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온을 높이는 삶 눅 5:12-16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목회 사역하시던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한번은 어떤 동네에 가셨을 때 나병환자가 찾아왔습니다. 성서시대의 나병환자는 문둥병환자를 포함하여 온갖 피부병이 걸린 다양한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저희 어렸을 때도 대전탑 근처에 살았는데 지금의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는 곳 너머로 나병환자촌이 있었고 저희는 그쪽방향조차 바라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나병환자가 오면 사람들의 간을 빼먹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어린애들을 잡아먹으면 낫는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나병환자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어린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레위기에서도 “그는 부정한 자인즉 사람들이 알도록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외치며 혼자 살되 그의 거처는 진밖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을이나 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육체는 물론이고 정서적으로 정신적으로도 고립되어 살았습니다.
그런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목회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람대접도 못 받고 사람들 눈을 피해 다니면서, 아픈 것 밖에 없는데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평생을 숨어 다니면서 스스로 죄책감에 빠져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그 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제발 살려달라고 자신 좀 낫게 해 달라고 애걸을 합니다. 그런 그 나병환자를 향해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행동은 그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부부가 싸웠어요. 원수처럼 싸웠는데 그래서 서로 등을 지고 자는데 슬그머니 아내가 제 다리에 발을 얹어요. 발가락 하나 얹었는데 거기서 뭘 느낍니까? 사람의 체온을 느낍니다. 이때의 발가락은 단순한 발가락이 아니예요. 화해의 마음이고, 연결을 원하는 화해의 손짓이예요. 그 발가락에서 체온을 느낍니다. 처음 미국에 첫발을 디디는데 공항에서 내리니까 다 영어예요. 길도 낯설고 도시도 낯설고 모든 것이 다 낯설어요. 제가 크리스마스 다음날 도착했어요. 그곳은 우기예요. 11월부터 3월까지 일주일에 3-4일은 비가 와요. 얼마나 스산해요. 그런데 그런 저희가 뭐라고 생면부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목사님 부부가 공항에 나오셔서 저와 기림이를 데려다가는 따순 국물에 밥을 먹이셨어요. 뭘 느끼죠. 사람의 체온을 느껴요. 아 세상은 살만하구나.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 이야기를 읽다보니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초대 설립자의 이야깁니다. 여성 전도사님입니다. 6.25 전쟁 때 북쪽에서 피난을 내려오는데 임진강을 건너는데 수중의 돈은 다 빼앗기로 딱 배삯만 남았더라는 거죠.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배 삯을 내고 타려고 하는데 어떤 분이 배 삯이 없어 타지를 못하고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그 수중에 남은 배삯으로 그분을 태우게 했데요. 그리고 어린 남매 손을 붙잡고 돌아서는데 이 현실이 눈물겹더라는 겁니다. 그랬더니 차마 사공이 그냥 떠나지 못하고 그 전도사님을 태우더라는 겁니다. 뭘 느껴요? 그 전쟁 피난통에도 사람들은 체온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처음 느꼈던 것은 단순한 손가락이 아니라 사람의 체온이었을 겁니다. 어떤 피부병은 체온으로도 낫습니다. 피부질환이라는 게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어떤 사람은 고립과 단절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소화도 안 되고 위가 망가지고 망가진 위에 완전 소화를 못해내니까 그것이 몸에 남았다가 피부를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단 한사람의 연결만으로도 사람은 극도의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체온을 느끼는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주일에 교회 오면 내가 불편한 사람조차도 한 주간 동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대견하잖아요. 우리가 우주적 시간 속에서 이렇게 한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은 기적입니다. 애썼다고 내가 편한 사람하고만 하지 말고 눈빛을 교환하고 톡톡 어깨를 감싸주고 체온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나병환자의 체온만 높이신 게 아닙니다.
