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뿌리를 찾아서 2008.7.29.화
이명박과 경주이씨
이명박(李明博)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청계(淸溪)이다.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동지상업고등학교 야간부를 거쳐, 1965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있을 때 6·3사태를 주도해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6개월 동안 복역한다. 이듬해 현대건설(주)에 입사해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인 35세에 최고경영자가 되면서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 뒤 1992년까지 현대건설·인천제철(주) 등 현대그룹의 8개 계열사 대표이사·회장을 지냈다.
14·15대 국회의원을 거쳐, 2002년 한나라당 후보로 민선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해 같은 해 7월 1일 취임한다. 2007년 12월 19일 치러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1,149만 2,389표(48.7%)를 얻어 617만 4,681표(26.1%)를 얻은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물리치고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다음해 2월 25일에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고향마을인 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 속칭 덕실마을은 경주이씨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는 이 대통령의 본관인 경주이씨가 26가구에 67명이 살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4촌 형수와 6촌 동생, 8촌 형 등 친척이 다수 살고 있는 곳이다.
이 대통령은 광복과 함께 이 마을에 들어와 살다가 1950년 6·25 전쟁 중에 포항 시내로 이사했다. 그는 아버지의 고향이기도 한 덕성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이곳을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 그는 명절 때 자주 찾아 고향에 대한 애틋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우리나라 이씨의 양대 산맥은 ▲전주이씨와 ▲경주이씨다. 전주이씨는 조선조 왕성이 되면서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현재 우리나라에서 성씨본관별로 3번째 인구가 많다. 그러나 전주이씨와 중국에서 귀화해 온 몇 개 본의 이씨를 제외하면 거의 경주이씨에서 갈라졌다. 이씨 본관 가운데 ▲합천 ▲가평 ▲평창 ▲원주 ▲아산 ▲재령 ▲우봉 등은 모두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의 후손에서 갈라진 것이다.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은 신라의 육촌장 중 한 사람이다. 이알평은 다른 촌장들과 함께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 공으로 유리왕이 여섯 촌장들에게 성을 하사할 때 이알평에게는 이씨의 성을 하사한다. 1세조는 신라 때 벼슬을 지낸 이거명이다. 시조 이래 대대로 경주에 살았기 때문에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경주이씨에서 가장 융성한 집안은 ▲상서공파“백사 이항복의 집”과 ▲익재공파의 “8별집”그리고 이완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다.
조선조에“백사집”에서만 영의정 4명,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온다. 8별집에서는 좌의정과 대제학이 각각 1명, 국당공파는 좌의정 1명을 내 조선조 경주이씨의 융성은 사실상 이 3파가 중심이다.
경주이씨는 고려 말 익재 이제현(1287-1367)을 배출하면서 삼한의 명족으로 위치를 굳힌다. 그는 대학자이자 외교가였으며 문장가였다. 익재는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긴다.
유명한 8별집은 이익재의 후손으로 그의 7대손 이공린의 일화가 흥미롭다. 이공린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사위다. 장가든 첫날 밤 그는 큰 자라가 나타나 “내 아들 8형제를 구해 달라”고 애원하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 신부에게 물으니 새 사위를 대접하려고 자라 여덟 마리를 사다 부엌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라 여덟 마리를 모두 풀어주었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죽고 말았다. 뒷날 이공린은 박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여덟을 두었다. 오, 구, 원, 타, 별, 벽, 경, 곤 자에 거북구(龜) 아니면 고기어(魚)를 넣어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모두가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혔다. 그런데 셋째 아들이 갑자사회에 연루돼 죽음으로써 첫날 밤 자라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 익재공파의 후손들은 자라를 지금도 먹지 않는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은 상서공파의 후예다.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국난을 수습했다. 그는 조선조“4대 명재상”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이항복은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관직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영조 때에 좌의정 이태좌, 소론 4대신의 한 사람인 이광좌,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일 등이 모두 백사의 후손이다.
국당공파에서는 병자호란 뒤 효종, 송시열과 함께 북벌을 계획했던 이완 대장이 가장 걸출하다.
조선조 경주이씨 가문에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인 이벽 이다. 정조 3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앵자봉의 천진암에서 정약용 3형제 등 10여명을 상대로 천주교를 강론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천주교의 시작이다.
근세의 인물인 헤이그 밀사사건의 이상설도 경주이씨 후손이다.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은 백사의 11세손으로 한말 총리대신 김홍집의 사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로 활약한 이인,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인 이갑성,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도 경주이씨가 낳은 인물이다.
2000년 현재 1,424,866명이다. 주요파는 ▲평리공파 ▲이암공파 ▲익재공파 ▲국당공파 ▲부정공파 ▲상서공파 ▲사인공파 ▲판전공파 ▲월성군파 ▲직장공파 ▲석탄공파 ▲진사공파 ▲교감공파 등이다.
( 정복규 논설위원 )
첫댓글 자세하게 기록을 해노셨군요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