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 요한복음 1장 1-5절
을사년 새해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사랑이 개인의 삶과 가정과 일터에 삶의 모든 곳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온 세상에 생명과 평화의 빛이 충만하길 기도합니다. 기독교는 다양한 갈래의 흐름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초기 기독교 안에도 바울의 기독교, 요한의 기독교, 마가의 기독교, 마태의 기독교가 신학이 조금씩 다르고 로마의 기독교가 되면서 카톨릭으로 존재하다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면서 서방 카톨릭과 동방정교회로 나뉩니다. 우리나라는 서방 카톨릭이 먼저 선교가 되고 이후 종교개혁에 의해 형성된 프로테스탄티즘 개신교가 선교를 이루게 되면서 감리교 장로교 루터교 성결교 침례교 등이 들어왔고 우리는 그 개신교의 한 흐름안에 존재합니다.
동방 정교회의 경우도 카톨릭처럼 2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마포에 가면 한국의 동방정교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곳에 다녀왔는데 대낮인데 예배당이 무척이나 어둠침침해요. 정교회 신부님이 그 이유를 설명을 하시는데 동방정교회는 초기 교회가 카타콤 로마의 지하묘지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그것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십자가 형태의 사각 기둥과 둥근 원형으로 성당을 짓고 그 안은 마치 지하 동물 묘처럼 어둡게 만들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창문들 사이로 빛이 들어오긴 하지만 대낮인데도 예배당 안이 어둡습니다. 그래서 정교회 사람들은 예배당에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초를 들고 불을 켠다고 합니다. 크리스챤은 빛의 사도라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지하 동물처럼 어둡고 캄캄하고 죽음과 어둠이 지배하는 이 세상 한가운데서 언제 어디서나 빛을 밝히고 빛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신앙인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시대의 크리스챤! 오히려 세상 속에서 폭력과 혐오를 부추기고 막말과 전쟁을 일삼는 이 시대! 예수의 제자들로써 삶의 곳곳에서 작은 빛들을 밝히면서 정의를 세우고 따스한 온기로 세상을 안아가는 동녘의 신앙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올해는 중동의 전쟁도 그치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도 멈추고 남북한의 긴장도 완화되고 대한민국 안에서 판치는 거짓과 어둠의 세력들도 다 물러가고 민의가 세워지고 주권이 회복되고 상식과 원칙위에 나라가 세워지는 한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을 보면 요한은 예수를 일컬어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빛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를 생명으로 이끄는 빛이라 고백하게 했을까요?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무척이나 영적인 복음서입니다. 그리고 그 영성의 핵심을 사랑이라 고백하고 있는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제가 지난 번에 제자들의 발을 씻는 예수님 이야기를 했었죠. 오늘은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베다니의 3남매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인데 요한복음의 이야기의 가장 중심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이야기들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그냥 포도주가 떨어졌다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가나의 혼인잔치는 예수의 종교 운동이 유대사회에 있어서 마치 물처럼 맛도 없고 맹맹한 유대종교를 잔치집의 포도주처럼 맛깔난 종교운동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떻게 하는 게 다시 태어나는 거냐 모태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거냐 이런 일차원적 생각을 할 때 예수께서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도 예수와 니고데모의 단순한 두 사람의 대화가 아니라 성령 즉 예수의 정신, 예수의 혼, 예수의 사랑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거듭남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돕는 자>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가 나사로를 살렸다는 의미는 나사로라는 한 사람을 살렸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요한복음과 같은 영적인 책에서는 그 의미가 매우 상징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당시의 하나님의 이미지는 매우 편협하고 좀 잔인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 사랑하셔요. 이방인들은 사람취급도 안합니다. 아픈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은 사람이예요. 하나님은 벌주시는 하나님이예요.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공동체 밖으로 내치고 심판하시고.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못했어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화내시고 성전에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심판하시고 오로지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을 공고히 하는 민중의 어려움이나 고통은 뒷전이고 벌하시고 심판하시고 복수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셔요.
그런데 요한복음의 이 나사로 이야기는 예수라는 존재가 어떤 분이냐면 <돕는 하나님> 나사로를 보면서 눈물흘리시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시며 그를 살리는데 돕는, 그의 아픔과 고통을 돌보시며 살려가는 걸 돕는 그런 분입니다. 예수는 나사로를 살린게 아니라 그 시대의 하나님 <벌주시고, 복수하시고,
쪼존하고 편협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아픔과 고통과 그 한계>를 어루만지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을 살리신 거예요. 오랜 식민통치아래서 농사를 지으면 나라 세금에 성전세에 로마 황제에게 내는 세금까지 2중 3중으로 착취당하고, 로마인들에게 짓밟히는 것도 억울한데 마치 친일파처럼 로마의 마름들에게 더 악랄하게 착취당하고, 그래서 빼앗기고 그래서 병들고 앓아눕고 그러면 들여다봐주고 살펴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악시여기고 공동체 밖으로 격리시키고 그런 야만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 조차도 매정하게 잔인하게 편가르는데 그 아픔을 돌보시고 그 아픔에 귀 기울이면서 상처를 싸매주고 아픔에 경청하고 돌보시고 들어주고 살피시는 그 하나님을 살리신 거예요.
