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qBLzA8ryiBI?si=tFROpIWzEB0khNgp
노마드의 정신! 누가복음 2장 41-52절
2024년 마지막 송년예배를 드립니다. 올 한 해 시작하면서 많은 불안한 요소들이 있었지만 우리 모두 새로운 시도에 용기를 내었고 불안과 두려움을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책임지고 몸의 실천을 통해 그 불안적 요소들을 없애가는 방식으로 도전하면서 낯선 길들을 열어가는 몸의 경험과 삶의 지혜를 얻어내는 귀한 시간들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동녘이라는 공동체가 무엇이든지 실험해 볼 수 있고 무엇이든지 도전해 볼 수 있는 공동체라는 사실은 여러분들에게는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큰 자부심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어려워합니다. 지금까지 입었던 옷이 편하고 먹던 음식들이 편하고 다니던 공동체가 편하고 그래서 익숙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발전이 없고 소통이 안되고 새로운 도전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빨리 노화하고 더 빨리 쇠퇴하고 더 빨리 고착화되고 더 고집스럽게 변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도전해 볼 수 있고 실험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만큼의 유연성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들입니다.
최근의 집회의 흐름을 보면서 2030세대는 4050세대의 노래를 배워보려고 하고 반대로 4050세대는 2030세대의 응원봉 문화를 배워보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우리 사회의 희망을 봅니다. 서로의 것들만을 고집하면서 유연성과 개방성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의 문화 안에 갇혀버릴 것입니다. 또는 그래 너는 너, 나는 나 상호 존중하는 일종의 똘레랑스, 관용의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도 그 자체로도 훌륭한 것이지만 더 큰 배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4050대가 소녀시대의 다만세를 배우고 2030대가 농민가를 배웁니다. 2030대안에 오랫동안 자리잡힌 문화중의 하나는 아이돌 펜클럽문화, 밤새 기다려 앨범을 사고 기본 공연에 가면 4-5시간 응원봉을 흔들며 공연을 보고 현장에서 다양한 굿즈를 무료나눔하고, 그리고 40-50대는 이미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축척된 힘이 있잖아요. 게다가 자본력이 있는 거죠. 이것이 만나면서 전에 없던 선결재 문화, 대형버스차들을 보내 언 몸을 녹이고, 대형유모차들이 등장해서 수유하시는 부모님들을 위한 연대를 하고 그 짧은 시간에 온갖 먹거리와 보온용품이 나누어지는 특이한 시위 문화를 낳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서로의 문화 안에서 자라온 약자에 대한 감수성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뿌리 깊은 염원이 20-30대의 문화와 40-50대의 정신적 자산 + 자본력과 만나면서 사회변혁을 위한 에너지로 극대화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열린 마음으로 배워가는 문화 융합은 우리를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에 보면 12살의 예수님은 성년식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투어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척이나 성전에 머물기를 좋아하셨어요? 부모 일행이 유월절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예수가 무리에 없는 걸 깨달은 겁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가보니 예수님이 랍비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논쟁하고 있더라는 거죠. 사나흘 동안 예루살렘 성전 곳곳에서 무엇을 하셨겠어요.
저희 어렸을때만 해도 교회는 문명을 접하는 곳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저희 집이 바로 교회 옆집이라(담을 같이 쓰고 있었음) 학생부들의 아지트였습니다. 제 친구들만 있었던 게 아니라 동생 친구들, 형 친구들까지 온갖 또래집단이 허구 헌날 저희 집에 모여 놀았습니다. 윙크게임, 전기게임, 발바닥 게임 등을 하면서 밤새 놀았던 기억이 많습니다. 그 당시는 교회가 사회 문화의 선주주자였고 문학의 밤이나 탁구교실, 기타교실, 야구, 축구 등 놀거리, 먹을거리, 문화적인 요소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에 늘 교회는 사람으로 바글거렸고 교회에 사람이 바글 거릴수록 저희 집도 역시 사람들이 바글거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 참 고생하셨어요.
