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댁 2011-07-15
이십층 아파트의 19층에 사는 나는 저녁시간에는 가끔 베란다에 나와서 노을을바라보거나
커피를 마시며 야경을 바라본다.
나는우리집을 퍼스트빌 스카이 라운지 라고 부른다.
베란다 한쪽에 분위기 있게 티 테이블을 놓고 싶지만
공간이 좁아서 포기를 하고 그냥 바닥에 앉아서 분양받은 다육이화분들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 한다.
이시간에는 좋아하는 올드 팝송을들으며 근사하고 멋진 친구와 데이트 하는것도 상상한다.
야생화가 가득한 카페에서 뒷맛 깔끔하고 담백한 원두커피 한잔을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는 상상도 하고 이 선률에 맞추어 가볍게 블루스도 한번 추는 상상도 한다.
지금 이시간은 온통 나만의 시간내 상상의 시간이다.
빌앹더슨의 green glass af home 노래의 가사처럼 어느 순간 깨어질허망한 꿈일지라도
그래도 상상을하면서 그속에 심취해본다.
아무리 사는것 힘든 인생길 나홀로 가고 있다 하더라도이런 짬짬이 즐기는 이 감동의 시간이
나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고 나는 다시 이 험한 세상 속으로씩씩하게 뛰어든다. . ,
내가 이 작은 아파트의 주인이 된것은 불과 사년전의 일이다.
등기부 등본 원본상의 내이름 석자 이경희를 보는순간 내살아온 삶의 질곡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84년 25살에 결혼한 저는 신혼생활의 재미도 모릍채 88년 두딸만 덩그러니
남겨준채 애들 아빠는 다른 여자의 품속으로 달아났고 딸들이 세살, 한살 이였을때 ,,,,,
첨엔 죽도록 현실이 미웠다. 젊은 나이에 난 한가정의 가장이 되었다.
살아있는것 보다 죽음이 더 쉬울것 같았다. 그러나 죽음은 내가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들어놓은 보험이였다.
그래 이렇게 힘들게 살다가 안되면 죽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이였고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역으로 살수가
있었던 세월이였다. 살다 살다 안되면 죽으면 되니까
죽기전까지 죽을 힘을 다해 살면 된다는생각으로 살았다.
이땅에서 가난한 싱글맘으로 산다는것은 그만큼 힘든일이다.
이혼녀라는 남들의 따가운 시선이나 울딸들이 몸으로 직접 느끼며 받아야 하는 경제적인 어려움과
철저히 혼자가되어 이세상 세파에 흔들리면서
거칠은 광야에 홀로 등불하나 없이 보이지 않는 암흑과도 같은 세월을
근 20년 동안 날카로운 칼날 하나를 가슴에 품고 그저 애들의 엄마로서만 정말 처절하게 살았다.
애들은 나의 유일한 친구였고 나삶의 이유이고 목적이고 버팀목이이였다.
사흘을 굶다가 라면 하나 슈퍼에서 외상하여 굶주린 배를 달래며 오기로 살았다.
나만 바라보고 해맑게 웃는 내딸들의 영롱한 눈망울과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현실만이 눈앞에 존재했다.
먹고 살아야만 했다 .10평 영세민 아파트에 어린 애들만 놔두고 집앞에서 노점 부터 시작했습니다.
잠깐 잠깐 들러 애들을 보살피고 ....
도너스도 튀기고 호떡에 오뎅, 떡볶기 심지어 부칭개까지 만들어 팔았다.
애들이 조금 커지면서 난 보신탕집 써빙 이나 동아일보 석간 돌리기,
애들 일일공부 시험지 돌리기 우유배달 , 갈비집 써빙 등 돈되는것은 모두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인천에서의 나의 생활은 조금도 돈을 모을수 없었다.
이혼후에도 애들 아빠가 나의 집주위에 살면서 나를 괴롭혔다.
애들 아빠는 거의 알콜중독자가 되어 술만 먹으면 택시를 타고와서
우리 세여자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곤 했다. 폭행에 폭언까지 ,,,
삼일 밤낮을 술에 취해 있다가 겨우 모아둔돈 이십만원이나 삼십만원을 손에 쥐어져야지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사는 삶이 아니였다.
내가 인천을 떠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긴것은 불과 몇초사이에 일어났다. .
공부하고 있는 애들 학교로 찾아가서 무조건 전학시킨다고 말하고 이곳 익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곳엔 나의 동생이 살고있기에 근처로 온것이다.
이곳에서 난 16년째 염색회사에 다니고 있다. 주야간 이교대하는 이 삼디업종에 종사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산업 역군이라 자부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
97년도에 저의 일당은 12900원이였다. 한달 주야간 교대로 일하고 주간일때 특근두번하고
80만원을 첫봉급으로 받았다.
그중 40만원을 무조건 천만원 짜리 적금을 들었고 자린고비 생활을하여
삼년뒤 천만원 적금을 타고 백만원 보증금에 10만원짜리 삭월세에서
17평짜리 보증금 700만원짜리 임대아파트로 옮겼다. 그날 애들은 좋아라 했다.
비좁은 10평짜리 아파트에선 씻을 공간도 없었다. 그런데 이사한곳은 고대광실 처럼 느꺼졌다.
그리고 오년뒤 난또 천만원 적금을 타고 22평짜리 아파트 전세 2500만원짜리 아파트로 옮기고 ....