요한이 이야기하는 예수의 사랑은 바로 <돕는 사랑입니다> 나사로가 어떤 병에 걸려 영적으로 죽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트라우마에 의해 우울증이 걸려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돕는 하나님>는 나사로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발로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이셨고 돕는 사랑이었습니다.
여러분 그사람의 필요를 채우는게 돕는 게 아닙니다. 지난 주 대통령 경호처가 한일은 대통령을 돕는 게 아니에요. 그의 인생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겁니다. 참으로 돕는 사랑은 그 악령에 갇혀서 스스로 뭔짓을 하는지 모르는 자신을 뉘우쳐 알 수 있도록 그래서 진정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게 돕는 사랑입니다.
오늘 읽은 이 시를 박노해님이 요즘 지었다면 이렇게 지었을 겁니다. <새해에는 생명이 중심입니다> 집을 짓더라도 이제는 온갖 잡다한 산업쓰레기를 잔뜩 모아 발암물질이 많은 것들을 섞어서 아파트를 짓는 게 아니라 사람도 생각하고 자연도 생각하는 집짓기를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도록 하는게 진정 이 시대의 건축가를 돕는 거죠. 이제는 물건을 만들 때도 RE100을 생각하고 ESG경영(환경을 생각하고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고 민주적 경영)을 생각하도록 그런 기업의 물건을 소비하고 그런 기업만을 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시대의 기업을 돕는 길이죠.
개인의 사익과 권력욕에 미친 사람들을 그대로 두는 게 아니라 민의를 생각하고 정말 약자들을 배려할 수 있는 진정한 공직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고 국민들이 감시하고 그런 공직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나라도 돕고 지도자도 돕고 사회도 돕고 시대를 살리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생명의 빛> 서로의 부족함을 도와 스스로 온전한 존재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사랑, 그런 생명의 빛이 가득한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거창하게 온 세상을 구하려하지 말고요. 내옆에 있는 그 한사람부터 살리고 돕는.
일본의 나스마을이라고 있습니다. 일본 도쿄인근에 있는 마을로 폐교를 시로부터 위탁받아서 한쪽에는 자립형 고령자 주택을 짓고 또 다른 한쪽에는 몸이 불편한 요양시설을 짓고 그리고 마지막 한쪽에는 임종을 앞둔 분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공동체 마을입니다. 건강한 고령자들이 들어가 아프면 요양시설로 가고 삶의 마지막 단계에는 임종실로 가셔서 생을 마감하게 하는 공동체 마을을 만든 것입니다. 자립형 고령자 주택은 15년 동안의 월세 약 1억 5천만원정도를 내고 들어가고 요양시설의 경우는 약 월 120만원 정도 내고 요양을 할 수 있는 시설로 여성이 약 80%로 약 70%의 사람들이 독신이고 나머지가 부부 혹은 자녀가 장애인인 경우라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이 함께 살고 장애인과 다양한 세대들이 함께 사는 매우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이 나스마을을 시작하게 된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올해로 74세의 치카야마 케이코라는 여성이 있습니다. 위생학을 전공하고 병원 임상검사실에서 근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도 어머니가 있었고 어머니 38세에 이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30세 후반이니 어머니는 거의 70대 후반인 거죠. 그때 어머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시면서 혼자서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시설들을 다 알아보았는데 도저히 어머님을 모실 곳이 없더라는 거죠. 한국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일본 용양시설도 기저귀를 사용하고 거의 칸막이로 막혀있고 요양원은 암모니아 냄새로 꽉차있고 한꺼번에 기계 갈아끼우듯이 기저귀를 갈고 개인의 인권이나 생각 기호는 전혀 고려되지 않은 비인간적인 요양시설에 어머니를 맡길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머니가 존엄하게 살기를 바랬고 어머니이 간병으로 나 자신의 삶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인 노인주택을 만드는 일 “자유로운 생활 보장,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살 수 있고, 자신이 살던 곳에서 계속 살고 싶고, 마지막까지 살 수 있는 곳”을 염두해 두면서 이일에 뛰어 듭니다.
그래서 자신이 살고 있던 동네에 나온 폐교 임대하는 공공지원사업에 응모했고 열심히 투자금을 모으고 다양한 거주환경정비모델 사업에 응모하여 정부 보조금도 따내고 마지막에는 이 사람의 경력과 기획안을 높이 평가한 지역은행(도치기은행)으로부터 거의 50억여원을 대출받아 공생형 커뮤니티 나스 마을을 만들게 됩니다.
노년이 되어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어머님, 그 사랑하는 한 사람이 남은 시간을 보다 인간답게 살다가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게 해주고 싶은 유일한 소망속에서 시작된 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온 세상의 모든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지는 못하더라도 단지 내 옆에 있는 그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진실을 담고 진정성을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생명의 빛을 비추는 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한해동안 우리의 삶의 곳곳, 우리 사회의 곳곳, 그리고 이나라 곳곳에 서로의 자기다움을 온전히 밝혀주는 생명의 빛이 가득해 우리가 딛고 서있는 온 땅 온누리에 회복과 살림, 평화와 생명의 기운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