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청(鴉靑)빛 시간
- 서울 풍경 59
최서림
淸道라는 아청빛 시간에 푹 젖었다 왔다
시인인 나를 부러워하는, 나보다 더 시인다운 농부를 만났다
소들이랑 한 식구처럼 살고 있었다 소를 닮아 눈망울에
초겨울 저녁 검푸른 물빛 하늘이 출렁출렁 담겨 있었다
마들이라는 두꺼운 시간 속에 아청빛 시인이 살고 있다
간판들이 켜질 무렵 얽매이지 않는 말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다
도봉산 겨울 능선 위 저녁 하늘빛이
노시인의 눈에 흘러내릴 듯 가득 차 있다
광주 진월동에는 이른 새벽부터 푸른 저녁까지
편백나무로 시를 짜는 목공이 있다
총알이 스친 다리처럼 시리지만
옷깃을 여미게 하는 묘한 빛깔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말에 찔리고 베여 갈라터진 이 땅 어디에서도
붕대 같은 저녁이 찾아오듯이
시의 순간만큼 짧은 아청빛 시간이 왔다 간다
시인 구보씨의 하루
- 서울 풍경 18
최서림
소설가 구보가 이상과 하릴없이 드나들던
종로 화신백화점 자리에
구름이 비치는 클라우드 빌딩이 들어섰다
시인 구보는 자신과는 생판 딴 세상인
클라우드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잠시 숨 돌리러 나온 삼성생명 직원들과
빌딩 밖에서 담배만 뻐금거리고 있다
낡은 슬라브집에서 허적허적 걸어 나온 구보,
신문을 펼쳐들다 빌딩 사이
가장 높이 떠서 흘러가는 새털구름을
고니같이 목을 길게 빼고 올려다본다
난수표 같은 경제면은 그냥 넘겨버리고
새털구름처럼 퍼져나가는 한숨을 내쉰다
아침을 거르고 나온 정리해고자 구보,
‘낙원’상가 근처 북적이는 고향집에서
이천 원짜리 선짓국으로 허기를 채운다
잎 떨어진 은행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대학노트를 꺼내 시를 끄적거린다
핸드폰을 쓰지 않는 구보, 가수 배철수와 노닥거려 볼까
명동예술극장 근처 카페 <시인동네>로 걸어간다
줄담배 피우며 구두 빠개어 신고 걸어간다
레깅스를 꽉 죄게 입은 아가씨를 봐도
샤넬향기 풍기며 가는 탕웨이 닮은 여자를 봐도
도무지 눈길이 돌아가지 않는다
미래보다 낯선 쇼핑의 제국 롯데타운을 지나
화장품 싹쓸이 하러 온 중국 관광객들 득시글거리는
명동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중국말인지 일본말인지 호객 소음에 어지러워
무심코 <시인동네>를 지나쳐 지하철로 빨려 들어간다
졸다 깨다 멍하니 당고개까지 갔다가
다시 오이도까지 갔다가 밤이 깊어서야
명륜동 가장 낮은 집으로 돌아간다
시인의 탄생
- 서울 풍경 44
최서림
내 아내가 초등 1학년 때 광안리서
톰 소여랑 놀 때
청도서 나는 글자도 몰랐다.
내 아내가 마크 트웨인, 빅터 위고랑 여름을 피할 때
나는 붕어, 피라미, 물새알과 더불어
개천에서 방학을 홀라당 까먹었다.
서울 올라와 내 아내는 밤샘하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나 역시 먼 길을 돌고 돌아 밤을 지새우는 시인이 되었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눈 내리는 겨울밤이 아니다.
아마빌리스 같은 여자와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다.
그녀의 머리칼에 떨어지던 윤중로의 벚꽃도 아니다.
공룡 같은 대학도 고리타분한 시론 강의도 아니다.
국민소득 2만 불도 아니다. OECD도 아니다.