몸이 낫는다고 낫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에게 가서 회복된 몸을 보이고 확진 판정을 받아 입증하라 했습니다. 단순히 내 스스로 체온만 높이지 않고 더 이상 공동체와 사회가 더 이상 그를 낙인찍지 못하도록 도왔습니다. 단순한 개인의 체온을 넘어서서 사회적 체온을 높이는 일까지 힘썼습니다. 그래야 그 한사람이 공동체나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여수 도성마을도 한센인 정착촌인데 이곳은 나병을 앓았다가 완치된 사람들의 정착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고 에그갤러리라는 전시회장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져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했고 지난 2023년 50년 만에 처음으로 자장면을 배달해서 먹었다고 하니 그들이 나았다고 나은 게 아니었습니다. 에그갤러리의 사람들은 그들이 사회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적 체온을 높이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사회적 체온을 높이는 종교였습니다. 승동교회(사무엘 무어, 장로교 합동)는 소 잡는 백정을 장로로 세웠습니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교회적 차원 사회적 차원에서 백정도 똑같은 사람임을 공포했습니다. 로제타 홀이라는 선교사는 맹인 소녀들을 위해서 한글 점자책을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일을 넘어서 맹인도 사람이라는 사회적 고백입니다. 지금 세브란스의 전신인 제중원의 의사였던 에비슨이라는 선교사는 왕의 병을 돌보는 어의였습니다. 어의였던 그 사람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된 박성춘이라는 백정을 찾아가서 직접 고쳐줍니다. 초기 기독교는 교육선교, 의료선교, 신분질서의 변화와 사회적으로 낙오된 이들을 품으면서 사회적 체온을 높이는, 그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인도하는 사회적 종교였습니다.
사회시스템, 구조의 변화를 통해 약자를 돌보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존중받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도 사회적 체온을 높이는 일이고 더불어 사회의 지도층이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중심을 지키며 이 사회가 어떤 사회로 나아가야하는지 그 방향을 가리키며 살아갈 때 그 역시도 사회적 체온을 높이는 일입니다.
계엄과 함께 제일 먼저 사표를 던졌던 법무부 감찰관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는 계엄선포와 함께 4일 0시 9초에 28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내는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부당한 권력에 대한 충성은 히틀러 정권에 부역했던 나치에 다름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계엄이 터지면서 수없이 많은 차량이 과천청사를 들어올 때 오로지 단한 사람만이 부당한 권력에 충성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표를 던지고 반대방향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취미가 많답니다. 철인 3종에 마라톤, 별보기, 모형 만들기, 남조, 오토바이 등 그는 다양한 취미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답니다. 퀵배달, 설비엔지니어링, 선생님, 소방관, 경찰관 그리고 그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정말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구나. 그 치열하게 일상을 받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어쩌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것과 같은 저마다의 소중한 일상을 한순간에 짓밟히는 것을 느꼈다는 겁니다. 계엄을 통해서!
지난 김선호 국방장관 대행은 육군 사관학교 임관식에서 신임장교들에게 군이 존재해야하는 본질적 이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국가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며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헌법적 사명을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군인에게 있어서 충성이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을 말하며 용기란 어려운 상황에서도 올바름을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며 국가와 국민만을 생각하며 올바른 충성과 용기를 실천할 것”을 말했습니다. 시대의 중심을 지키며 사회가 가야할 방향들을 나침판처럼 가리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106년전 이 땅에 자유와 평등,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선언한 믿음의 선배들은 <기미독립선언문>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아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 지나간 세기를 통하여 깎고 다듬어 키워온 인도적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서관을 인류의 역사위에 던지기 시작하누나” 힘의 시대의 종료를 선포합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우리가 어떤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하는지를 독립된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어야하는지를 천명합니다. 머슴, 노비, 여성, 아이들에서 지식인, 양반,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더불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평등평화의 대동세상을 꿈꾼 운동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3.1정신을 이어받아 광기와 폭력과 야만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삶의 체온을 한 옥타브 더 높여 생명의 신비와 인간의 존엄성, 일상의 아름다움을 회복시켜나가는 그런 세상 이룰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