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인터뷰>
고통에는 광채가 따른다
박 설 희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이야기”라고 고 박완서 소설가는 썼다. “이 나이까지 꾸준히 소설을 써온 건, 이야기가 지닌 살아낼 수 있는 힘과 위안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나는 왜 소설가인가」) 전쟁이라는 모진 체험, 벌레로 기었던 시간, 영혼의 성장이 멈춰버린 스무 살에 대해 기억을 불러내고 끝없이 변주하는 것.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내 기억의 창고」)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도 잘 아는 것 같은 고 박완서 소설가의 장녀인 수필가 호원숙 씨를 대학로 학림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박완서 원작 <대범한 밥상> 낭독공연을 관람하고 오는 길이었다.
어머니와 같은 문학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어머니가 등단은 1970년에 하셨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방안에 문학잡지나 문학 작품들이 늘 놓여 있었어요. 그래서 등단하셨을 때에는 ‘올 것이 왔구나’하는 순간적인 느낌이 있었지요. 어머니와 나만의 생활을 갖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조금씩 쓰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부터 원고 심부름 하느라 안 가본 출판사나 잡지사가 없을 정도로 줄곧 문학적인 환경 속에서 지냈지만 글이 잘 써지지는 않았어요. 잡지사에 근무해 글 쓰는 환경이었는데도 안되더라구요. 어머니가 글 쓰신다고 내 글이 쓰이는 게 아니었어요.
작품에 대해 어머니가 조언도 하셨는지?
-그런 거 없었어요. 어머니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것에 대해 저에게 미안해하셨지요. “나무가 크면 그늘도 크다”, 전 그 말이 싫어요. 그런 면도 있겠지만 고정관념을 거부하려고 노력했지요. 도리어 어머니 때문에 이만큼 제가 성장했어요. 그래서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라는 산문집을 썼어요.
어머니의 작품을 보며 참 독하신 분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문학에서 독했지 생활에선 독하지 않았어요.(웃음) 자유를 소중히 여겼고 스스로 자유로울 뿐 아니라 저희들도 자유로웠어요. 어머니는 자기 성찰로서의 글쓰기를 하셨고 글 쓰면서 자기 성찰을 하셨지요. 늘 읽고 쓰는 걸 열심히 하셨어요. 어머니만큼 작품을 많이 읽으신 분은 아마 없을 거에요. 돌아가시고 나서 원고를 찾아보니까 심사평이 많더라구요. 돌아가시기 일년 전까지 신인 심사 뿐 아니라 문학상 심사도 많이 하셨어요. 어머니가 거절 못 하셨어요. 막는 역할을 해야 했던 게 아닌가, 저는 후회를 했구요.
박완서 선생은 젊은 작가들을 좋아했고 조그만 것이라도 당신이 발견 못한 걸 젊은 작가들이 쓰는 걸 대견해하고 애정을 가졌지만 한편으론 작품이 점점 소통이 안 돼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싶을 때엔 고전, 외국작품 등을 많이 읽었고 까뮈, 도스토예프스키, 논어, 노자 등이 늘 가까이 있었다.
1970년대 초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도 참여를 하신 걸로 아는데요?
-그래서 이걸 가져왔죠. 1991년에 어머니 환갑 기념으로 나온 평론집이에요. 제 기억보다 이 분 인터뷰 기사(조선희, 「바스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가 당시 어머니의 모습을 매우 잘 그리고 있어요. 이 끝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얘기가 나와요. “그를 찾아간 며칠 뒤 민족문학작가회의 총회가 열려 그는 지난해에 이어 다시 부회장에 선출됐다. 그는 예상대로 총회에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어머니는 “나는 그때 직접 찾아가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이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주의적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회에 나가 단체를 이끌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단체가 생리가 맞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어머니는 그 시대에 작가로서 가장 용기 있는 일을 하셨어요. 스스로 참여할 땐 하시고 어떤 모임에 가입했다고 해서 그냥 이름을 넣어달라고 할 땐 서명 안하셨어요.