나를 시인으로 키운 건
초등학교도 못 나온 내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들판의 망아지처럼 풀어놓은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찔레 같은 시인으로 단련시킨 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청춘의 분노와 좌절, 패배주의
긴장되고 졸아있던 방위병 생활, 5·18
서울의 봄, 최루탄, 마르크스, 성경, 촛불
중이염, 페니실린 쇼크, 짝사랑과 반복된 이별
불면증, 노숙, 지하방이다.
나를 무늬만 시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끊이지 않는 잔소리와 걱정이다.
이 땅에서 먹고 살아남기의 문제이다.
미친 전세 값, 학원비, 큰 아이 대입, 노후 걱정이다.
만 개의 입
- 서울 풍경 40
최서림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지만,
만 개의 입은 쇠도 녹인다.
항공모함을 움직이는 것도 쬐그만 키고
고집 센 늙은 몸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도 가랑잎만한 혀다.
미사일보다 멀리 날아가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말,
칼날은 베거나 쪼개기만 하지만
말은 찔러 쪼개다가 싸매주기도 한다.
녹조가 뒤덮은 강물에 등 굽은 피라미 새끼같이
도무지 안녕하지 못한 시대,
만 개의 입은 용광로다.
촛불, 신문지, 우유 팩, 빵 봉지, 찢긴 옷가지, 화염병, 최루탄, 방독면, 진압봉, 모자, 깨어진 안경, 책가방, 벗겨진 구두, 카메라, 민중가요, 쌍욕, 콧물, 눈물, 온갖 구호를 끌어 모아 불태워 쇠를 녹인다.
비둘기가 낙엽처럼 내려앉는 서울광장
한번 외친 함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만 개의 함성은 지구를 돌고돌아
너와 나 굳어진 마음의 지축을 흔든다.
자명한 공리같은 삶의 궤도를 뒤흔들어 놓는다.
촌로들 송전탑 반대 시위가
태풍 앞에 촛불처럼 꺼져가는 듯해도,
여기저기서 한데 모아진
만 개의 함성은 ‘꺼지지 않는 불’로 타오른다.
양파
- 서울 풍경 72
최서림
이 땅의 시는 양파다.
까도 까도 속 알맹이가 안 보인다.
눈물 흘리며 한 겹 한 겹
벗겨가는 과정 속에 알맹이가 들어있다.
시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시에 정답이 있다고 하는 순간 독재다. 권력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수천, 수만의 촛불을 밝혀도
답이 쉬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여 시는 끊임없는 반역이다.
진실은 게으르게 오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반역의 과정 속에, 촛불 속에 이미 숨어있다.
시간과의 지루한 싸움에서 살아남는 진실은
보려고 하는 자만 볼 수 있다.
이 망각의 안녕한 땅에서
진실은 보리 까시래기다.
반역이 없는 땅은 시의 죽음이다.
더 이상 시가 필요 없는 땅은 ‘낙원’이다.
*약력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현대시』에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연작으로 등단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시집으로 『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물금』 등이 있음
서울의 우울
_최서림의 ‘서울 풍경’ 연작에 부쳐
신형철(문학평론가, 조선대 교수)
파리는 변한다! 그러나 내 우울 속에선
무엇하나 끄덕하지 않는다!
―보들레르, 「백조」(le cygne), 악의 꽃 2부 ‘파리 풍경’
최서림이 1년 전부터 발표하고 있는 연작시의 타이틀은 ‘서울 풍경’인데 이것은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눈길을 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경성 모더니즘이 출현하기 시작한 1930년대 이후에 한국어로 쓰인 모든 시의 3분의 1에는 ‘서울 풍경’이라는 부제를 붙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이 아닌 지역의 지역성을 성찰한 시들이 3분의 1을 차지할 테고, 그 배경이 어디여도 상관없는 내면 탐구의 시가 나머지 3분의 1을 차지하리라.)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서울 풍경’이어야 했을까. 이 범박하고 추상적인 제목보다 더 구체적인 어떤 필연성이 시인에게는 있지 않았을까.
