孫이 相傳이라
기자가 주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 성터를 지났는데, 궁실은 허물어지고 그곳에 벼와 기장이 자라고 있었다. 기자가 〈麥秀歌〉를 짓기를,
“보리 이삭 패어 늘어지고, 벼와 기장 무성하구나. 저 교활한 아이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 하였는데, 은나라 백성은 이 노래를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기자의 자손이 대를 이어 전수하였다.
至周之末世하여 燕伯이 稱爲王하고 東略地하니 朝鮮侯ㅣ 欲興兵伐燕하여 以尊周室이나 大夫禮諫而止하고 使西說燕王하여 約兩國毋相侵伐也라
주나라 말세에 이르러 燕伯이 왕이라 참칭하고 동쪽으로 땅을 침략하였다. 朝鮮侯가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정벌함으로써 주나라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으나, 대부 禮의 간언으로 중지하고, 禮로 하여금 서쪽으로 가서 연왕을 달래 두 나라가 서로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도록 하였다.
六國時에 燕略屬眞番朝鮮하고 置吏築塞라 後에 朝鮮侯도 亦稱爲王하고 浸驕逸하니 燕ㅣ 攻其西地二千餘里하여 以滿潘汗爲界라 及秦幷天下하여 使將軍蒙恬으로 築長城한데 至遼東하여 爲外徼하니 朝鮮王否ㅣ 大懼하여 遂服焉이라 否卒하고 太子準立이라 秦滅하니 燕趙之民多亡入朝鮮이라
六國의 시기에 연나라가 침략하여 眞番朝鮮을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보루를 쌓았다. 후에 조선후도 왕이라 僭稱하고 점차 교만하고 방탕해지니, 연나라가 서쪽 지역 2000여 리를 쳐서 滿潘汗으로 경계를 삼았다. 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하게 되어서는 장군 蒙恬으로 하여금 長城을 쌓게 하였는데, 遼東에 이르러 이곳을 요동의 바깥 변경으로 삼으니, 조선 왕 否가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복종하였다. 비가 죽고 태자 準이 즉위하였다. 秦나라가 멸망하자 연나라와 趙나라의 백성이 조선으로 많이 망명해 들어왔다.
* 육국시(六國時): 중국 주나라 말엽에 천자의 권위가 약해지자 제후들이 왕이라 참칭하고 천하의 패권을 다투던 시기로, 육국은 열국(列國) 7웅(雄) 중에 진(秦)나라를 제외한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를 말한다.
* 진번조선(眞番朝鮮): 진번에 대해서는, 《국역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역대전고 한사군 이부(漢四郡二府)〉에 “진번이란 이름은 이미 위만 이전에 있었다.”라고 하면서 《사기》 권115 〈조선열전〉의 “연나라 때에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귀속시켰다.”라고 한 구절을 인용하여 한 나라의 이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사기》의 주를 지은 서광(徐廣)은 “진번은 진막(眞莫)이라고도 한다.” 하였고,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두 나라의 이름이다.” 하였다.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를 보면, 서광과 《사기색은》의 말을 근거로 단군조선 이후 삼한으로 분립되어 성립된 전삼한(前三韓)의 존재를 주장하여 말하기를 “그러면 진막도 두 나라이니 진과 번과 막이 곧 삼조선이다. 중국인이 타국의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종자순(文從字順)을 구하여 장단을 임의로 하는 폐가 있으므로 ‘진번막조선’이라 쓰지 않고 혹 ‘막’ 자를 삭제하여 진번조선이라 하고, 혹 ‘번’ 자를 삭제하여 진막조선이라 함이니, 이것이 이른바 진, 번, 막 삼조선이니, 진, 번, 막은 곧 진(辰), 변(弁), 마(馬)이다.” 하였다. 이 논문에 따르면 진번조선은 막조선이 생략된 진조선과 번조선으로, 곧 전삼한인 삼조선을 말한다고 하겠다.
* 만번한(滿潘汗): 《국역 성호사설》 제2권 〈천지문(天地門) 조선지방(朝鮮地方)〉에 “만번한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으나 연 나라의 동쪽에는 이렇게 큰 땅이 없다. 지금 의주(義州)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가 1400리에 불과하니, 생각건대 만(滿)은 지금의 만주(滿州)로 청(淸)의 왕업이 시작된 곳이고, 번(潘)은 심(瀋)의 잘못인 듯하다. 곧 우리나라의 강계(江界) 이북과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서쪽이 모두 연(燕)의 통치하에 들어간 것이다.” 하였다.
