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속삭임 누가복음 4장 1-13절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목회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던 기간에 일어난 악마의 유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목회 전 단식하시면서 받았던 유혹의 이야기인 듯 보이지만 어쩌면 예수님 목회 전반에 걸쳐서 가장 큰 유혹, 시험에 관한 이야기로 보는 게 더 타당할 듯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유혹에 유독 약하신가요?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어떤 유혹에 약하니? 그랬더니 자기는 날씨에 약하데요. 화창한 날은 일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비가 오고 날씨가 흐리면 집 밖을 나가기가 힘들데요. 그래서 날씨가 안 좋으면 가급적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싶데요.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집 밖을 나가기 싫은 유혹에 너무 쉽게 무너진답니다. 사람마다 약한 고리들이 있습니다. 술의 유혹에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있고, 쇼핑의 유혹에 약한 사람들도 있고,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 입장에서 보면 핸드폰의 유혹에 약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핸드폰이 아이들 전두엽 발달(사고하지 않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유수한 기업들의 자녀들에게는 핸드폰 자체를 주지 않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핸드폰만 주면 애들이 조용해지니 이 유혹을 견디기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에너지와 노력을 쏟아 집중해서 놀아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개별적 약한 고리들도 있고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겪는 약한 고리들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유혹은 크게 3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첫 번째는 빵의 유혹입니다. 빵은 배부르고 등따시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상징합니다. 돌들까지도 빵으로 만들면 세상에는 먹을 거 천지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풍족한 먹거리가 존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입니다. 지구상에는 실상 먹을 거리가 지구상의 인구가 먹고도 남을 정도로 먹거리가 넘쳐납니다. 세계적으로 1년에 28억톤의 곡물이 생산됩니다. 갈수록 생산량은 늘어납니다. 지구상에 생산되는 생산량이 2억명분이 더 생산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굶주림의 인구가 8억명이 넘습니다. 30억 40억톤이 생산돼도 나눔과 분배의 영성이 정의롭지 못하면 굶주림의 인구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더더욱 현대인이 1년에 쓰레기로 버리는 량이 그중의 1/3, 9억톤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배부른 세상은 빵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먹을 것을 쓰레기화하지 않는 영성과 나눔과 분배의 영성입니다.
더더욱 어려운 나라들은 여전히 먹거리가 없어서 죽어가지만 우리나라는 더 이상 영양실조로 죽어가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적지 않은 병은 실제 너무 많이 먹어서 생깁니다. 음식을 먹고 완전 소화를 시켜서 다 영양분으로 보내고 밖으로 보내야 하는데 다 내보내지 못하고 그런 상태에서 또 먹고 또 먹고 그래서 몸에 음식들이 쌓여있다 보니 독소가 되고 그래서 온갖 질병이 생겨납니다. 풍요로운 먹거리는 정말로 악마의 유혹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빵으로 사는게 아니라 그 빵을 다룰줄 아는 귀한 생명의 먹거리를 쓰레기화하지 않고 절제하고 나누고 분배할 줄아는 영성이 우리의 몸과 관계와 세상을 지켜갑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이끌고 가서 자기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 편리, 번영, 화려하고 찬란한 이 시대 우리가 누리는 어마어마한 문명입니다. 특히 이 전기의 힘! 전기 없던 시절에서 사람은 살았고 호롱불 아래서 책도 읽고 군고구마도 구워먹고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력을 키우고 꿈고 꾸면서 인류는 삶을 영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이크, 스피커, 화면, 밥짓고 음식을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옷을 만들고, 책을 보고, 스마트폰을 쓰고, 컴퓨터로 일을 하고, 업무를 보고, 밴드로 소통을 하고.... 그런데 그 전기를 쓰기 위해서 인류는 상상할 수 없는 댓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에게 다른 건 다 따먹어도 이것만은 따먹지 말라고 금지된 열매를 동산 중앙에 두었습니다. 다 좋은데 이것만은 선을 넘지 마라. 삶에 관계에 문명에도 분명히 그런게 있다는 것입니다. 넘지 말아야할 선! 그러나 현대 문명인들 역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일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14년 전 일어난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기억하며 탈핵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제가 동녘에 다시 온 첫 주일이 지나고 둘째주간에 일어난 사건인데 지진으로 원전에 전기가 끊어지고 핵분열이 계속되면서 결국은 후쿠시마 원전들이 폭발했습니다. 