근대 이후 새롭게 구축된 대도시 환경과 그에 대한 근대인의 육체적․심리적 반응을 시로 쓰는 작업의 기원을 찾자면 150년 전 보들레르의 악의 꽃(특히 2부 ‘파리 풍경’에 수록된 시편들)과 그에 이어지는 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에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이와 같은 작업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는 것이어서, 작업의 독창성도 결국 그 두 요소의 독창성에 힘입을 것이다. ‘주체성’과 ‘공간성’이 그것이다. 예컨대 보들레르의 경우 (이 글의 제사로 인용한 구절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우울’(spleen)이라는 정조의 지배를 받는 ‘주체성’이 그 시의 한 항목을 이루고, 대대적인 도시계획 이후 일신한 제2제정기 파리의 ‘공간성’이 다른 한 항목을 이룬다. 우울증적 주체와 파리의 환등상(phantasmagoria)과의 충돌, 더 압축하면, 그냥 ‘우울과 파리’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파리의 우울’이라는 어구는 그의 산문시집의 타이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전체를 규정할 수 있는 어구이기도 한 셈이다.
최서림의 연작시 ‘서울 풍경’은 어쩔 수 없이 보들레르의 ‘파리 풍경’을 떠올리게 하고 둘을 서로 비교하고 싶게 만든다. 비교 작업 역시 주체성과 공간성이라는 두 층위 모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공간성은 놔두고 주체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져보려고 한다. 1850년대의 파리와 2010년대의 서울을 비교하는 작업은 이 자리에서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니, 다만, 1850년대 파리를 바라보는 보들레르 시의 ‘나’와는 다른, 2014년의 서울을 바라보는 최서림 시의 ‘나’의 특징을 들여다보자는 것. 보들레르의 ‘나’는 무엇보다도 우울의 주체라는 점을 위에서 얘기했는데, 흥미롭게도, 최서림의 ‘나’ 역시 우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우울하다는 것이 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달 전에 발표된 연작의 첫 두 편을 다시 보자.
이 세상 가장 낮은 바닥에서
지네처럼 숨어 산다.
딱히 시 쓰는 일밖에 따로 없다.
시를 쓰기 위해 빵조각처럼
우울을 야금야금 뜯어먹다 뚱뚱해졌다.
행여나 우울이 달아나 시를 못 쓸까봐 조바심친다.
불안할수록 많이 먹는 비정규직,
먹고 또 먹어서 불안을 밀어내 본다.
몸 안에 독을 쌓아서 우직하게 약으로 삭여낸다.
새털구름같이 사라지고 마는 구원을 위해
제 몸의 병균으로 백신을 만들어내는 정신적 막노동자, 결국
자기 뱃속 무한 허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는
—「우울을 뜯어먹는―서울 풍경 1」 전문 (시현실 2013년 가을․겨울호)
종일 녹 빛 우울을 먹고 마신다.
밥도 혼자 먹고 말도 혼자 한다.
산꼭대기까지 가파르게 밀려올라간
루핑을 덮은 집.
비에 젖은 쥐새끼 모양을 한 노인이
고양이 같은 세상을 피해 웅크리고 산다.
전류처럼 몸 안에 팽팽히 흐르는 긴장으로
입술이 쥐 주둥아리처럼 툭, 불거져 나와 있다.
사람 냄새가 맡고파 매일 지하철을 탄다.
쥐새끼처럼 눈을 깜박이며
표적도 없이 두리번거린다.
지하철 안을 가득 메운 피곤한 무관심들,
후줄근하게 섰거나 앉은 우울들이
인공 심장, 스마트폰에만 넋을 팔고 있다.
