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903
참선 공부에는 세 가지 잘못된 참선(參禪)이 있습니다.
첫째 두꺼비선, 하마선(蝦蟆禪)이라. 두꺼비는 미련해서 뛰는 재주밖에 없는데, 이 두꺼비처럼 두꺼비선이란 것은 자기가 하는 것만 옳다고 아집(我執)은 물론 법집(法執)을 버리지 못한 선을 말합니다. 자성(自性)은 아집과 법집을 떠나서 그야말로 광대무변하고 심수오묘(深邃奧妙)하여 말과 문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자성인데 얽매이고 착(着)하고 분별시비면 자성과는 거리가 생깁니다. 다시 말해 광대무변해서 거기에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자성, 불성광명이 충만한 것인데 분별 시비하면 벌써 그 순간 우리 마음은 어둡고 흐려져서 제한을 받는 것이니 따라서 두꺼비 선은 피해야 합니다. 두꺼비가 뛰는 재주밖에 모르듯이 자기가 아는 그것밖에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가 지적 수준이 무지몽매한 때에는 자기의 문중, 자기가 하는 방식만 옳다고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선을 낳고 대중적으로 승단도 화합되지 못한 결과를 낳고, 일반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배운 것, 자기가 느낀 주장만이 옳다고 하니 남의 아는 것, 남의 살림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만 고집하기 때문에 분별과 투쟁이 생깁니다. 따라서 하마선(두꺼비선)은 피해야 합니다. 하마선은 곧 암증선(暗證禪)이니 어두운 가운데 헤매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님 말씀을 착(着)하면 병이지만,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데 바로 성불하기 위한 순로(順路)인 것이니 전혀 무시하면 막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가 벼랑 아래로 떨어져서 기어 올라가려면 무엇인가 잡고 의지해야 하듯이 우리가 불조(佛祖)님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으면 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조님의 말씀은 수행의 벼리가 됩니다. 불조님의 말씀을 전혀 무시하고 불립문자(不立文字)에 딱 얽매어 앉기만 좋아하여 암중(暗中)에 모색하는 것이 암증선인데 이것은 피해야 합니다.
둘째, 문자선(文字禪)이라. 문자만 좋아해서 문자나 언구(言句)를 익혀 자기 나름대로 이론 체계를 세워 나의 공부가 거의 되겠구나! 부처님이나 도인들의 경지가 겨우 이 정도 밖에 안 되구나! 이와 같이 헤아려 문자만으로 헤아리는 게 문자선(文字禪)입니다. 이것도 피해야 합니다.
셋째, 야호선(野狐禪)이라. 약간 닦았으나 미처 법의 한계를 몰라 다시 말해 불(佛)의 차서(次序)를 모르니까, 미오(未悟)를 오(悟)로 미증(未證)을 증(證)으로 착각하는 이것을 증상만이라 하는데 바로 이 증상만(增上慢)을 가리켜서 야호선(野狐禪)이라 합니다. 선은 모름지기 두꺼비선 같은 암증선을 피하고, 문자만 익혀서 한 소리 하는 문자선을 피하며, 법의 한계도 몰라서 미오를 오로 미증을 증으로 하는 야호선 바로 증상만 선을 피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먼 길 가려면 노자가 필요하듯이 불법 역시 성불의 정상까지 가려면 단박에 되면 모르겠지만 단박에 될 수 없는 경우에는 오랫동안 금생 아니면 내생, 내생 아니면 저 내생 그와 같이 우리 수행자는 영겁수행이 필요합니다. 최선을 다하지만 영겁수행(永劫修行) 하겠다는 각오가 서야 합니다. 그러나 속효심(速效心)을 내서 조금 안 되면 조급한 마음을 내어 마음이 바쁘기만 하고 따라서 몸도 바쁘게 합니다.
우리가 금생에 성불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영겁수행의 각오가 필요한데 영겁수행은 문미지귀(文未志貴)라. 불교(佛敎)에서 장부(丈夫)라는 것은 한번 발심하면 성불까지 한시도 퇴전(退轉)이 없는 것이 장부(丈夫)입니다. 장부지관의 뜻을 세워 놓으면 따라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필요하면 경(經)도 약간 봐야만 암중모색 하지 않게 됩니다. 보조국사 「선어록」에는 수행자는 선지식을 만나서 불변수연(不變隨緣) 체용성상(體用性相)의 진리를 알아 닦아야 한다고 합니다.