그로인하여 귀환 곤란지역이 생겨 지금까지도 귀환이 되지 않고, 곳곳에서 반감기가 몇십년에서 몇백만년까지 되는 핵물질이 후쿠시마 곳곳에서 지금까지도 발견되고, 핵오염수를 관리를 못해서 태평양 바닷가로 방출하고 이런 일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원전이 폭발했을 때 계속 핵분열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어느누구도 접근을 못해요. 사람이 들어가면 1시간 만에 죽는답니다. 로봇도 안되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바닷물을 들이부어 몇 년만에 식혔어요. 그리고는 덮어 놓았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 원자로에 있는 핵원료 잔해가 880톤이나 있는데 지금도 그곳에 접근을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마어마한 방사능 물질이 나오는데 사람이 그곳에 접근하는 순간 1시간도 못견딘다는 겁니다.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의 물질이 아니라는 거죠. 이런 원자력발전소가 우리 나라에만 21기, 전세계에 400개가 넘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위험한 칼과 실탄을 넣어 방아쇠까지 당겨준 것과 같은 겁니다. 우리는 전기와 편리와 이 현대적 문명과 지구라는 생명체의 운명과 교환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 중에는 이런 자각속에서 문명이 주는 혜택을 포기하고 전기를 쓰지 않고 살아가는 공동체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편해도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에너지를 최소화하면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생각하며, 자연과의 공존을 꿈꾸며, 넘지 말아야 할 선들에 우상숭배(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다 아담과 하와같이 선을 넘으며 살아가는 순간 조차도 그 여로를 돌이켜서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만큼은 잊지 말아야합니다. 잊지말아야 조금이라도 동행하면서 자각하면서 깨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보라고 합니다. 종교를 주술,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유혹입니다. 지난주에 설교를 끝내고 났더니 교인 한분이 질문하시더라고요. 목사님 예수님이 나병환자도 고치고 그렇게 치유의 능력이 있으셨으면 몰려드는 사람들 죄다 고쳐주셨으면 되셨을텐데 왜 안 그러셨어요?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 신비한 기적을 팍팍 보여주시면 되는데 왜 사람들에게 알리지도 못하게 하고 혼자서 산으로 들어가고 왜 그러셨어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예수님에게 치유의 은사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사가 아니라 종교인이셨습니다. 의사는 고치는 일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종교인은 병을 고치고 못고치고의 문제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병이 있어도 없어도 공동체안에서 더 이상 그 병이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와 세상에 집중합니다.
어디가나 남탓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감기가 걸렸어요. 감기에서 나았다고 관계가 바뀌고 세상이 바뀝니까? 총칼을 휘두르는 탐욕적인 권력가가 걷지 못해요. 그런데 고침을 받아서 걷게 되었어요. 그러면 세상이 달라집니까? 갑자기 그 사람이 개과천선합니까? 사람이 변하지 않고는 절대로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몸이 낫는다고 관계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아셨어요. 그래서 수없이 많이 밀려드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라 팔복을 말씀하시고 하나님 나라 비유를 말씀하시고 삶의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종교지도자로써의 절규에 가까운 탄식이었습니다. 요나의 기적은 곧 다시스로 향하던 삶을 돌이켜 니느웨로 향하는 변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끊임없이 주술적인, 마술적인 종교를 경계하십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려 들지 말고 스스로 변화하고 깊은 자비와 연민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 관심있게 봐야할 것이 있다면 세 번째 시험에서 악마가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에 나온 “예수대 카이사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기독교 안에 예수가 있고 카이사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그안에는 하나님의 속삭임도 있지만 악마의 속삭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상식과 이치에 어긋나면 하늘의 음성이라도 사탄의 유혹일 수 있다” 목사의 말이라고 성경에 쓰여있다고 하나님의 속삭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속삭임이든 이치와 상식과 삶의 근본에 맞는 삶의 걸음인지 스스로 주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사유하는 성찰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의 답변들은 어쩌면 그러한 성찰과 고민과 사유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에도 이런 성찰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