사람의 홍수 속에서 사람이 그리운 저 노인,
손끝으로 지워지는 화면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당고개행 지하철―서울 풍경 2」 전문 (시현실 2013년 가을․겨울호)
‘서울 풍경 1’은 연작의 첫 번째 작품답게 이 연작을 이끌고 갈 주체의 구조를 먼저 보여준다. 그는 시인이다. 그런데 어떤 시인이냐 하면, “시를 쓰기 위해 빵조각처럼/우울을 야금야금 뜯어먹다 뚱뚱해”진 시인이다. 적당히 우울한 상태가 시 쓰기에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것은 짐작 가능한 일이다. (멜랑콜릭한 상태가 예술창작에 특별한 도움을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언급들이 전해져오고 있으니까.) 그런데 단지 그 정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주체는 우울이라는 정조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고까지 말한다. “행여나 우울이 달아나 시를 못쓸까봐 조바심친다.” 이 정도면 이 시인에게 우울은 그가 자신과 세계를 인식/감각하는 가장 결정적인 통로라는 얘기가 된다. 그는 우울하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우울함으로 쓴다. 우울하기 때문에 쓰는 주체가 아니라 쓰기 위해 우울해질 필요가 있는 주체다. 보다시피 최서림의 ‘서울 풍경’과 보들레르의 ‘파리 풍경’은 단지 제목만이 아니라 그 주체성의 구조 측면에서도 꽤 비슷한 데가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울한 주체’가 세계를 인식/감각하는 양상에 대해서 말해야 하리라. 발터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우울함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겨두고 있지만 그중 “우울은 항구적인 파국에 부응하는 감정이다.”라는 문장은 특히 간명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이 문장에만 의지해 본다면, 우울한 주체는 타인들이 ‘항구적인 진보’로 간주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항구적인 파국’으로 받아들이는 주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최서림의 주체가 보들레르적인 의미에서의 우울한 주체라면, 그는 2010년대 서울에서의 삶을 ‘항구적인 파국’의 그것으로 감지할 것이다. 인용한 두 번째 작품이 어느 노인의 삶을 보고하는 양상을 보라. 물론 이 보고는 빈곤층 노인의 고독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소산이며 1차적으로는 그렇게 읽히는 것이 맞겠지만, 이에 더해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노인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의 지배적 정조 역시 ‘우울’일 뿐이라고 판단하는 시인의 눈이다. “후줄근하게 섰거나 앉은 우울들이/인공 심장, 스마트폰에만 넋을 팔고 있다.” 총체적으로 우울한 이 세계라는 열차가 선로를 바꿀 여지는 전혀 없을까.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시인은 머지않아 노인의 존재가 “손끝으로 지워지는 화면처럼/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라 예견한다. 이 단호한 예견의 에너지는 바로 ‘서울 풍경 1’의 ‘나’가 뜯어먹은 그 빵에서 나온다. 그 빵의 이름이 ‘우울’이다. 이제 신작시 중에서 두 편 옮긴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눈 내리는 겨울밤이 아니다.
아마빌리스 같은 여자와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다.
그녀의 머리칼에 떨어지던 윤중로의 벚꽃도 아니다.
공룡 같은 대학도 고리타분한 시론 강의도 아니다.
국민소득 2만 불도 아니다. OECD도 아니다.
나를 시인으로 키운 건
초등학교도 못 나온 내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들판의 망아지처럼 풀어놓은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찔레 같은 시인으로 단련시킨 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청춘의 분노와 좌절, 패배주의
긴장되고 졸아있던 방위병 생활, 5·18
서울의 봄, 최루탄, 마르크스, 성경, 촛불
중이염, 페니실린 쇼크, 짝사랑과 반복된 이별
불면증, 노숙, 지하방이다.
