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9년의 프랑스대혁명에 대해서 지금같이 전세계적으로 실시간으로 사건이 전해질정도로 통신이 발달한 것이 아니기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이 조선등 아시아국가에 알려지려고 한다면 수년이 걸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이 사실이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알려졌다면 그에 대한 사회적 파장이 존재했을지가 의문입니다.
영화 "제국의 아침"에서 정조가 프랑스대혁명 사실을 알게된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 그랬는지는 모르겠스나 아마도 청나라에 체류한 서양상인이나 선교사들에 의해서 조선에도 프랑스대혁명사건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건이 전해졌다면 왕이나 사대부들입장에서 적지않은 파장이 일어날수도 있슬것입니다.
심지어 백성들까지.
뭐 그런 소식을 왕과 사대부들이 들었다고 해도 먼나라 예기니 별 실감도 없고 무관심하게 지나갈수도 있겠지만 세도가 양반에 시달리는 백성들 입장에서 그 소식은 상당히 고무적으로 느낄가능성도 있을것입니다.
추측컨데 홍경래의 난등의 민란은 프랑스대혁명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거기에 고무되어서 일어난 민란일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라고 봅니다.
엄연히 당시 조선사회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조선에서는 프랑스같이 그런식의 혁명이 나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왕이 실정을 해도 전왕을 단두대로 보내는 식의 과격행위는 도저히 상상도 할수 없습니다.
홍경래의 난의 내용을 보면 그 난에 가담한 자들의 목표가 프랑스대혁명에서 지향하는 것과 일정부분 유사한점이 적지 않다라는 것이 그 단서입니다.
난에 가담한자들중에서는 청나라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있었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그곳에서 체류한 서양인들로부터 나오는 프랑스대혁명사건소식들을 자연스레 접할가능성도 충분하고 거기다가 몰락한 양반층도 있스니 이들중에서는 실학사상을 습득했을 가능성이 농후할것이라고 봅니다.
첫댓글 프랑스 대혁명의 핵심은 국민들에 의해 주권의 담지자가 국왕에서 국민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즉, 무력을 통해 군주정체를 공화정체로 바꾸었다는 점이죠. 단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는 점만 생각한다면, 유럽에서 그 전부터 종종 나타났던 민란이나 동아시아의 민란들과 프랑스 대혁명이 다른 점이 없을 겁니다. / 홍경래란(관서농민전쟁)의 성격은 홍경래가 내건 격문에서 파악해 볼 수 있는데, 핵심은 1. 지역차별(서북지역차별. 이게 일제 초기까지도 한국의 가장 주요한 지역갈등으로 이어짐) 2. 세도정치에 대한 불만 3. 정씨를 참된 왕으로 세움 정도라 할 것입니다. 즉, 홍경래란은 공화정체를 목표로 한 것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맹자의 <역성혁명론> 에 가까운 성격을 띱니다. 즉,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과 같이 백성을 정치의 주체이자 지배자(주권자)이면서 동시에 피지배자로 인정하기보다는(동일성 원리. 치자=피치자), 백성을 피치자로만 보되 치자인 임금이 천명을 받지 못한 거짓 임금인 경우 혁명을 통해 참임금을 세울 수 있다는 주장에 부합하는 듯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참된 임금의 기준을 보다 백성친화적으로 제시했다는 점인데, 정씨 왕이라 함은 민간신앙적인 <정감록> 에 의거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조가 가장 두려워 하던 일들이 그사후에 나타나게 됩니다. 왕조타도의 기치를 내건 난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며 동학혁명의 경우에는 조선을 엎을만한 기세였으니깐요. 정조는 아마 왕조타도 후 혁명이 아닌 왕조유지 혁명을 원했던것이 아닐까요?
왕조유지 혁명이란 단어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왕조유지 혁명이란, 이씨 왕조가 다른 성씨 왕조로 바뀌는 맹자식의 혁명(공화정으로 바뀌지 않고 군주정이 유지된다는 점에서 '왕조유지' 임)을 지칭하시는 것인지? 만약 이씨 왕조의 존속을 말한다면 이는 맹자식으로든 서양식으로든 '혁명' 이 아닙니다.
정조는 왕조의 군주이니 왕조유지 혁명을 원했겠죠. 후대 군주인 고종이나 대원군의 개혁도 왕권강화, 왕조유지적 성격이 강한것 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