어머니는 어느 편에도 어느 입장에도 서지 않았어요. 어느 입장에서 글을 썼다면 생명이 오래 가지 않았을 텐데 작가적 입장에서 썼어요. 그래서 생명력 있었던 것 같아요. 평소 가족들에 게도 어느 편을 들지 않고 끝까지 균형 감각을 가지셨어요. 배울 점이 있다면 어느 편, 어느 줄에도 서지 않았고, 누구를 줄 세우지도 않으셨던 점이지요.
박완서 선생님은 육이오 때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불혹에 등단해서 평론가와 대중들이 함께 좋아하는 드문 작가가 되셨는데요?
-어머니는 대중적인 감각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어요. 많은 독서를 하셨고 독자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셨어요.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즐겨 볼 독자가 없으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셨지요. 마찬가지로 출판사가 책을 내주지 않으면 어떻게 독자를 만나겠어요. 문학이 상품이 되는 메커니즘에 밝으셨어요. 쓸 때는 치열했지만 신문연재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살아있는 날의 시작』,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은 문학적 격을 떨어뜨리지 않고도 대중성을 늘 의식하면서 쓰셨어요. 문학성과 대중성, 그래서 탄생한 장편소설이니까.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는 이산가족 찾기 이전에 쓴 것으로, 나중에 들어보니 실제로 전쟁 중에 이기심에서 헤어지고 찾지 않는 그런 일들이 많았다고 해요. 예지가 있으셨던 거지요.
후배작가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집필습관이나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시지요.
-어머니는 80년대 후반부터 워드 프로세서를 쓰셨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항상 앞서가셨지요. 손을 쉬지 않고 노동을 신성시했어요. 페인트공, 지붕수리공들에게 잘 해주시고 그들의 노동을 존중하고 친근감을 가지셨어요. 어머니 작품 전체를 꿰뚫는 정신은 자존감,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지요.
특별히 좋아하고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나요?
-저는 처음엔 어머니 작품을 읽고 감동을 못 받았어요. 어머니를 작가로서 좋아하고 존경하게 된 것은 아버지와 동생 사후 나온 작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미망』,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이에요. 그 전엔 불편했어요. 자전적인 소설 중에서 어머니 경험에서 우러난 구절이 나올 때 더 감동스러워요. 어머니는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풀 수 있는 작업을 했지요.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계층, 구조의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어요. 겉에 드러난 게 아니라 여성의 삶의 밑에 뭐가 있는지 깊이 생각하셨지요. 1980년에 쓴 작품이라면 비록 내용은 그 당시가 아닐 수 있지만 그 시점과 소재는 당대 현실과 다 연관이 돼 있어요.
그는 어머니의 작품이 무궁무진한 텍스트로서 앞으로의 세대들에게 계속 읽히고 사랑받기를 바란다고 했다.
생전에 좋은 일, 좋은 책과 그림을 어머니와 공유했기에 좋은 걸 봤을 때 어머니가 가장 그립다고. “내가 좋아하고 감동하면 어머니도 같이 감동하리란 걸 아니까요.” 그래서 선생은 “내 힘으로 이룩한 업적이나 소유는 저세상에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의 기억만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 죽음조차 두렵지 않아진다.” (「의연한 나목을 볼때마다」)라고 썼던가.
박완서 선생 2주기를 맞아 1월 25일에 구리시청에서 <대범한 밥상> 낭독공연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작년에 박완서 문학자료관을 새로 짓는 가치성 평가를 했고 2015년에 완공 예정으로 올해 설계에 들어간다고. 또 김윤식 선생이 작가와 평론가로서의 인연, 개인적 인연, 평론 등을 실어 『내가 읽은 박완서』를 펴낼 예정이다.
갓 법조인이 된 손자에게 “아무리 합법적이고, 경제적으로 이익이 돌아올 것 같은 일이라도 공동의 善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절대로 하지 말라”는 글을 남긴 고인이 사랑의 기억만으로 복된 평안을 누리기를 염원하면서 소중한 만남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