—「시인 탄생―서울 풍경 44」 부분
아침을 거르고 나온 정리해고자 구보,
‘낙원’상가 근처 북적이는 고향집에서
이천 원짜리 선짓국으로 허기를 채운다
잎 떨어진 은행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대학노트를 꺼내 시를 끄적거린다
핸드폰을 쓰지 않는 구보, 가수 배철수와 노닥거려 볼까
명동예술극장 근처 카페 <시인동네>로 걸어간다
줄담배 피우며 구두 빠개어 신고 걸어간다
레깅스를 꽉 죄게 입은 아가씨를 봐도
샤넬향기 풍기며 가는 탕웨이 닮은 여자를 봐도
도무지 눈길이 돌아가지 않는다
미래보다 낯선 쇼핑의 제국 롯데타운을 지나
화장품 싹쓸이 하러 온 중국 관광객들 득시글거리는
명동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중국말인지 일본말인지 호객 소음에 어지러워
무심코 <시인동네>를 지나쳐 지하철로 빨려 들어간다
졸다 깨다 멍하니 당고개까지 갔다가
다시 오이도까지 갔다가 밤이 깊어서야
명륜동 가장 낮은 집으로 돌아간다
—「시인 구보씨의 하루―서울 풍경 18」 부분
신작시로 ‘서울 풍경’ 연작 다섯 편이 추가되었고 그중 두 편을 먼저 옮겼다. 이제 위의 시들에서 시인은 앞에서 살핀 저 우울한 주체의 계급적 위치를 분명히 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은 정당한 방향 설정으로 보인다. 멜랑콜리(우울)에 대한 미학적․의학적 담론들이 하나의 우울만을 말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그 담론이 우울의 계급성에 충분히 섬세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울에도 계급적 차이가 있다면, 하나의 우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울들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인용한 두 편 중 앞의 시에서 시인은 한 사람을 시인이 되게 만드는 데에는 두 종류의 외적 자극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쉽게 바꿔 말하면 그것은 덧셈의 자극과 뺄셈의 자극이다. 삶에 무언가가 더해질 때 시인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무언가를 박탈당하면서 시인이 될 수도 있다. 최서림의 우울한 주체는 “눈 내리는 겨울밤”과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와 “시론 강의” 등등이 그의 삶에 더해져서 시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런 시인이 있다면 그는 송가와 찬가를 쓰게 되리라.) 그는 유년기의 여유와 청년기의 안락을, 그리고 건강과 사랑과 잠과 집을 빼앗겼으므로 시인이 되었다. 요컨대 최서림의 우울한 주체는 ‘계급적으로는 뺄셈을 당한’ 주체다.
이제 이렇게 구체화된 주체를 (제2제정기의 보들레르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구보(박태원)와 비교해보자는 발상이 뒤의 시 「시인 구보씨의 하루―서울 풍경 18」을 쓰게 했을 것이다. 2014년의 우울한 주체 구보는 이제 “정리해고자”가 돼 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의 감각과 욕망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이 구보에게는 성욕이 없다(“도무지 눈길이 돌아가지 않는다.”). 성욕까지도 뺄셈당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이유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 욕망의 결핍은 그의 물질적 결핍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이 시는 암시한다. 이것은 아이러니한 일인데, 이어지는 대목이 알려주듯, 오늘날 대도시는 엄청난 자극의 폭격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자극은 과도하지만 욕망은 불모화되는 곳으로서의 서울. 그래서 21세기 구보의 산책은 실패하고 만다. ‘시인동네’라는 카페를 향해 가던 구보는 “중국말인지 일본말인지 호객 소음에 어지러워” 무의식중에 그만 지하철로 피신하고 말았던 것. 감각적 자극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그것을 음미할 줄 알았던 이전 시대의 산책자들로부터 우리시대의 구보는 이토록 멀어져 있다. 물론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이 무능력 자체가 이미 ‘서울 풍경’의 일부일 것이므로. 이제 우울하고 빈곤하고 심지어 불모화돼 있는 이 주체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지만,
만 개의 입은 쇠도 녹인다.
항공모함을 움직이는 것도 쬐그만 키고
고집 센 늙은 몸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것도 가랑잎만한 혀다.
미사일보다 멀리 날아가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말,
칼날은 베거나 쪼개기만 하지만
말은 찔러 쪼개다가 싸매주기도 한다.
녹조가 뒤덮은 강물에 등 굽은 피라미 새끼같이
도무지 안녕하지 못한 시대,
만 개의 입은 용광로다.
—「만 개의 입―서울 풍경 40」 부분
시에 정답이 있다고 하는 순간 독재다. 권력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수천, 수만의 촛불을 밝혀도
답이 쉬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여 시는 끊임없는 반역이다.
진실은 게으르게 오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반역의 과정 속에, 촛불 속에 이미 숨어있다.
시간과의 지루한 싸움에서 살아남는 진실은
보려고 하는 자만 볼 수 있다.
