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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문학을 전공하면서 문학과 예술에 관한 다양한 이론을 접해왔지만, 어떤 이론도 절대적이고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때는 특정한 이론에 매료되어 그에 대해 상당한 시간을 투여하면서 탐독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이론보다는 작품 자체가 지니는 의미를 탐구하는 작업이 문학의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가로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은 이른바 ‘문화적 유물론’의 이론적 고찰을 시도하여 정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책이 출간(1977)된 지 50년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 후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다양한 문학이론들의 정치한 이론에 비해서 다소 원론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어떤 이론도 영원할 수 없듯이,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 역시 이제는 연구자들의 관심에서 다소 비껴나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서양 중세 이전의 예술에 관한 이론이 주로 신이나 자연에서 발견한 절대적 이상을 상정하여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인간’과 인간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의 토대’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따라서 서양 중세 이전의 예술이론은 ‘신의 절대성’이나 ‘이상적 전범’을 상정하고, 그러한 ‘관념’에 조금이라도 다가서려는 인간의 행위가 예술 작품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속한 현실에서 살아가고 잇으며, 예술 작품 역시 그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창작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 점에서 '유물론'은 문학이론으로서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혁신적 방법론을 취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로부터 촉발된 ‘유물론’의 의미는 예술론에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저자는 자신의 방법론을 일컬어 ‘문화적 유물론’이라고 규정하며, 구체적으로 ‘사적 유물론 내의 물질적인 문화와 문학 생산의 특질들에 대한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문화적 유물론’을 설명하기 위한 ‘기본 개념들’을 ‘문화’와 ‘언어’ 그리고 ‘문학’과 ‘이데올로기’로 제사하여 설명하고 있다. 저자가 제목에서 내세운 ‘이념’이란 곧 이데올로기를 의미하는데, ‘문학’에서 그것이 중요하게 고려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저자의 작업을 '능동적인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전반적 과정'으로 설명하는 번역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유라고 하겠다. 즉 인간의 활동을 관념론의 범주들과 분리시켜, 구체적인 사회 현실과 마주선 개체의 존재에 주목하는 관점이다.
이러한 기본 개념들의 의미를 설명한 이후, 문학의 존재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저자의 탐색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이론’이라는 제목으로, ‘기저와 상층 구조’를 비롯하여 모두 10개의 항목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기저와 상층 구조’는 이후의 논의 과정에서 각각 ‘토대(하부 구조)’와 ‘상부 구조’라는 번역으로 정립되는데, 번역자는 저자인 윌리엄즈 자신의 표현을 존중하여 이러한 용어를 선택했음을 밝히고 있다. 문화에 대한 저자의 관점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현실 속의 어떠한 생산 양식(따라서 어떠한 사회 질서)도 모든 인간적 실제와 에네르기와 의도를 다 포괄하거나 탕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떠한 지배적 문화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점은 문화와 예술을 바라보는 서양 중세 이전의 지배적인 논의를 전복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설명에 이어, 저자는 ‘문학이론’이라는 제목으로 10개의 항목으로 마르크스이론에 입각하여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글의 다양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기호와 기호법’과 ‘쟝르’ 그리고 ‘저자들’과 ‘창조적 실제’로서의 문학 작품의 창작과 향유에 이르는 제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다소 ‘낡은’ 듯이 보이는 내용이라, 책을 다 읽은 후에 판권 페이지에서 확인한 출간 시점은 1982년의 초판본이었다. 아마도 오래 전에 나 역시 이 책을 탐독했을 터이고, 내 서가에 꽂혀있던 기간도 그만큼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문학이론에 대한 연구와 문학 작품을 해석하는 나의 인식들도 분명 ‘변증법적’으로 변화를 했음을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의 독서에서는 조금은 거리를 두고, 책의 내용을 음미할 수 있었다는 점에 나름의 의미를 두고자 한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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