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66)
◇ 명필
퇴락한 양반가문 휘좌
훈장님도 감탄할만큼 서예 뛰어나
입춘방 받으려는 사람들 줄서
아버지 죽은후 붓 놓고 농사일
마당서 콩 터는데 웬 노인 찾아와…
경상도 문경 땅에 살고 있는 휘좌와 운봉이는 둘도 없는 서당 친구다. 집안은 딴판이다. 퇴락한 양반 가문인 휘좌네는 궁핍이 달라붙었지만 저잣거리에서 놋점을 하는 운봉이네는 살림살이가 풍성하다.
서당에서 글재주는 말할 것도 없이 휘좌가 출출문장(出出文章)인 반면 운봉이는 허구한 날 훈장님 매타작만 덮어썼다. 서당에서 까다로운 숙제라도 받은 날이면 운봉이는 휘좌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휘좌는 쌀밥에 고깃국 저녁을 얻어먹으며 운봉이 숙제를 도와주고 밤길을 걸어 집으로 가곤 했다.
어느 날, 숙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휘좌를 운봉이 어머니가 불러 세웠다. 그러곤 손에 든 보따리를 풀어 예쁜 가죽신을 꺼냈다. 휘좌 발에 꼭 맞았다. 이튿날, 휘좌는 운봉이 어머니에게 신발을 돌려주며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운봉이 어머니는 말없이 신발을 받았다. 휘좌 아버지 강 초시의 성품을 알고 있었다.
파락호인 강 초시는 쥐뿔도 없지만 자존심은 아직 짱짱해 친구한테 술 한잔 얻어마셨다 하면 생빚을 내서라도 그 친구에게 술 한잔을 사야 한다. 운봉이 아버지가 재작년에 놋그릇 한조를 보냈다가 무안만 당하고 돌려받은 적도 있다.
휘좌는 글도 잘했지만 서예가 더 빼어났다. 훈장님도 명필이라 감탄했다. 입춘이 가까워지면 휘좌네 집은 입춘방을 받으려는 동네 사람들이 줄을 서고, 휘좌는 팔이 빠져라 입춘대길(立春大吉)·건양다경(建陽多慶)을 써재꼈다. 강 초시도 서예에 재주가 있었지만 요새는 술에 전 손이 떨려 붓 잡을 엄두도 못 낸다.
십년이 후딱 흘렀다. 운봉이는 가업을 이어받아 재산을 일궜지만 휘좌는 강 초시가 죽은 후 붓을 놓고 산비탈 밭뙈기 몇마지기 농사에 매달렸다. 노모와 함께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그 수뿐이었다.
어느 날, 휘좌가 마당에서 콩을 터는데 웬 노인이 찾아와 정중히 인사를 했다. “강 예인을 뵈러 왔습니다.”
휘좌가 대답했다. “소인은 강가지만 예인은 아닙니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노인이 되물었다. “강자 휘자 좌자가 맞으신가요?”
휘좌가 깜짝 놀라자 노인은 은은한 미소를 띠며 안도의 한숨을 쏟아냈다. 두 사람은 가을볕이 자랑자랑 내리쬐는 쪽마루에 마주앉았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소인은 한양 인사동에서 표구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와 ‘천하 명필을 발견했다’ 해서 따라간 곳이 수원성 안에 있는 초라한 기와집이었지요. 조그만 대문 앞에서 그와 소인은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 붙은 ‘입춘대길’ ‘건양다경’이 어찌나 광채를 발하던지요.”
노인의 입담이 이어졌다. “한자 한자 한획 한획 힘이 넘쳐났지요. 상주 사는 고모님 댁에서 얻어 왔다더군요. 상주로 내려가 그 고모님을 뵈었더니 점촌 사는 오빠가 줬다 하고요. 점촌으로 달려가 오빠 되는 분을 만났더니 바로 강 예인한테서 받았다 합디다.”
휘좌가 놀라서 손사래를 쳤다. “저는 명필이 아닐뿐더러 붓 놓은 지 3년이 넘었습니다.” 노인은 쪽마루가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잠시 후 휘좌가 뒷담 위의 반시를 소쿠리에 담아 냉수 한그릇과 함께 가져왔지만 노인은 없었다. 통시에 갔는가 기다려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기둥 뒤에 보따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보따리를 풀던 휘좌는 깜짝 놀랐다. 거금 삼천냥과 함께 왕유·백거이·이백의 시 일곱편씩을 써놓으면 정월에 찾으러 오겠다는 서찰이 있었다.
이듬해 정월 보름날 낯선 시동이 휘좌의 휘호를 찾아갔다. 한양에서 표구사를 한다는 그 노인은 실은 안동에 사는 운봉이
외당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