불변수연이란 것은 불변(不變)은 변치 않는 자리 곧, 영원(永遠)이요 자성(自性)이요 체(體)요 절대를 말하고, 수연 변치 않는 법성이 인연을 따라 변하는 자리, 곧 현상이요 용(用)이요 상대를 말합니다. 중생은 상대만 보고 절대를 모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절대가 보이지 않으니 심지어는 부인해 버립니다. 수행자는 절대가 비록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대가 있으면 절대가 분명히 있어야 함은 이론적인 사실이요 필연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절대를 정(定)해야 하는데 상대밖에 모르는 중생은 절대를 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상대에서 절대를 정해서 절대와 상대가 둘이 아님을 증(證)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불변수연 체용성상이라. 불변(不變)은 체(體)요 동시에 성(性)이요 수연(隨緣)은 용(用)이요 상(相)이라는 이치를 알고서 현상밖에 모르는 우리는 참다운 실상(實相)을 알고자 닦습니다. 이와 같이 분명히 체계를 알고 닦으면 좋은데 그것을 모르면 신심도 떨어지고 헤매기 쉽습니다. 분명히 안 다음에는 상(相)에서 성(性)으로 현상에서 본체(本體)로 용(用)에서 체(體)로 수연에서 불변으로 가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방법으로 화두를 참구 한다든지 염불하고 주문을 왼다든지 하는데 우리 중생은 현상이 있고 체를 미처 못 정한지라 자꾸 걸리게 마련입니다. ()
체가 훤하니 보여 불변(不變)함을 알면 만상(萬象)이 천차만별이었다 하더라도 체성(體性)은 하나요, 동체(同體)인지라 헤매지 않게 됩니다. 갑(甲)으로 보나 을(乙)로 보나 모두 체에서 나온 것이니 체에서 나와서 임시로 인연 따라서 갑이요 을로 머무르기 때문에 체와 더불어 조금치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차만별로 무수한 현상이 있다 하더라도 본체에서 인연 쫓아 잠시간 상(相)만 보일 따름이어서 상 그대로 체입니다. 따라서 색즉공(色卽空)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을 우리는 공 가운데서 석공(析空)과 체공(體空)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야심경』 풀이에서 즉공(卽空) 바로 체공(體空)을 말하지 못하면 『반야심경』의 공을 모르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공은 상(相)이나 물질로 분석한 뒤에 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색(色) 그대로 당체(當體) 즉공(卽空)이라. 어느 현상을 잡으나 마이크를 잡으나 몸을 딱 잡으나 뭘 잡으나 간에 당체가 공일 때 그때 『반야심경』의 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이란 것을 분석해 나가면 끝에 가서 공이 되겠지 하는 것은 과학적인 분석 곧 석공(析空)이지, 당체즉공(當體卽空) 그 모양 그대로 공을 말하고 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색 그대로 공이기 때문에 공 그대로 색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용은 체를 떠나서 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체를 전제로 해서 용입니다. 공은 공(空)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알맹이가 색(色)입니다. 다만 중생은 체(體)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없기 때문에 용이나 색만 보고 따지기 때문에 분별이 생기고 자타시비(自他是非)가 있습니다.
비록 나와 너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똑같은 체에서 왔기 때문에 똑같은 본성이기 때문에 김가 되나 박가 되나 본성은 변치 않습니다. 김가라 해서 김가 권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김가, 박가나 천차만별로 두두물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본성은 변치 않습니다. 금으로 해서 본성에서 팔찌를 만드나 금시계를 만드나 금이란 자체는 변함이 없듯이 우리 본성이 어떻게 변화되던 간에 어떤 상이던 간에 성이 변화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바로 본 사람은 나를 너다 하고 너를 나라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본성 자리에서는 조금도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연 따라서 잠시간 그림자 같은 모양만 차이가 있습니다. 모양 그것은 실존이 아닙니다. 실존은 오직 자성체(自性體) 뿐입니다. 그러나 자성 가운데 신비 불가사의한 일체공덕이 들어있기 때문에 인연이 만나면 그때에는 모양을 나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당체즉공(當體卽空)을 알아 증(證)해야 합니다. 즉공(卽空)을 보다 더 원만히 풀이하면 당체즉시(當體卽是)라. 개미 한 마리나 그야말로 원소 알맹이 하나라도 당체(當體) 그대로 즉시(卽是)요 즉시로 온 우주의 진리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알아 나아갈 때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평상심은 누구를 미워하는 등 어떻게 생각하나, 분별 시비하는 그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의 자성이 부처요 평상심입니다.
무색투명한 마니보주(摩尼寶珠)가 검정색에 가까이 하면 검게 나오고 붉은색에 가까이 하면 붉게 반영되듯이 자성이 어떻게 변화되든 간에 우리 중생은 분별지를 내서 이것은 검다, 저것은 붉다고 나눈 것이지, 실제는 무색투명한 마니보주가 검게 붉게 나타남을 중생이 볼 때 다른 색으로 변화된 것이지 마니보주 그 자체가 변함이 없듯이 우리의 자성도 역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미워하는 그 마음도 당체는 자성이고 좋아하는 그 마음도 당체는 불성 자성입니다. 이것을 알아서 마음을 평상심에 딱 두고 공부해야만 마음이 헐떡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숨도 헐떡이게 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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