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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 한식(韓食)을 찾으면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라는 대단히 추상적인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식성도 변하는데, 과연 ‘고유’의 음식이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일까? 그렇기 때문에 사전에 등재된 ‘한식’이라는 단어는 이렇듯 추상적인 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식’의 실체가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쌀밥, 김치, 찌개, 젓갈 등등은 한식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음식들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러한 음식 하나하나를 나열하면서 한식이라고 말하기에는 크게 부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 먹는 김치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고추가 전래된 것은 대략 조선 후기라고 하는데, 그 이전에 지금과 같은 고춧가루를 사용한 김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는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음식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위의 질문처럼 늘 궁금하던 문제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러한 나의 고민에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 출신으로 음식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한식의 실체를 찾기 위해 다양한 기록들을 검토하고, 지금 사용되고 있는 한식에 대한 관념들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기에 형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에는 ‘어떻게 지금의 한식이 되었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지금의 한식’이 사전적으로 정의된 ‘우리나라 고유의 음식’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양한 ‘자료를 뒤져’서 그 용례와 실체들을 하나씩 밝히고 있는 것이다.
모두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이 책의 첫 번째 항목은 ‘그런 음식이 아닙니다’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여기에서는 이른바 ‘향토 음식’과 ‘보양식’, 그리고 ‘사찰음식’과 ‘산나물’에 얽힌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한반도에는 향토 음식이 없었다. 지금도 없다. 향토 음식은 허상이다’라고 단언하면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근대 이전 지방 분권이 강력하게 시행되었던 일본의 영향으로 ‘향토 음식’이라는 관념이 받아들여졌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다양한 자료들을 근거로 그러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대략 50년쯤 전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40년 전의 신문기사에서 소개한 ‘향토 음식’은 지금의 향토음식과 전혀 달라졌음이 확인되는데, 짧은 기간 안에 이렇게 달라지는 음식을 굳이 ‘전통 음식’ 혹은 ‘향토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밖에도 여름철에 먹는 보양식도 근대에 생긴 관념일 뿐이며,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사찰음식이라는 것도 그 실체가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단언한다. 무욕을 실천하는 승려들이 알록달록한 색감을 중시하는 음식점의 '사찰음식'을 먹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음식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몇몇 승려들의 경우, 유명 요리사들처럼 단지 음식에 재능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만든 음식이 사찰음식의 바탕에서 나왔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자체가 사찰음식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즐겨 먹는 ‘산나물’은 오랜 전통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지, 가난해서 먹었던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음식 그 자체가 아니라, 음식문화에 담긴 정신을 살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항목인 ‘궁중 음식의 진실’에서는 오늘날 한정식집에서 팔고 있는 궁중음식의 실체가 일제 강점기 '천박한 요릿집의 안주'였을 뿐이라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식객>이라는 만화를 통해서 그 존재가 부풀려진 이른바 ‘조선 왕조의 마지막 대령숙수 안순환’은 한평생 요리를 하지 않은 ‘친일파 장사꾼’이었을 뿐이었다. 당시의 역사 기록과 신문기사 등을 통해서 밝혀진 ‘안순환’의 실체는 일제와 친일파들의 후원 아래 사회적 영향력을 키우고, 그것을 기반으로 ‘대령숙수’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다만 그가 음식점을 통해 일제 강점기 사회적 영향력을 쌓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풀려 하나의 신화로 조작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정확한 진단이다. 따라서 그것을 기반으로 한 현재의 '궁중 음식'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또한 이의 연장선에서 ‘제조상궁’이라고 알려졌던 ‘궁중 음식을 전승한 기능보유자’ 한희순 역시 그 실체가 부풀려졌음을 다양한 사료를 통해서 증명하고 있다. 실상 조선시대 관직에 대해 약간의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제조상궁’이라는 말이 오류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제조(提調)라는 직위는 각 관청이나 부서의 총 책임자로서, 반드시 정3품 이상의 당상관 문인이 담당하던 직책이었다.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상궁은 ‘정5품’이 최고이기에 ‘제조상궁’이라는 직위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궁중 음식’이란 일제 강점기 그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한 몇몇 사람들과 지난 독재정권에서 이를 추인한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20세기의 산물인 당면을 사용한 잡채 역시 당연히 ‘전통 한식’이 아닌, 근대에 새로이 생겨난 음식인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주장은 ‘한식에 한 걸음 더 가까이’라는 마지막 항목에 다 담겨져 있다고 이해된다. 이미 조미료와 식재료가 달라진 지금, 전통을 운위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히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식 조미료와 단맛에 길들여진 ‘지금의 한식은 일본풍’이며, ‘전통, 정통, 최고는 꼭 지켜져야 하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미 사람도 식재료도 달라진 지금, 전통을 복원하기보다 ‘한식의 정신’을 음미하면서 우리 음식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젓갈과 장아찌 등 삭힌 음식을 좋아하는데, 우리나라처럼 다양한 삭힌 음식이 있는 나라는 드물다고 한다. 다양한 나라에서 발효를 통해 만든 음식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 종류나 방시 등에서 우리나라의 음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저자는 평가하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비법이 아닌 정신을 강조하는 저자의 이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음식은 세 번 만든다. 손으로 만들고, 머리로 만들고, 가슴으로 만든다. 손으로 만들면 입에 남고. 머리로 만들면 몸에 남는다. 가슴으로 만들면 음식은 가슴에 남는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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