그저 앞만 보면서 열심히 일한 나는
삼년뒤에 전세로 살던 이집을 500만원 더주고 은행대출까지 합하여
4500만원 주고 이집의 안주인이 된것이다.
그동안 난 만원짜리 청바지 에 언제나 티 하나로 해결했다. 미장원 값도 아까워 머리는 항상 질근 매고 다녔구요
로손이나 스킨 하나도 바르지 않고 살았다.
그런 억척스러움이 이 작은 아파트 하나를 내 소유로 만든것이다.
이젠 올해 애들 한 학기 등록금만 만들어주면 ( 지금은 졸업했다)
나도 이제는 친정엄마 사시는 미국 여행도 가고 면허도 따서 싸구려 중고차라도 몰고 다닐것이며
내가 좋아하는 사진기 하나 목에 걸고 조선 팔도 방방 곡곡 누리고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노을이 멋저요 산이 날 불러요" 하면서 여행도 다니고 싶다.
아직 한번도 제대로 여행 한번 해본적이 없다. (지금은 다녀요 )
요즘 그런 드라마도 머리속으로 그려보곤 한다. (꿈은 이루어졌다 )
지금은 좀 집값이 올랐다 .
그러나 팔집이 아니기에 집값에는 연연하지 않는다.
그사이 애들은 모두 건강하고 올바르게 자라주어 지금 둘다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졸업했어요 )
큰애는 대구에 있는 대학에 간호과 졸업반이고 작은애는 서울 단국대 영문과 졸업반 이고 ...
큰딸은 여상을 졸업하고 약국 조제실에서 이년동안 근무하다가
알바생으로 약국에 근무하던 친구가 간호 조무사 학원을 다니는 소리를
듣고는 자신도 학원에 등록하여 일년간 교육을 받고 조무사 자격증을 딴후에 고려 정형외과에
간호조무사로 일년간 근무한후에 대학을 들어갔다.
산업체 특별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한것이다. 참으로 많은 도움을 내게준 정말 살림밑천인 딸이다.
작은애 대학 등록금일 모자랄때 자신이 붓던 천만원 짜리 적금을 헐어서
내가 700만원 목돈을 쥐어주며 작은애 학비에 보태라고 내손에 쥐어준 딸이니까 ....
얼굴만 이쁜것이 아니고 맘도 이쁜 큰딸... .
편모슬하에 아빠사랑 한번 못받고 자란 애들이 정말 이쁘게 자라주었다.
큰애는 간호과 교수들이 간호과 표지모델하라고 할정도로 미인이고
작은애는 대학다니면서 알바로 학원강사하여 모은돈으로 미국과 캐나다 어학연수까지 갔다온 똑순이다.
난 우리 두딸이 자랑스럽다. 비록 나의 삶이 누군가의 아내로 살지는 못했지만
애들 엄마로서 산세월 한점 후회는 없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댓가로 내게 주어진 이 적은 공간을 난 축복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집이라는 곳은 그저 편히 쉴수 있고 더울때 더위 피할수 있고
추울때 따뜻한 공간이 되고 애들과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고 하루종일 일하는라 피곤한 몸을
욕조에 담그고 반신욕을 하고 다리 쭉펴고 쉴수 있다면 그리 큰집이 아니어도 된다.
우리 세식구 이 작은 아파트에서 너무도 행복하다.
더이상 행복을 바랄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행복하다.
큰딸 오늘도 문자왔다.
"엄마 가스불 점검하세요 뭐 올려놓은것 있는지 확인하시고요"
항상 뭐든 잘잊고 잠들곤 하는 나때문에 큰딸은 문자를 보내곤 한다.
비록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진것 없는 가장이지만 자랑스런운 우리 딸들과 매일매일이 너무도 행복하다.
늘 오늘이 마지막이드시 항상 열정적으로 하루를 보낸다.
난 오늘도 이 집에서 나의 하루를 마감한다.
전라도 촌아줌씨 올림
이년전 어느 라디오 프로에 응모한 일기입니다. 물론 지금은 울애들다 대학 졸업하고 전 토요일 쉴때마다
카메라 메고 여행을 다닙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항상 그런 맘으로 인생의 하루 하루를 색칠을 합니다.
첫댓글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 오신분께 응원을 보내 드립니다.
저도 익산(예전에는 '이리'라고 불렀어요)에서 몇년 살았어요.
1956~57년경 이리유치원(신광교회소속)에 다녔고
이리국민학교에 다니다 서울로 전학을 갔지요.
저(만73세)는 전주에서 태어 났어요.제친정부모님께서도요.
너무 훌륭하게 열심히 잘살아 오셨어요.
가까이 살고 계시면 제가 더 응원도 해드릴텐데요.
두자녀도 어머님의수고를 잘알고 있으니 결혼도 잘할거예요.
멀리서 부족하지만 생각나면 하동댁 가정위해 기도할게요.
꼭 소설같은 얘기라서
열심히 죽 잘읽었어요.
힘내셔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글도 잘 쓰시고, 참으로 열심히 사셨네요.
예전에 동아 담소실에서 이분의 감동적인 글들을 읽었는데,
요즘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하군요.
열심히 사는 엄마를 보며 두 따님들이 엄마에게 힘을 주고,
엄마를 기쁘게 해 주려고 공부도 열심히하고 잘 자란것 같으네요.
두따님들이 잘 키우고, 잘 자라 앞으로 좋은 날만 있을테니
좋아하시는 여행 다니시며 건강관리 잘 하시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