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을사조약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실력양성을 위한 각종 계몽활동이 후에 친일 활동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침략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였지만 대중에게 민족의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는데 일제는 1907년 이후 보안법, 신문법, 사립학교령 등으로 탄압
2. 애국계몽운동의 성격
가. 주도층
서울과 지방의 지식인, 관료, 개혁적 유학자
나. 문제의식
국권 미약의 원인을 민족의 실력 부족에서 차 대중 계몽을 통한 실력 양성(문화운동,교육 사업, 산업 진흥)으로 국권을 회보 한다고 생각했다.
다. 사상 : 사회진화론
⑴ 특징 : 양계초의 진화론적 사상체계 수용(적자생존, 약육강식의 논리)으로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인정
⑵ 한계 : 강자의 논리 대변하여 제국주의 논리 순응
라. 문화계몽운동
계몽운동가들: 통감정치는 문명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한다고 인식, 의병은 나라를 망치는 폭도
3. 애국계몽운동의 전개
가. 계몽
국민을 상대로 무지를 깨우치는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나. 교육
⑴ 학회의 조직
학회 | 대표 | 학회 | 대표 |
서북학회 | 李甲 | 기호흥학회 | 李光種 |
영남학회 | 張志淵 | 호남학회 | 李채 |
관동학회 | 南宮檍 | 흥사단 | 兪吉濬 |
대동학회 | 金允植 | 여자교육회 | 秦學新 |
⑵ 사립학교의 설립
연대 | 학교명 | 설립자 | 지명 |
1883(고종20년) | 원산학사 | 鄭顯奭 | 원산 |
1886(고종23년) | 배재학당 | 미북감리회 | 서울 |
1886(고종23년) | 이화여학교 | 미북감리회 | 서울 |
1886(고종23년) | 경신학교 | 미북장로회 | 서울 |
1890(고종27년) | 정신여학교 | 미북장로회 | 서울 |
1897(고종34년) | 숭실학교 | 미북장로회 | 평양 |
1898(광무2년) | 배화여학교 | 미남감리회 | 서울 |
1903(광무7년) | 숭의여학교 | 미북장로회 | 평양 |
1904(광무8년) | 호수돈여숙 | 미남감리회 | 개성 |
1904(광무8년) | 청년학원 | 全德基 | 서울 |
1905(광무9년) | 보성학교 | 李容翊 | 서울 |
1905(광무9년) | 양정의숙 | 嚴株益 | 서울 |
1905(광무9년) | 휘문의숙 | 閔泳徽 | 서울 |
1906(광무10년) | 신성・보성여학교 | 미북장로회 | 선천 |
1906(광무10년) | 진명여학교 | 嚴貴妃 | 서울 |
1906(광무10년) | 숙명여학교 | 嚴貴妃 | 서울 |
1906(광무10년) | 보인학교 | 보인학회 | 서울 |
1906(광무10년) | 양규의숙 | 秦學新 | 서울 |
1906(광무10년) | 중동학교 | 申圭植 | 서울 |
1906(광무10년) | 서전서숙 | 李相卨 | 간도 |
1907(광무11년) | 신흥・기전여학교 | 미남장로회 | 전주 |
1907(광무11년) | 대성학교 | 安昌浩 | 평양 |
1907(광무11년) | 오산학교 | 李承薰 | 정주 |
1907(광무11년) | 오성학교 | 서북학회 | 서울 |
1907(광무11년) | 봉명학교 | 李鳳來 | 서울 |
1908(융희2년) | 기호학교 | 기회흥학회 | 서울 |
1908(융희2년) | 동덕여자의숙 | 李在克 | 서울 |
1908(융희2년) | 대동전수학교 | 대동학회 | 서울 |
1909(융희3년) | 소의학교 | 張志暎 | 서울 |
⑶ 야학과 강습소의 설치
서북학회: 농림강습소(농업기술 교육)
나. 산업(식산흥업운동)
⑴ 각종 회사 공장의 설립 추진
⑵ 일본의 황무지 개척 요구 거부 : 보안회, 농광회사
⑶ 국채보상운동 : 국채보상기성회(광무11년 1907년)
① 발기 : 대구의 徐相敦・金光濟
② 배경
일본은 근대화 명분으로 차관을 도입하라고 하여 1907년 차관 1300만원이었는데 재정수입으로는 갚을 수 없었다.
③ 과정
대구 광문사에서 서상돈, 김광제 등이 주도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어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대되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도 호응하고 담배끊고 절약하고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 호응한 결과 3개월만에 1만원이 모였다.
④ 전국 확산
⑤ 대한매일신보(양기탁), 제국신문, 황성신문, 만세보 등 언론기관 의연금 모금
⑥ 실패
위기 의식을 느낀 일본은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나중에 무조 방면) 방해공작을 하고 주도층의 분열로 실패로 끝났다.