이 망각의 안녕한 땅에서
진실은 보리 까시래기다.
—「양파―서울 풍경 72」 부분
최서림의 ‘나’는 지금 어떤 집회․시위 현장에 와 있는 것 같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서울은 연중 끊임없이 집회나 시위가 벌어지는 곳이다. (물론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서울 풍경’ 연작에서 이 연작시의 주체가 그와 같은 정치적 공간에 가 있는 것이 특별히 기이한 일은 아니다. 앞의 시는 “만 개의 입은 쇠도 녹인다”라는 구절을 앞세우고 있는데, 이 구절은 본래 국어(國語)에 나오는 ‘중심성성 중구삭금’(衆心成城 衆口鑠金)에서 뒤의 네 글자를 풀이한 것으로, 우리에게는 삼국유사의 기이편(紀異編)‒하(下)의 ‘수로부인’ 편에 인용된 문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시인은 “송전탑 반대 시위”에 나선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중심성성 중구삭금”을 떠올렸던 것 같고, 대중의 집합적 의지가 한 사회를 진보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을 재확인했던 것도 같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데, 그렇다는 것을 시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 이어지는 시는 ‘시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니까 시가 반드시 ‘쇠를 녹이는 만 개의 입’ 중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에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에 끊임없이 반역하는 과정 속에만 있다는 것이 이 시인의 생각일 것이다.
좋은 말이고 동의할 만한 얘기다. 그러나 나는 이 두 편의 시 앞에서 좀 당황한다. 이런 시들에는 보들레르와 구보를 거쳐 최서림에게 이른, 저 우울한 주체의 감각적 깊이가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의 우울한 주체에게서 정치적인 발언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울한 주체만이 가질 수 있는 더 고유한 관점과 발성으로 그러한 발언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금 읽은 두 편의 시는 명료해진 대신에 평평해졌다. 나는 연작시는 연작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체성에 의해 운용될 때 더 뛰어난 성취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 풍경’ 연작에 존재한다고 본 (혹은 그랬으면 한다고 생각하는) 주체성을 (선배들이 창조한 주체성과 비교함으로써) 더 또렷하게 드러내 보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연작이 그 주체성의 정조와 감각을 더 깊이 있게 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보들레르의 ‘나’에게만 1850년대의 파리가 그 비밀을 드러냈듯이, 2010년대의 서울도 제 비밀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를 최서림의 ‘나’에게만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글을 끝내도 좋겠지만 한 단락만 덧붙이자. 그런 의미에서 「아청빛 시간–서울 풍경 59」가 고무적이라는 말을 해야 하겠다. 이 시에는, 초겨울 저녁 물빛 하늘을 눈에 담은 채 경북 청도에 살고 있는 한 농부가 있고, 겨울 도봉산 능선 위 저녁 하늘빛을 눈에 담고 있는 노시인이 있으며, 광주 진월동에 사는, 나무로 시를 짜는 어느 목공이 있다. 적어도 이들과 만나고 있는 동안에는 서울의 우울을 잊을 수 있었던 것일까. (보들레르에게도 저 유명한 ‘상징의 숲’이 있었듯이 말이다.) 시인은 이들과 만난 시간을 ‘아청빛 시간’이라 이름 붙이고 그 시간이 선사해준 선물을 되새기며 이렇게 시를 마무리한다. “말에 찔리고 베여 갈라터진 이 땅 어디에서도/붕대 같은 저녁이 찾아오듯이/시의 순간만큼 짧은 아청빛 시간이 왔다 간다.” 이 마지막 세 줄은 빼어나게 아름답다. 이 시는 대도시의 그것과는 다른 정조와 감각을, 또 서울의 우울한 주체와는 다른 주체성의 깊이를 ‘서울 풍경’ 연작 안으로 불러들인다. 앞으로 이 연작의 운명은 어쩌면 서울의 내부로 파고드는 구심력과 서울의 바깥으로 벗어나려는 원심력의 긴장 속에서 탄생하는 주체성의 깊이에 의해 결정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