漢興에 盧綰이 王燕하여 與朝鮮으로 約以浿水爲界하고 復守遼東故塞라 及綰入匈奴에 燕人衛滿亡命한데 魋結蠻夷服이라 聚衆千餘하여 東渡浿水하여 求居西界하고 請爲藩蔽라 王準이 拜爲博士하고 封百里地하여 令守西鄙라
漢나라가 흥기하자 盧綰이 연왕이 되어 조선과 더불어 浿水로 경계를 삼기로 약속하고 다시 요동의 예전 변방을 지켰다. 급기야 노관이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衛滿이 망명해 왔는데, 머리는 상투를 틀었고 복장은 蠻夷의 복장이었다. 10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와 서쪽 변경에서 살기를 구하고 변방을 막아 지키는 신하가 되기를 청하였다. 왕 準이 博士에 제수하고 100리의 땅에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 관입흉노(綰入匈奴): 노관(盧綰)은 한 고조(漢高祖)와 한 동네에서 한날 태어나 아주 가깝게 지낸 사람이다. 한 고조를 따라 천하를 통일하고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후에 유씨(劉氏)가 아닌 제후들이 차례로 제거되자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여 동호로왕(東胡盧王)이 되었다. 《史記 卷93 盧綰列傳》
* 추결(魋結): 상투. 예전에, 장가든 남자(男子)가 머리털을 끌어 올려 정수리(頂--) 위에 틀어 감아 맨 것.
滿ㅣ 招納亡人하여 其衆益盛하니 迺詒準曰 漢兵大至하니 請入衛라하고 仍襲王準이라 王準이 戰敗南奔하니 滿遂據朝鮮이라 自箕子로 傳國ㅣ 四十一世로 凡九百二十八年이라 王準이 失國하고 涉海至金馬하여 自稱馬韓王이라하고 統小國五十하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불러들여 그 무리가 더욱 융성해지자 준을 속여 말하기를, “한나라 군사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宿衛하기를 청한다.”하고, 그대로 왕 준을 습격하였다. 왕 준이 전쟁에서 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니, 위만이 마침내 조선을 차지하였다. 기자로부터 나라를 전승한 것이 41세로 모두 928년이다. 왕 준이 나라를 잃고 바다를 건너 金馬에 이르러 자칭 馬韓王이라고 하고 50개의 소국을 통치하였다.
後世에 百濟王溫祚ㅣ 二十六年에 幷馬韓之地하니 箕氏ㅣ 絶不祀라 自王準ㅣ 據馬韓으로 又二百年而亡하니 前後凡一千一百二十年이라 箕子氏子孫이 分散하여 爲奇氏․韓氏․鮮于氏라 今平壤兔山에 有箕子塚이라 國人이 立崇仁殿하여 血食不絶也라
후세에 백제 왕 온조가 26년에 마한 땅을 병합하자, 箕氏의 대가 끊겨 奉祀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왕 준이 마한을 차지하여 또 200년이 지나 망하였으니, 전후로 모두 1120년이다. 기자의 자손이 분산되어 奇氏, 韓氏, 鮮于氏가 되었다. 지금 평양 兔山에 기자의 무덤이 있다. 國人이 崇仁殿을 세워 제사를 끊이지 않고 지낸다.
當殷之亡하여 微子는 去之하고 箕子는 佯狂爲奴하고 比干은 諫而死라 孔子曰 殷有三仁焉이라하니라
은나라가 망할 당시에 미자는 떠났고, 기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종이 되었으며, 비간은 간쟁하다가 죽음을 당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은나라에 仁者 세 분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東國이 被箕子之化하여 門不夜扄하며 婦人은 貞信不淫이라 治敎長久하여 國祚不絶千有餘年하니 此三代之所未有也라
東國이 기자의 교화를 입어 밤에도 문을 잠그지 않았으며, 부인은 정숙하고 신의가 있어 음란하지 않았다. 다스림과 교화가 장구하여 나라의 운명이 1000여 년을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니, 이것은 三代에도 없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