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생지몽(盧生之夢)**
뜻은 '인생과 영화(榮華)의 덧 없음을 이르는 말'.
중국 당나라, 가난한 농촌 출신의 젊은이, 노생이 허름한 차림으로 조나라 수도인 한단으로 가는 도중 길가 주막에 머물러 쉰다. 마침 같은 곳에 머문 `여'씨 성을 가진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신선도술을 터득한 도인이다. 노인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노생이 자신의 신세를 한숨 섞인 푸념을 한다.
“입신출세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데 지금의 신세는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취기에 노생의 푸념이 끝까지 말을 맺지 못하고 깜빡깜빡 졸음에 끄덕이자 여옹은 자루 속에서 베개를 꺼내 노생에게 주며 `주모가 메조밥을 짓고 있으니 다 익을때까지 한 잠 자기'를 권한다. [메조밥은 찰기도 없고 까칠해 목구멍을 넘기기도 힘들 만큼 거칠다.]잠든 노생은 베개에 뚫린 구멍 속으로 빠져 들어 간다.
다음날 아침 깨어 주막을 나서 길을 재촉하여 가던 중 한 마을로 들어간다. 거기서 마을 최고 부자의 딸과 결혼하고, 재산도 늘어나 집은 고래등 만해지고, 과거에도 급제하여 차차 지위가 상승하여 도성의 장관이 되고, 수년 후엔 오랑캐 침입을 물리치는 큰 공을 세워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다. 그 사이 자손도 번창하여 그들 또한 모두 풍족하게 산다. 그러나 그를 시기하던 반대파의 모함으로 역적을 몰려 귀향을 간다. 설상가상으로 병도 얻는다.
“아아, 고향에서 농사나 지었다면 이런 억울한 탄식을 안 할 텐데… 내 어찌 부귀영화를 탐냈던가. 남루한 옷과 거친 음식을 입고 먹을 때가 … 아아.”
칼을 꺼내어 자결하려 할 찰나 아내의 간곡한 만류로 자결은 미수로 끝나고, 노생은 곡절의 삶을 이어가다가 쓸쓸히 팔십 평생을 마치려는데,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몸을 흔들어 깨운다.
아하, 그 주막, 그 여씨 노인. 그리고 메조밥은 아직 익지 않고 여전히 끓고 있다. 조밥을 지을 만큼의 시간보다도 더 짧은 동안 팔십 년 인생을 꿈꾼 것이었다. 노생은 깜짝 놀라 “아니 이게 꿈이었던가” 소리쳤다. 노인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걸세.”
심기제(沈旣濟)가 쓴 중국 당대의 풍자소설 〈침중기(枕中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나라에서 당시 가장 번화했던 한단 지역과 관련이 있어 한단몽(邯鄲夢) 또는 한단지몽(邯鄲之夢)이 라고도 하고, 밥 짓는 동안이라 하여 일취지몽(一炊之夢)이라 칭 하기도 한다. 그 당시에 풍미했던 명예와 이익만을 좇는 실리주의를 빗대어 쓰는 말이다. 덧없는 인생을 짚고 `지족상락(知足常樂), 능인자안(能忍自安)'[만족할 줄 알면 늘 즐겁고 능히 참으면 스스로 편안하다] 을 새기게도 한다.
설령, 타고난 달란트가 풍성하고 뛰어나 부귀영화를 누릴 조건을 갖추었다 해도 거친 들판에 문득 피어난 꽃처럼 허름하게 시들어 마를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마치 겨울 낙엽처럼 춥고 쓸쓸히. 18세기 영국의 시인 토마스 그래이(Thomas Gray)의 시 어느 시골 교회 묘지에서 쓴 비가(悲歌)(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 한 대목이 생각난다.
`수많은 꽃들이 눈에 띄지 않게 피어 / 인적 없는 황야의 대기에 / 그 아름다움 헛되이'
만일 내가 토마스 그래이가 가리킨 수많은 꽃들 중의 하나라면 노생의 꿈은 나름대로 마음의 위로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 위로는 우리네 인생이 일순간 지나갈 낭비 같은 꿈이라는 점과 설혹 꿈속의 낭비 일지라도 아름다 웠다는 그 자체가 의미 있다는 데에 근거한다.
잠깐 동안에 귀중한 인생의 진리를 깨우친 노생은 꽤나 행운아다. 오랜 동안 험난한 굴곡을 겪고 나서야 얻을 수 있는 지혜를 한 순간의 꿈을 통해 접하게 되었으니. 만일 그가 비록 꿈속에서라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소설을 끝냈다면 나는 노생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안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신산(辛酸)한 삶이라도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인적없는 황야에도 피어야할 꽃은 피고 시들어야 한다. 노생은 꿈 속에서 팔십 세까지 살았으나, 꿈 밖에서 몇 살까지 살았는지 소설을 쓴 심기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짐작컨대, 되도록 무리없이 살았을 가능성이 많으니 남만큼 넉넉하게 늙었고 그 늙음을 천천히 받아들였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그렇다면, 부귀영달을 누리고 자살 시도도 치루고 눈에 띄지 않게 황야에서 팔순을 맞은 노생은 다음의 견해에 공감했을 것이다.
`휘거나 굽은데 없이 똑바로 곧은 경쟁으로 소진된 인생은 허무하다. 꼿꼿하게 세워 늙을 수 있을까. 23.5도 기울어 공전하는 지구마냥 약간 구푸려 비켜서 돌아야 제대로 사계절을 맞을 수 있는 법. 꼿꼿이 수직으로 서서 도는 세상은 아무래도 꿈속의 일이다.' 나이든 노생이 공감했을 거라는 필자의 헤아림이 얼추 맞다면,
“노년에는 스스로 싸우고, 권리를 지키며, 누구든 의지하려 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려 할 때만 존중받을 것이다.” (모셔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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