⑦ 한계 : 민중의 자발적 참여, 지주 및 부호의 미온적 태도와 통감부의 탄압(양기탁의 보상금 횡령 누명)
다. 언론
신문 | 문체 | 대상 | 발간목적 및 특징 |
漢城旬報(고종 20년 1883~1884년 갑신정변) | 순한문 | 정부관료 | 김옥균등 개화당의 노력으로 박문국에서 10일에 한번씩 발행한 최초의 근대적 신문. 개화정책의 취지 설명 및 국내외정세 소개 |
漢城週報(고종 23년 1886~1888년) | 국한문혼용 | 정부관료 | 한성순보 계승한 주간. 최초의 상업광고 게재 |
獨立新聞(The Indedepdence, 건양원년 1896~1899) | 영문판, 국문판 | 도시빈민층 | 徐載弼(Philip Jaisohn)이 발행한 최초의 민간신문. 민족의 독립수호와 민권신장을 위해 투쟁(주3회→일간) |
皇城新聞(광무2년 1898~1909) | 국한문혼용 | 중류계층 이상 지식층・유생 | 南宮檍이 舊本新斬의 원칙에 따라 온건적・점진적 개혁제시. 을사조약체결시 5건조약체결전말보도와 장지연의 是日也放聲大哭 게재 |
帝國新聞(광무2년 1898~1910) | 순한글 | 서민・부녀자 | 李鍾一이 발행하여 민중계몽・자주독립의식고취 |
大韓每日申報(The Korean Daily News, 광무8년 1904~1910) | 국문판, 영문판 | 다양한 계층으로 최대독자 보유 | 梁起鐸과 영국인 Bethelldl 발행하여 한글보급에 기여.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 반대운동. 국채보상운동 주도. 총독부에 매수되어 매일신보 |
萬歲報(광무10년 1906~1907) | 국한문혼용 | 천도교산자 | 孫秉熙발의로 吳世昌(사장)・李人稙(총무 겸 주필), 신광희・권동진・장효근(편집 겸 발행인)이 발행한 천도교 기관지 |
京鄕新聞(광무10년 1906~1910) | | 천주교신자 | 드망즈(한국인 안세화)가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에 반발하여 일어난 애국계몽운동에 동참함과 주독자인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에게 올바른 교리와 시사 문제에 대해 알리기 위해 발행한 주간 천주교 기관지 |
大韓民報(융희3년 1909~1910) | | | 오세창, 장효근이 민족의 사상통일과 단결, 민족의 지도・계발・지식보급을 목적으로 발행한 대한협회 기관지 |
國民新報(광무10년 1906~1910) | | | 일진회기관지 |
新韓民報(1909년 2월 10일~현재) | 1~3면 순국문판, 4면 영문판 | | 미국에서 샌프란시스코의 교민단체인 대한국민회 단체에서 발행하는 신문. 매주 수요일에 발행했으며 3・1`운동 때는 격일간으로 발행했다. |
海朝新聞(1908년 2월 26~5월 26일 (제71호)) | 순한글 | |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발행한 신문으로 재정난으로 3개월 만에 폐간되었으나 국외에서 우리말로 발행된 최초의 신문. 사장 최봉준, 편집인 왕창동. 논설 위주로 국내외 소식과 한인들의 동향 게재 |
4. 단체
보안회(1904.7) | 송수만, 심상진. 일본 나카모리(長本藤志郞)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를 하여 관철. 협동회,공진회, 진명회로 발전 |
헌정연구회1905.5) | 윤효정, 이준, 심의성, 양한묵. 입헌의회제도 실시 주장 |
대한자강회(1906.4~107.8.21) | 윤치호,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최재학. 정운복, 대한자강회보 발간. 고종퇴위 반대운동 |
대한협회(1907.11) | 남궁억, 김가진, 오세창, 윤효정, 장지연, 권동진, 정운복. 항일파와 친일파가 섞인 계몽단체 |
신민회(1907.2~1911.9) |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이승훈 비밀결사로서 실력양성운동과 독립전쟁론을 병행 평양 자기회사, 대구 태극서관, 평양 대성학교(안창호), 정주 오산학교(이승훈), 대한매일신보 기관지. 청년학우회(인격수양), 계몽운동과 해외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 안악사건 및 1910년 12월 105인 사건으로 해체 |
⑴ 보안회(광무8년 1904)
송수만등이 일제의 30% 항무지 개간 요구에 반대, 대중계몽운동의 선구로서 협동회(協同會, 회장 李相卨)로 발전했으나 해산됨
⑵ 헌정연구회(광무 9년 1905): 공진회가 발전한 것으로 독립협회출신 이준, 양한묵, 윤호정이 주도했고 민족의 정치의식고취와 입헌정치체제 수립을 지향하고 일진회 및 을사조약 반대운동으로 해산하고 이후 일제는 문화운동만을 허용
⑶ 대한자강회(광무 10년 1906)
일본인 고문 오가키에게 지침을 받아 교육활동과 산업활동, 1907년 고종퇴위반대운동전개와 일진회 성토와 정미7조약 반대로 통감부의 보안법으로 해산
⑷ 대한협회(1907)
대한자강회가 대한협회로 계승하여 교육개발과 산업개발로 실력 추구(친일적 색채가 농후)
⑸ 신민회
① 결성: 1907년 2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단체로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이동휘, 이박, 이승훈, 윤치호 등 평안도의 개신교인사들을 중심으로 활동(회장 윤치호, 부회장 안창호)
② 4대강령
ⓐ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고취
ⓑ 동지를 발견・단합하고 국민운동의 역량 축적
ⓒ 각종의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 증진
ⓓ 청소년 교육 진흥
③ 활동
ⓐ 실력양성
교육: 대성학교(평양), 오산학교(정주) 민족운동의 간부 양성
산업 : 평양자기(磁器)회사, 방직공장, 연초공장 등 신민회 재원 확보
문화 : 태극서관을 통한 출판물 보급 및 사업연락 담당, 조선광문회를 통한 고전연구와 간행. 가정잡지(여성계몽을 위한 잡지)
ⓑ 국외 : 독입운동기지 건설(심원보의 신흥무관학교)
④ 성격변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으로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을 거부하고 독립전쟁론 채택
⑤ 해체: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이 황해도 안악지방에서 서간도에 세우려고 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몰아 관련인사 160여 명과 함께 검거된 다음해인 1911년 600명 검거 105인 기소한 105인 사건(安岳事件)으로 해체
안악사건 : 1910년 안명근(안중근 사촌동생)이 독립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쓴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