우리는 그렇게 놀면서 탁구도 배우고, 기타도 배우고, 악보 읽는 것도 배우고, 중창도 배우고, 연애도 배우고, 연애편지 쓰는 것도 배우고, 기도도 배우고, 신앙도 배우고, 관계도 배우고, 배려하는 법도 배우고, 기다리는 법도 배우고, 같이 노는 법도 배우고 그렇게 돈 하나도 들이지 않고 인생에서 평생 써먹는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학이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이었지만 제가 생각했을 때는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 공동체는 모든 것을 배우는 대학이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예루살렘 성전이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당시의 성전은 헤롯성전으로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약간 헤롯 테마파크처럼 지은 성전입니다. 헤롯은 성전을 지으며 원래 있는 성전(지성소와 성소가 있는)과 이스라엘의 뜰(유대인의 뜰), 여인들의 뜰, 그리고 이방인의 뜰을 만들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엄밀히 말하면 예루살렘 성전 밖에 있습니다. 여기는 일종의 관광구역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집을 장사치들을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한 구역이 여기에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성전 제사에 드릴 짐승만 파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순례를 하기 위해 전세계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왔다가면서 몸만 왔다가겠습니까? 전세계의 온갖 무역품들, 먹거리, 볼거리들이 여기에 모이겠지요. 온갖 노점상인과 편의 시설이 있던 곳이 여기였습니다. 디아스포라들이 다시 모여 온갖 세계의 문화적 요소들이 다 교차하는 곳이 여기였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자란 곳은 나사렛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약 6.5Km 떨어져있는 곳에 세포리스라는 갈릴리의 주도가 있었습니다. 거기는 동쪽 지중해에서 들어오는 다양한 무역품, 문화, 그리고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이 만나는 중간지대였고 그것들을 남쪽 사마리아, 유대와 연결시키는 교차지역이었습니다. 마치 동해의 강릉같은 곳인 거죠(선교장 최부자집) 다양한 문물과 문명, 생각이 만나는 지역은 변화에 빠르고 새로운 문화 융합이 많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어린시절 세포리스 시민들이 로마에 항전하면서 2000명이 십자가가 처형당하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이 세포리스라는 지역이 어떤 지역인지 상상이 가시지요? 다양한 문명이 교차하면서 새로운 생각과 사고에 열려있어서 늘 저항성과 창조성을 안고 살아가는 그런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곳에서 자란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다양한 문화들을 접하면서 얼마나 신났을 것입니까?
노마드 정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목문화에서 나온 말입니다. 철학적인 용어를 빌려쓰지 않아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형. 또는 여러 학문과 지식의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앎을 모색하는 인간형을 이르는 말입니다. 홍세화씨가 우리 사회에 던져주셨던 똘레랑스라는 관용과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서로 다른 두 문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관용입니다. 충돌이 없습니다. 그래서 변화도 없습니다. 그런데 노마드는 유목문화입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납니다. 자기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상대의 아이덴티티도 분명합니다. 이 두문화가 만나서 충돌하면서 서로 배우면서 질적으로 또다른 서로를 성숙시켜나가는 겁니다. 예를 들면 A문화와 B문화가 만나 Ab, Ba와 같은 더 성숙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유연성을 가지고 자신을 창조해나가면서 날마다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어린시절 갈릴리에서나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정신없이 몰입했던 것들도 어쩌면 이런 자기 창조를 위한 만남과 배움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 저서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정신들―인습적 범주들, 정체성들, 걱정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눈멀게 되는 유한성, 정신들―너머에 있는 성령 안에 우리의 중심을 두고, 놀라움에 민감하고, 바라보는 것에 민감하고, 자비에 민감한 정신들과 마음들에게로 가라고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정신들―이데올로기들과 개인주의적인 염려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정신들―너머 구조적 불의에 의해 야기된 고통을 보고 듣는 정신들과 마음들에게로, 정의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에 민감한 정신들에게로 가라고 초대받았습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작은 나에서 더 큰 나, 개인적 자아, 사회적 자아, 생태적 자아, 그리고 더 나아가 우주적 자아를 가지고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나이가 점점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기능들이 점점 더 축소되고 약해지고 좁아져서 육체적으로 더 자기안에 갇혀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자아의 현실 속에서도 열린 노마드의 정신을 가지고 날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한해동안 일신우일신 이렇게 달려온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리고 축복하고, 다가오는 새해에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